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기회로, 부에나스 누에바스 태윤섭 대표

파라과이 빙과업계 시장 점유율 1위 기업인 부에나스 누에바스 Buenas Nuevas S.A.의 태윤섭 대표. 최근에는 빙그레 제품을 수입하여 남미 시장을 겨냥한 마케팅 전략을 세우고 있다는데, 마침 12년만에 한국을 방문한 그를 만나 아이스크림으로 남미인들에게 사랑받게 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남미의 심장이라 불리는 파라과이는 국민음료 떼레레와 마떼차의 본고장으로 유명하다. 태윤섭 대표가 파라과이에 정착하는 데 떼레레가 결정적으로 한 몫을 했다는데, 30여 년 전 그때로 돌아가 무시와 설움 속에 지내온 그의 삶을 되짚어 보았다.

 
 

태윤섭
하회탈을 연상케 하는 한국적인 미소가 인상적인 그는 1950년 전북 임실 출생으로, 인천전문대학 강사로 재직 중에 파라과이로 돌연 이민을 갔다.10년간 행상으로 번 돈으로 1995년 BIS S.A. 빙과제조 및 음료회사를 창업하고, 2001년 빙과제조업을 Buenas Nuevas S.A.로 분리해 현재까지 대표로 있다. 파라과이 한인문화재단 부이사장을 역임하고, 한인회장 선거관리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박사 학위 포기하고 떠난 남미
그가 연세대행정 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치고 직장을 다니다 인천전문대학 강사로 재직하던 때 일이다. 주변의 쟁쟁한 박사 출신 교수들의 이력을 보며 자극을 받은 그는 박사학위 취득을 위해 1985년 일본 유학을 결정했다. 유학 준비를 마치고 개강날만 기다리던 중 친구의 초청으로 유명한 이구아수 폭포와 주변국을 관광할 생각으로 파라과이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 여행이 인생의 변환점이 될지 전혀 모른 채 말이다.
파라과이에 도착하자마자 낭패를 당했다. 친구의 부탁으로 가지고 갔던 시계들이 세관에 걸린 것이다. 단기 비자를 받아왔는데 세관 문제로 체류기간이 지연되면서 장기 비자로 바꾸려면 영주권 신청을 해야 하는 상황까지 이어졌다. 이미 개강일은 훌쩍 넘긴 시점이라 애가 탔다. 그런데 그때 신기하게도 파라과이 사람들의 삶이 그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한국에서는 직장을 위해 주말도 반납하고 일해서 가족의 얼굴을 대면하기도 어려웠는데 그들은 오후 5시만 되면 가족끼리 오순도순 모여 앉아 떼레레를 돌려 마시는 거예요. 그 모습이 무척이나 부럽더라고요.”
떼레레를 돌려마시며 정을 나누는 가족적인 모습에 그는 푹 빠져버렸다. 관광하러 갔던 남편이 이민을 가자는 통보를 해왔을 때 가족들의 반응은 황당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의 끈질긴 설득 끝에 드디어 1985년 11월, 그의 나이 37세에 파라과이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당시 파라과이 한인들은 주로 자동차에 물건을 싣고 다니며 파는 행상을 하거나 미니 슈퍼를 경영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라면 거들떠 보지도 않았을 일이지만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기에 체면이나 자존심을 생각할 겨를 없이 행상을 선택했다. 처음에는 옷과 운동화로 시작해 나중에는 전자제품과 반지, 목걸이, 귀고리 등의 액세서리도 팔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장사에 재미도 붙고 돈도 잘 벌려 경제적인 여유가 생겼다.
행상을 한 지 10년이 지났을 때쯤 나만의 사업체를 갖고 싶었다. 어떤 업종이 좋을지 고심하다 40도를 웃도는 남미의 여름 날씨에 아이스크림 장사를 하면 잘될 것 같았다. 전혀 해보지 않은 일이었지만 이민을 결정했던 때처럼 도전의 불씨를 당겨 보았다. 마침 함께 도와주겠다고 나선 교민이 있어 빙과 제조사업에 뛰어들었다.

▲ 매일 공장을 돌며 직원들을 격려하고 애로사항을 듣는 것이 그의 하루 일과 중 하나다.
▲ 매일 공장을 돌며 직원들을 격려하고 애로사항을 듣는 것이 그의 하루 일과 중 하나다.

6개월간 직접 만든 아이스크림으로 승부 걸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어려움에 부딪혔다. 도와주기로 한 교민이 어느 날 손을 떼는 바람에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조각배 신세가 됐다. 이미 기계와 장비까지 사놓은 상태라 그만둘 수도 없었다. 그는 홀로 아이스크림 제조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에서 빙과 전문가를 초빙하고, 아이스크림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서 레시피를 구해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현지인들의 입맛에 맞는 아이스크림을 위해 수차례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6개월간의 사투 끝에 1995년 드디어 본인의 성을 붙여 소베르또 따에Soberto Tae라는 제품을 출시하게 됐다. 한국인이 만든 아이스크림을 누가 사 먹을지 의심도 됐다. 하지만 당시 시장 조사 결과 90퍼센트 이상 시장을 점유하고 있던 빙과 회사가 상점 고객들에게 너무 불친절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남다른 전략을 시도했다. 파라과이는 전기사정이 좋지 않아 바람만 세게 불어도 전기가 자주 끊어져 아이스크림이 녹는 일이 빈번했다. 하지만 이런 경우 제품을 교환해 주지 않았고, 원하는 날에 상품을 공급을 해주지 않아 상점주들의 불만스런 목소리가 컸던 것이다. 태 대표는 현지의 열악한 형편을 이용한 마케팅 전략을 시도했다.
“천재로 인한 고객들의 손해는 보상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해서 전기가 나갔을 때 녹은 모든 제품을 교환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고객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 같아요. 어느 날 보니 기존에 시장을 장악했던 제품은 온데간데없더라고요.”


