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러운 역사를 간직한 고려인의 삶

▲ 고려인들이 카자흐스탄의 베쉬또베에서 쓴 글.
▲ 고려인들이 카자흐스탄의 베쉬또베에서 쓴 글.
 “1937년 10월 카자흐스탄의 우쉬또베!

분명 기차를 타고 내린 곳에는 우리의 새 보금자리가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곳엔 찬 바람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온통 허허벌판이었던 그곳에서 우리는 겨울을 보낼 곳을 찾아야 했어요. 17만 명이나 되는 한국인들이 땅속에 굴을 파고 그 안에서 겨울을 보내야 했어요. 아무것도 없는 그 곳에서 우리의 처절한 타향살이가 시작됐고 이곳에서 중앙아시아의 『까레예츠』 즉, 고려인의 역사가 시작됐어요.”

   강제이주는 러.일 전쟁 때 일본에 협조할 수 있다는 미명하에 스탈린이 결정한 정책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사할린 일대의 한국인들은 1937년 10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중앙아시아로 이동하게 되었다.
  당시 소련공산당정부는 동물, 가축을 싣고 옮기는 화물열차에 고려인 들을 빽빽하게 태웠다. 그리고 기차는 한없이 어디론가 달렸다. 좁은 화물칸에서 짧게는 일주일에서 한달 동안 짐짝처럼 실려 시베리아를 거쳐 이곳 중앙아시아로 실려왔다.
  화장실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화물열차 안에서 갓난아기를 안고 안타까워하는 여자, 배가 고파 죽어가는 사람들의 신음소리,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 열차 밖으로 던져지는 시체들,,,. 거의 한달 동안 먹고 자고 배설하는 일 등 거의 모든 삶의 행위들이 달리는 기차의 화물칸에서 이루어 졌고, 추위와 배고픔으로 인해 사람들이 죽었다.

  이 해 겨울을 지내는 동안 강제 이주 당한 사람 중 태반이 그렇게 죽어 나갔다.

▲ 고려인 최초 정착지인 카자흐스탄의 우쉬또베
▲ 고려인 최초 정착지인 카자흐스탄의 우쉬또베

   끝없는 허허벌판에 선 고려인 들은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도 모른 체 덩그러니 버려질 수 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어두운 허공에 던져진 느낌으로 새 삶을 시작해야 했다.

  그렇게 고려인 들은 그 해 겨울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혹독한 중앙아시아의 겨울추위를 이기기 위해서 맨손으로 땅굴을 파서 살아야 했고 굶주림에도 맞서 싸워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추위에 허덕였지만 이들은 끝내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렇게 살아남은 고려인 들은 그 이듬해부터 따뜻한 나라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해서 키르기스탄, 타지키스탄 등으로 이전해가며 삶의 터전을 넓히며 일구어 나갔다.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농업 일을 시작하면서 현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심지어 경작일 이나 농장일 방법을 전수해주기도 하면서 더욱더 좋은 관계를 가질 수가 있었다.

▲ 김병화 흉상
▲ 김병화 흉상
  그 중에 특히 우즈베키스탄에 정착한 ‘김병화’라는 사람은 가히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는 구 소련 정부로부터 노력영웅 이라는 칭호를 받은 사람이다. 그는 농장의 유능한 조직자였다. 그가 또 진보적이고 다양한 사고방식으로 농장을 이끌어서 두 번의 노력 영웅 칭호와 함께 훈장을 받기도 했다. 지금도 그의 이름을 딴 김병화 마을, 김병화 박물관이 있다.

  또한, 카자흐스탄에도 소수민족인 고려인으로서는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초대 헌법재판소장까지 지내신 분도 있고, 그분의 이름을 딴 거리는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그분의 딸이 카자흐스탄 알마티 교회 자매님이다.)

  그 외에도 각계각층에 학계, 법조계, 경제계에도 많은 한국인들이 활동하고 있다.

   한국인들 특유의 근면, 성실, 끈질김, 부지런함 덕분에 이 나라에서 쉽게 동화되고 또 현지사람들도 고려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래서 소수민족이지만 이곳에서 중상류층을 이루면서 대부분 윤택한 생활을 하고 있다. 구 소련시절에는 모국인 한국에서도 관심을 받을 수 없었지만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이들은 중앙아시아에서 깊이 뿌리내려 살아가고 있다.

  밟아도 뿌리 뻗는 잔디 풀처럼.

 

저작권자 © 데일리투머로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