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연구가·국민대 명예교수 조희웅

 
 
“당신, 그 일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집 한 채는 사고도 남았을 거예요.” 한신대 국어국문과 김용희 명예교수는 지금도 남편에게 농담 섞인 푸념을 던진다. 김 교수의 남편은 바로 조희웅 국민대 명예교수. 얼마 전 한국 고전소설 882편에 등장하는 인물 21,844명을 정리한 <한국 고전소설 등장인물 사전>을 낸, 고전문학 연구에 필생을 바친 인물이다. ‘고전문학에는 세계인이 즐길 이야깃거리가 가득하다’는 그가 전하는 우리 고전의 재미와 매력, 그리고 가치란?

열정과 집념의 산물, <한국 고전소설 등장인물 사전>
조희웅 교수는 한국 고전문학에 관한 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권위자다. <구비문학 개설>, <한국구비문학대계>, <한국설화의 유형>, <고전소설 줄거리 집성> 등 지금까지 쓴 책과 논문만 100여 편이 훨씬 넘는다. 그런 그가 칠순을 맞이한 지난해, 또 한 편의 역작 <한국 고전소설 등장인물 사전>을 세상에 내놓았다.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우리 고전에 나오는 인물들을 모두 정리한 문헌이 있다면 좋은 자료가 되겠다’고 늘 생각했어요. 그러다 ‘내가 이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면서 제자들과 함께 인물 분류작업을 시작했지요. 그게 1996년의 일입니다.”
그렇게 4년간 자료를 모아 2000년부터 집필을 시작했다. 무려 12년 동안 낮밤을 가리지 않고 공을 들인 끝에 <한국 고전소설 등장인물 사전>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대하소설의 원류랄 수 있는 <완월회맹연玩月會盟宴> 같은 책은 분량이 무려 180권에 이릅니다. 한 권을 아침부터 읽기 시작하면 저녁에야 마칠 수 있으니, 24시간 쉬지 않고 읽는다 쳐도 무려 석 달이 걸리죠. 게다가 읽는 걸로 끝나지 않고 등장인물까지 정리하려면 그 배가 넘는 시간이 걸려요. 결국 작품 하나에 나오는 인물들을 제대로 정리하려면 1년이 걸린다는 얘깁니다. <쌍천기봉雙釧奇逢>은 등장인물이 400명이 넘는 작품이에요.”

     
 
▲ ‘고전소설 인물 사전’ 1권의 ‘강씨 부인’ 항목. 21명의 강씨 부인에 대한 소개가 모두 담겨 있다.
▲ ‘고전소설 인물 사전’ 1권의 ‘강씨 부인’ 항목. 21명의 강씨 부인에 대한 소개가 모두 담겨 있다.

원고분량만 200자 원고지 3만 매에 달하는 <한국 고전소설 등장인물 사전>은 우리 고전소설에 나오는 총 21,844명의 신상과 작품줄거리를 집대성했다는 점에서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이사전이 얼마나 빈틈없이 편찬되었는지 살펴보자. <콩쥐팥쥐전>의 경우, 주인공 콩쥐나 팥쥐는 물론 심지어 콩쥐 대신 돌밭에 김을 매 준 ‘검은 소’에 대해서도 친절한 설명을 담고 있다. ‘강씨 부인’ 항목을 펼쳐 보니 <유충렬전>, <박씨전> 등 21개 작품에 나오는 21명의 강씨 부인에 대한 소개를 모두 담고 있다. 이토록 상세하다. “우리 고전소설의 인물들을 모두 담았다”는 그의 말에 믿음이 간다. 

