자신만의 흔적을 모으지 않고 성공을 꿈꾸지 말라

어머, 어떡해!” 밤늦게까지 작업에 몰두하다 그대로 잠든 윤혜지 씨는 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어머니가 끓여준 미역국이 아침상에 올랐지만, 제대로 뜨는 둥 마는 둥 다시 컴퓨터 앞으로 달려갔다.
오전 중에 보내주기로 한 캐릭터 시안을 마치려면 일분일초가 급했다.
2012년 8월, 그녀의 스물두 번째 생일은 그렇게 무심하게 지나갔다. 내심 아쉬웠지만 ‘내게는 생일이어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생일이 아니잖아?’ 하고 마음을 추스르며 다시 펜을 잡았다.

글 | 김성훈 기자 사진 | 홍수정 기자 디자인 | 김현정 기자 일러스트 제공 | 윤혜지

 
 
윤혜지 씨는 요즘 팬시업계에서 손꼽히는 인기 캐릭터작가다. 그녀가 만든 돼지토끼 ‘몰랑’이는 항상 (·ㅅ·) 표정에 동글동글 짜리몽땅한, 꽉 깨물어주고플 만큼 귀여운 녀석이다. 인형, 문구, 폰케이스, 생활용품 등 110여 종에 이르는 캐릭터상품이 출시된 몰랑이는 중국·동남아·남미 등에도 팬이 늘고 있는 추세. 몰랑이의 캐릭터사업을 진행하는 (주)필벅은 지난해 9월, 몰랑이를 앞세워 프랑스의 모바일 게임기업 욤제오Yomzeo와 100만 달러 규모의 계약을 맺기도 했다.


낙서에서 기부까지, 몰랑이의 모든 것
본인은 이같은 몰랑이의 인기를 예상했을까?

“유치원 때부터 미술을 좋아했고, 중학생 때부터 ‘내가 디자인한 캐릭터상품들이 팬시점에서 팔렸으면’ 하는 막연한 꿈이 있긴 했어요. 하지만 미술을 전공하면서 창작이 얼마나 힘들고 책임감도 필요한 일인지 알게 되면서 망설여졌어요. 뜻밖에 낙서처럼 그리던 몰랑이 덕에 작가가 되고, 또 이렇게까지 큰 인기를 끌 줄은 몰랐죠.”

     
 
 
 
몰랑이는 2009년, 그녀가 틈틈이 끄적이던 습작노트에서 탄생했다. 지금이야 몰랑이 하면 특유의 2등신 몸매가 떠오르지만, 처음엔 끝이 뭉툭한 치즈스틱 같은 외형이었다. 그러던 것이 짧고 오동통한 캐릭터를 선호하는 트렌드에 맞게 수정작업을 거치며 지금의 모습이 됐다.
그리고 그 해 9월, 혜지 씨는 블로그를 개설하고 그동안 그린 몰랑이와 일러스트들을 올렸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콘텐츠의 무료공개를 꺼리지만 그녀는 몰랑이를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했다. 몰랑이 일러스트가 폰 바탕화면, 스티커, 다이어리 패치로 사용되면서 혜지 씨는 차츰 유명해졌고, 캐릭터 잡지 등에도 인터뷰가 나갔다. 그런 몰랑이를 눈여겨 본 사람이 있었다. ‘엽기토끼’ 마시마로를 히트시킨 (주)필벅의 이창현 대표였다.


“한마디로 몰랑이에 반했어요. 보자마자 ‘바로 이 캐릭터다’ 싶었죠.” 당시를 회상하는 이 대표의 말이다. 몰랑이의 가능성을 한눈에 알아본 그는 몰랑이 캐릭터 사업을 제안했고, 2011년 11월 계약이 성사됐다. 몰랑이가 들어간 첫 상품은 이듬해 발렌타인 데이-화이트 데이
시즌을 맞아 선보인 카카오톡 이모티콘 서비스. 이 이모티콘은 약 5만 건의 다운로드를 기록하며 대박 조짐을 알렸다. 이후 다양한 관련상품이 출시되는 등 몰랑이의 성공스토리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혜지 씨는 금방 유명인사가 됐다.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르는가 하면 포털에서 그녀 이름으로 검색되는 기사만 100건 가까이 된다.
“아직 학생인 데다 데뷔한 지 1년밖에 안 된 신인이라 언론에 노출되는 게 부담스러워요. 사람들의 기대치에 비해 아직 많이 부족하거든요. 블로그 등을 통해 응원해 주시는 분들이 많아 힘내서 일할 수 있어 기쁩니다.”
최근에는 다이어리 수익금 전액을 어린이단체에 후원했다. ‘남을 도우면 기분이 좋아지기에 기부를 하고 싶은 뜻을 블로그에 몇 번 올렸는데, 마침 기회가 닿았다. 앞으로 액수를 계속 늘려가고 싶다’는 게 그녀의 귀띔이다.


▲ 몰랑이의 변천사 원래 몰랑이는 치즈스틱처럼 길쭉한 모양이었지만, 짜리몽땅한 캐릭터를 선호하는 대중의 기호에 맞게 수정을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됐다.
▲ 몰랑이의 변천사 원래 몰랑이는 치즈스틱처럼 길쭉한 모양이었지만, 짜리몽땅한 캐릭터를 선호하는 대중의 기호에 맞게 수정을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됐다.