▲ 브라질과 파라과이에서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는 빙그레 아이스크림을 이제 그의 회사에서 직접 생산 판매할 예정이다.
▲ 브라질과 파라과이에서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는 빙그레 아이스크림을 이제 그의 회사에서 직접 생산 판매할 예정이다.


이민자에 대한 무시와 강도 사건을 넘어

무작정 시작한 타국 생활인지라 언어문제가 제법 컸을 것 같았는데 의외의 답변이 돌아온다. 언어습득은 행상을 하며 단어를 하나씩 익힐 수 있어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았다고. 오히려 언어보다 그를 힘들게 한 것은 한국인에 대한 무시였다. 못 먹고 못 살기 때문에 이민 온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한인을 꼬레꼬(토끼)라고 부르며 풀만 먹고 사는 사람이라고 놀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무시는 88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수그러져갔다. 특히 마라톤 경기 도중 보이는 한강 변의 발전된 모습을 보고 현지인들이 기절할 정도로 놀랐다고. 그 후 2002 FIFA 월드컵 경기도 열리고 질 좋은 제품들이 소개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K팝 경진대회까지 열려 한국은 무시가 아닌 질시와 부러움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그에게도 귀국을 고민하게 했던 사건이 있었다. 강도 사건이 그것이다. 첫 번째 사건 때는 강도에게 머리를 맞아 열두 바늘을 꿰맸다. 두 번째는 운전석에 앉은 자신에게 강도가 총을 겨눈 사건이었다. 다행히 방탄 유리였기에 총알이 튀어 나가 돈만 빼앗기고 목숨은 구했다. 얼마나 놀랐던지 한동안 이민생활에 회의가 들 정도로 힘들었다는데, 이 일은 파라과이 사회를 이해하게 된 계기로 삼았다고 한다.

반복된 포기와 도전을 통해 성장하다
그는 전북 임실에서 4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우여곡절 많은 학창시절을 보냈다. 학교에서 공부를 곧잘 하던 그는 전주 시내 중학교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돈이 든다는 이유로 집에서 가까운 중학교에 입학시켰다. 고등학교 진학할 때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때 꿈이 없어지며 평범하게 취직을 준비하던 그에게 한 선배가 대학 입학을 강하게 권해 다시 도전했다. 열심히 공부해 공군사관학교에 합격은 했지만 또다시 절망이 찾아왔다. 시력에 문제가 있어 그 길도 포기해야 했다. 도전과 포기를 반복하다 마침내 원광대 법대에 입학했다. 돈이 없어 원하는 공부를 하지 못했던 그 시절의 설움은 평생에 한이 됐다.
“행상을 할 때부터 한인 문화재단을 통해 장학사업을 시작했어요. 저처럼 돈 때문에 원하는 공부를 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회사를 시작하면서도 그는 직원들을 위해 기술교육도 하고 학자금 지원도 해 주고 있다. 또한 직원들이 행복해야 회사가 잘된다는 경영철학으로 월급만은 단 하루도 늦지 않게 지불한다는 원칙을 세워 지금까지 어김이 없었다고 했다.
태 대표는 2011년부터 빙그레 빙과 제품을 수입 판매하고 있다. 빙그레가 브라질에 수출하던 중에 가격경쟁력을 위해 현지에서 제품생산을 고려하던 차에 이미 빙과업을 시작한 한인 기업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조만간 빙그레 제품을 생산하고, 한국에서 냉동차 부품을 수입 조립해 판매할 계획도 갖고 있다. 파라과이 시장은 한국에 비해 작다고 한다. 그래서 오히려 소자본으로 사업을 할 수 있는 이점이 있어 오늘의 성장이 가능했다는데, 세계적으로도 빙과 제조 사업을 하는 한인 기업가는 태 대표가 유일하다고. 앞으로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등 남미 비관세 나라를 겨냥한 빙과 사업의 성공은 시간문제일 것 같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사춘기 때 친구들에게 무시와 놀림을 받고, 정체성의 혼란을 겪은 그들은 한때 반쪽짜리 삶을 살게 한 아버지를 무척이나 원망했다. 그때 그는 아들에게 ‘생각을 한번 바꿔 봐, 너는 반쪽이 아니라 두 가지를 다 배울 수 있는 거야’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아들들이 훌륭히 자라 지금 태 대표와 동역자로 일하고 있다. 어떤 불행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긍적적 사고로 대면했던 그가 앞으로 남미 전역을 향해 빙그레 웃음을 지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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