고전이 천편일률이라고? 안 읽어보고 하는 소리!
조희웅 교수의 고전문학에 대한 남다른 애착은 어린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선친께서 교직에 계셨던 덕에 유난히 집에 책이 많았다”는 것이 그의 술회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집안 한구석에 꽂혀 있던 고전소설들을 읽으면서 이야기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 그 관심은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나도 소설을 써 보고 싶다’는, 작지만 강한 열망으로까지 자랐다. 1961년 그는 서울대 국어국문과로 진학했다. 소설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서울대에서 장덕순 교수를 만나면서 그의 운명은 바뀌었다. 장 교수는 전공인 구비문학 외에 고전소설과 설화에도 조예가 깊은 학자였다. 스승의 연구실 지킴이 노릇을 하며 연구를 돕던 조희웅은 차츰 스승의 영향을 받아 우리 이야기문학 연구에 골몰하게 되었고,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설화연구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그의 석사논문이 <한국설화연구>다. 이 논문으로 그는 서울대에서 처음 시행된 석사학위 논문 시상제도에서 인문계 최우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그때까지 그의 주 연구분야는 구비설화였지만 박사과정을 공부하면서 문헌설화에까지 관심을 넓혀나갔다.
대학원 졸업 후에는 장덕순 교수와 선배 조동일 교수, 동료 서대석 교수와 함께 <구비문학개설>을 펴냈다. 구비문학을 국문학계의 한 분야로 정립시키는 계기가 된 이 책은 1971년 초판이 발간된 이래 한 해도 중판重版되지 않은 해가 없는, 학계의 스테디셀러다. 이후 정신문화연구원의 의뢰를 받아 서울과 경기도 일대의 구비설화들을 채록해 자료화하는 일도 했는데, 그 중 하나인 <용소와 며느리바위>는 고교 국어 교과서에 게재되기도 했다.
조희웅 교수가 이처럼 50년 넘는 세월을 고전문학 연구에 바친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고전문학의 재미와 가치로 ‘다양성’을 꼽는다. 대개 고전소설은 ‘배경과 주인공만 약간씩 다를 뿐 하나같이 권선징악의 단순한 이야기’로 치부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 비교적 친숙한 <춘향전> 하나만도 서울을 중심으로 전해내려온 경판京板, 전주(옛 완산주完山州) 지역의 완판完板, 경기도 안성의 안성판安城板 등 지금까지 발견된 것만 백 여 종이 넘는다. 줄거리도 저마다 조금씩 다르다. 
“악처의 대명사 뺑덕어미도 경판 <콩쥐팥쥐전>에는 등장하지 않아요. <춘향전>도 경판은 아무래도 양반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라 문체가 우아한 반면 비속한 내용이 적어요. 간략하고 재미가 없을 수밖에 없지요. 완판은 전라도 방언에, 하층민들의 적나라한 생활상을 담은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작품 길이도 길지요. 같은 작품도 이본異本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세계 어느 나라 못잖게 풍부한 유무형의 문화유산을 보유한 나라다. 전통민요인 <아리랑>만 해도 알려진 가사만 수천 절이 넘으며, 지금도 계속 새로운 가사가 생겨나고 있다. 거기에 <밀양아리랑>,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 등 지역별로 다양한 아리랑의 수를 곱하면, 그 풍부함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만큼 다양한 문화유산들을 무지와 무관심 속에 눈 뜨고 잃어버린다면 조상들 앞에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할 일 아닐까?
“‘우리 고전소설은 하나같이 권선징악만을 강조하는 천편일률적인 이야기’라는 건 고전을 안 읽어봤기 때문에 하는 말이에요. 국문학에서 거론하는 고전소설의 수는 천 여 종에 육박합니다. 그 중 일반인들이 직접 읽어본 게 몇 종이나 될까요? 내용도 다양해요. <규중칠우쟁론기閨中七友爭論記>는 실, 바늘, 가위, 골무 등 바느질 도구들이 등장해 서로 잘났다며 다투는 내용이에요. <조슬록>은 서캐(이蝨의 애벌레)가 아버지 실강이(이)와 조벼룩 부녀를 찾아가 싸움을 벌인다는 것이 줄거리입니다.”

 
 

한국 vs. 일본, 노벨상 스코어 18 대 0을 뒤집고 싶다면
조희웅 교수를 보니 일본의 저명한 사학자 히라노 쿠니오가 떠올랐다. 대학원 때부터 일본 고대사의 인물들을 총망라한 사전을 만들겠다는 뜻을 품은 그는 요시카와코분칸이라는 출판사의 지원으로 편찬에 착수했다. 20년 뒤, 그는 7권으로 된 <일본 고대인명 사전>을 완성했다. 책 하나에 20년 넘는 세월을 쏟은 것도 놀랍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출판사의 태도였다. 20년간 한 번도 ‘책을 빨리 마무리하라’고 독촉한 적이 없다는 것. 조희웅 교수는 어땠을까. 그는 책을 출판하는 일이 책을 쓰는 일 못잖게 어려운 과정이었다고 털어놓는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지원을 받을 때 ‘결과물은 반드시 책으로 낸다’는 조건이 붙었어요. 그런데 책을 내기로 한 출판사에서 원고량을 알고 굉장히 난처해하며 책을 내 줄 수 없다는 거예요. 그걸 원망할 수도 없는 게, 손해를 무릅쓰고 팔리지도 않을 책을 낼 순 없잖아요? 여러 곳에 연락하던 중 마침 전에 제 책을 냈던 ‘지식을만드는지식’ 출판사를 통해 책을 출간할 수 있었지요.”
현재 세계 경제의 이목은 단연 일본에 쏠려 있다.  20년 넘게 내리막길을 걷긴 하지만, 언제든 세계정상을 탈환할 수 있는 일본 경제의 저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현재 일본은 ‘아베노믹스’로 대변되는 엔저정책과 경기부양책을 앞세워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이런 일본의 저력은 책, 특히 고전을 사랑하는 성숙한 학문적 분위기와 국민성 때문은 아닐까?
‘온 국민이 책 읽는 나라’인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 때부터 정부가 주도하여 중국과 서양의 고전을 번역·보급하는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지금은 웬만한 고전을 번역본, 문고판, 만화 등으로 쉽게 즐길 수 있다. 한국인들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스마트폰에 빠져들지만, 일본인들은 책 삼매경에 빠져든다. 나라 전체가 책 읽기를 강조하고 숭상하는 분위기다.
일본은 기초과학, 예술분야에서도 세계적 강국이다. 지금까지 학문적 업적으로 노벨상을 탄 일본인은 모두 18명, 한국은 하나도 없다. 일본과 노벨상 스코어를 역전시키고 싶다면 지금 내 손에 뭐가 들려 있는지부터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 조희웅 교수의 <한국 고전인물 등장인물 사전>. 총 25권의 역작이다.
▲ 조희웅 교수의 <한국 고전인물 등장인물 사전>. 총 25권의 역작이다.