고객의 숨은 니즈needs까지 긁어줄 수 있어야
숙명여대 시각영상디자인학과 09학번인 혜지 씨는 올해로 3년째 휴학 중이다. 많은 것을 배워야 할 때지만,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고민 끝에 내린 선택이다. 주 작업실은 자신의 방. 출퇴근 시간을 아낄 수 있고 편한 마음으로 일에 몰두할 수 있어 재택근무를 선택했다. 대개 재택근무는 남들 눈치 볼 일 없이 편하고 여유 있게 일하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몸과 마음이 느슨해지지 않게 엄격한 절제와 자기관리가 필요해 오히려 더 어렵다고 한다.
혜지 씨 같은 프리랜서 작가들은 주로 고객(클라이언트)들의 외주를 받아 작업하기 때문에 마감 준수는 생명과도 같다. 일감이 한번에 몰리는 경우가 많아 하루에도 두세 가지 작업을 해낸다. 하루 평균 작업시간은 12시간, 새벽 같이 일어나 다음날 새벽까지 일할 때도 많다. 그렇다고 무작정 열심히만 하는 건 무의미하다. 작은 그림 하나를 그려도 ‘이 그림이 들어갈 제품의 용도와 콘셉트는 무엇인지’ ‘주 구매층은 누구인지’ 등 클라이언트의 숨은 니즈needs까지 시원하게 긁어줄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 플립형 폰케이스, 휴대폰 홀더, 이어캡 등 다양한 몰랑이 캐릭터상품들. 특유의 앙증맞음이 잘 살아 있다.
▲ 플립형 폰케이스, 휴대폰 홀더, 이어캡 등 다양한 몰랑이 캐릭터상품들. 특유의 앙증맞음이 잘 살아 있다.


“여유를 두고 해도 되는 디자인도 클라이언트 업체들에게 하루라도 빨리 넘겨주고 싶은 욕심에 제 쪽에서 먼저 마감을 며칠씩 앞당기곤 합니다. 제품 하나가 시장에 나오기까지 적어도 여러 달이 걸리거든요. 제품을 기획하고 샘플이 나오는 데 한두 달, 샘플에서 발견된 문제점을 보완한 수정품이 나오기까지 또 한두 달…, 그래서 옷이나 전기담요 같은 계절상품의 경우 여름에 겨울 디자인을, 겨울에 여름 디자인을 할 때가 많습니다.”
대중의 기호를 파악하기 위해 패션·캐릭터 잡지나 TV를 꾸준히 보고 인터넷으로 캐릭터상품을 살펴보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트렌드를 읽는 특별한 비법이 있느냐?’는 질문에 ‘자주 팬시점을 방문해 사람들이 어떤 제품을 구매하는지 유심히 관찰한다’며 노하우를 전했다.


잘 키운 블로그 하나, 열 스펙 안 부럽다

몰랑이가 잘 나가는 비결은 과연 뭘까? 작가 윤혜지 씨는 무엇보다 블로그를 첫손에 꼽는다. 그녀는 몰랑이를 비롯해 자신이 창안한 캐릭터나 일러스트를 꾸준히 블로그에 올렸고, 그렇게 차곡차곡 포스트들이 모여 그대로 훌륭한 작품집(포트폴리오)이 됐다. 그리고 이 일러스트들을 무료로 공개함으로써 몰랑이는 대중에게 거부감 없이 다가가 단기간에 팬층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 블로그는 마케터 역할까지 대신해 준다. 날마다 포스트를 올리는 등 블로그를 성실히 관리해 둔 덕에 그녀는 자신과 같은 스타일을 필요로 하는 클라이언트들을 손쉽게 끌어올 수 있었다. 블로그 방문객들의 댓글이나 쪽지는 혜지 씨가 다음

 
 
작품을 그리는 데 필요한 영감과 아이디어의 원천이다. 블로그는 나태해지는 것을 막아주는 데에도 크게 도움이 된다. 휴일도 쉬지 못할 만큼 일에 치어 살지만 그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새 포스트를 올린다. 현재 누적 방문자 수는 약 300만 명.
“원래 블로그를 통해 몰랑이를 알렸는데, 바빠졌다고 블로그 운영을 소홀히 하면 초심을 잃은 거잖아요. 요즘은 대학생들 사이에 학점이나 자격증 등 스펙 경쟁이 치열한데요. 자신을 보다 효과적으로 어필하려면 포트폴리오나 습작, 사진첩 등 자신의 분야에 매진해 온 흔적을 모아두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윤혜지 씨와 함께한 두 시간 동안 한편으론 프로다운 그녀의 섬세함과 열정, 다른 한편으론 학생다운 순수함과 겸손함이 느껴졌다. 재미삼아 그린 습작노트 속 그림이 지금은 주인을 어엿한 팬시업계의 대표적인 캐릭터작가로 성장시켰다. 혹 우리 모두가 몰랑이 같은 큰 성장의 기회를 묻어놓고 사는 건 아닐까?

 
 

“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는 지금,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꼭 도전해 보세요. 하루 한 시간 정도 자신의 목표를 위해 투자하고 또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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