고전소설 읽기야말로 문화콘텐츠 경쟁력 갖추는 지름길
세계적으로 3조 원 넘는 수입을 올린 <아바타>에서 보듯, 오늘날은 문화콘텐츠가 성장동력이요 자원인 시대다. 세계인이 함께 즐길 콘텐츠를 생산해내는 창의력과 영감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조 교수는 우리 고전소설이 그 해답이 될 수 있다고 귀띔한다.
“한류의 시발점이 된 <대장금>도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두어 줄에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돼 나온 작품입니다. 그럼 2만 명이 넘는 우리 고전소설 속 인물들을 살피면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나올까요? 고전은 콘텐츠를 생산하는 이들에게 창의력과 영감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반갑게도 지난 몇 년간 <뿌리 깊은 나무>, <해를 품은 달> 등 이른바 퓨전사극이 꾸준히 인기몰이를 했다. 극장가에서는 <광해>가 1,000만 관객을 동원했고, 안방극장 역시 사극 천하다. <구가의 서>, <장옥정>, <구암 허준>, <대왕의 꿈> 등 연일 사극이 방영되고 있다. 우리 고전에 바탕을 둔 콘텐츠들은 기존 서구 중심의 콘텐츠와 다른 새 가치관도 제시한다는 게 조희웅 교수의 설명이다.
“서양 고전문학 속 주인공들은 출세나 부귀, 명예 등 개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예가 많습니다. 반면 우리 고전의 인물들은 충, 효, 절개 등 공공의 가치를 추구하죠.”
마지막으로 조희웅 교수에게 독자들에게 고전 읽기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워주길 부탁했다.
“고전古典이란 말 그대로 예로부터 오랫동안 읽히고 모범이 되는 책을 가리킵니다. 이는 단순히 옛날 얘기가 아니라 오늘날의 얘기, 먼 옛날의 얘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시대와 사람 사는 모습이 달라져도, 사람이 사는 마음의 구조나 근본원칙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고전 속에서 오늘에 되살릴 만한 가치와 양식을 찾기를 바랍니다.”

 
 

 조희웅 교수가 전하는
고전 읽기 노하우

 

1. 지금이야말로 고전을 읽기에 최적기다
고전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이미 웬만한 작품은 현대어로 번역되어 나와 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좋은 고전을 구해 읽을 수 있다. <성호사설>, <국조보감>, <열하일기> 등 어렵고 방대한 고전들도 시중에 완역본이 나와 있다. 고전연구가로서 요즘 젊은 세대들이 부럽게 느껴질 때가 많다.

2. 한 권, 한 대목만 읽어도 좋다
<오주연문장전산고> 같은 책은 역사, 천문, 지리, 종교, 음악, 등 1,417개에 달하는 항목을 정리한, 요샛말로 하면 백과사전 같은 책이다. 이런 책은 한 번에 다 읽으려고 하지 말고, 한 대목만 뽑아서 읽어도 재미가 있을 뿐 아니라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역대 조선 임금들의 업적을 기록한 <국조보감>도 마찬가지다.

3. 편견을 버리고, 숨은 고전을 찾아 읽자
‘고전이 뻔한 스토리’라는 것은 편견에 불과하다. 드라마나 영화로 각색되는 등 가장 널리 알려진 <춘향전>만 해도 읽다 보면 눈길을 뗄 수 없는 판본들이 많다. 알려지지 않은 고전 중에도 숨은 걸작이 많다. <최척전> 같은 경우 조선과 중국은 물론, 멀리 일본과 베트남까지 등장할 정도로 큰 스케일을 자랑한다.

4. 시대적 배경을 알고 읽으면 재미가 두 배!
<강도몽유록>은 병자호란 이후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죽은 15명의 여인들이 청허선사라는 스님의 꿈에 나타나 저마다의 슬픈 가족사를 토로한다는 내용으로, 전란 속에서도 무능하기 짝이 없는 지배계층과 조선사회의 모순, 나라를 잃은 슬픔을 적나라하게 담고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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