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만 유튜버 ‘JOSHUA CHO’

“기역, 니은, 디귿”, “안녕하세요?”, “맛있게 먹었어요.” 유튜브 채널 ‘JOSHUA CHO’에는 한글 자음, 모음부터 한국어 문법, 회화까지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영상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특이점은 채널 운영자가 한국인이지만, 필리핀 현지어인 ‘타갈로그어’로만 촬영한다는 점이다. 필리핀 현지에선 자타공인 ‘한국어 초보자 필수 구독 영상’으로 불린다는 이 채널. 구독자는 약 47만 명으로, 조회 수 100만 회가 넘는 영상이 수십 개다. 페이지 중간중간에는 필리핀 유명 연예인과 국회의원 파퀴아오와 만난 모습도 등장한다. 한국어를 가르치는 영상으로 필리핀 인기 유튜버 순위 1,2위 자리를 다투다니. ‘대체 한국어를 어떻게 가르치길래?’라는 궁금증이 따라붙는다. 봄비가 내리던 어느 날 그 답을 들으러 ‘조성혁’ 씨를 만나러 갔다.

조성혁세 살 무렵부터 필리핀에서 살았다. 타갈로그어와 영어, 한국어까지 3개 국어가 가능하다. 대학 시절 통·번역 일을 하다가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마주하고 한국 신학교로 진학했다. 현재 국내에서 전도사로 사역을 하고 있으며, 한국어 가르치는 유튜버이자, 인천 필리핀센터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온라인 창을 통해 많은 사람과 소통하는 것이 그의 즐거움이다. 사진 이성옥 프리랜서
조성혁
세 살 무렵부터 필리핀에서 살았다. 타갈로그어와 영어, 한국어까지 3개 국어가 가능하다. 대학 시절 통·번역 일을 하다가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마주하고 한국 신학교로 진학했다. 현재 국내에서 전도사로 사역을 하고 있으며, 한국어 가르치는 유튜버이자, 인천 필리핀센터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온라인 창을 통해 많은 사람과 소통하는 것이 그의 즐거움이다. 사진 이성옥 프리랜서

반갑습니다. 유튜브를 통해 한국어를 가르치신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저는 교회 전도사입니다. 3년 전,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릴 때 모든 길이 막혔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들은 조언인 ‘안 될 것이라고만 생각지 말고, 어떤 것이든 일단 도전하라.’ 그 한 문장이 전환점이 되었어요. 때마침 필리핀에 사는 현지 친구들 몇 명이 제게 한국어를 가르쳐달라고 연락이 왔어요. 온라인 화상 채팅으로 친구들과 모여서 수다도 떨며, 편하게 한국어를 가르쳤어요.

처음에는 두세 명 정도였는데, 배우고 싶다는 친구들이 점차 늘었어요. 누구든 참여 할 수 있게 SNS 라이브 방송으로 수업을 했죠. 참석자들이 수업이 끝날 때마다 ‘덕분에 코로나 시기에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너무 잘 가르친다.’라는 댓글을 달아줬는데, 그게 입소문이 나면서 수십 명으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그때부터 교육 영상을 찍어서 하나둘 유튜브에 올리기 시작했는데 조회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죠.

편하게 시작한 영상이 폭발적 반응을 일으킨 거군요.

이런 반응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저는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필리핀으로 이민을 갔어요. 세 살 때였죠. 덕분에 봉사활동의 일환으로, 때로는 용돈을 벌기 위해 한국어를 가르쳐본 적이 있어요. 필리핀 사람들이 한국어 배우기에 흥미가 있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많은 분이 관심을 가질 줄은 몰랐어요.

제 짐작으로는 ‘타갈로그어’로 수업을 한 공이 큰 것 같아요. 필리핀은 영어를 공용어로 쓰지만, 모국어는 아니잖아요. 그래서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도 이해 할 수는 있지만, 해소되지 않는 답답함이 있다고 해요. 의도치 않게 제가 그들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준 셈이죠. 또 저도 한국어보다 타갈로그어와 영어를 더 먼저 배웠거든요. 초등학생 때 집에서 부모님께 한국어를 배웠는데, 1년 동안 한국어 모음과 자음만 겨우 익혔어요. 제가 배우는 속도가 많이 느렸거든요.(웃음) 한국어를 어렵게 배워서인지, 사람들에게 쉽게 설명해 주려고 많이 고민했던 것 같아요. 필리핀 사람이 한국어를 배울 때 어려워하는 부분도 잘 알고요.

무엇을 가장 어려워하나요?

한국어 문법이요. 그중에서도 ‘문장 구성하기’가 최고 난이도로 꼽히죠. 타갈로그어는 ‘서술어+주어+목적어’ 순으로 문장을 구성해요. 그런데 한국어 어순은 ‘주어+목적어+서술어’이거든요. 저도 처음에는 굉장히 헷갈려 했던 부분이에요. 그런데 어떤 언어든 왕도는 하나인 것 같아요. 많이 듣고, 많이 말하기! 저는 중고등학생 때 필리핀으로 봉사하러 온 대학생 형, 누나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한국어 실력이 많이 늘었어요.

2023년, ‘Korean Camp Tour’라는 이름으로 필리핀 30개 도시를 순회하며 행사를 진행했다. 채널 구독자 외에도 지역 주민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한국 문화 체험 부스도 설치했다. 어느새 코로나 팬데믹 시기를 지나, 온라인으로만 만나던 분들을 직접 만나고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 감격스러웠다. 사진제공 조성혁
2023년, ‘Korean Camp Tour’라는 이름으로 필리핀 30개 도시를 순회하며 행사를 진행했다. 채널 구독자 외에도 지역 주민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한국 문화 체험 부스도 설치했다. 어느새 코로나 팬데믹 시기를 지나, 온라인으로만 만나던 분들을 직접 만나고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 감격스러웠다. 사진제공 조성혁

그렇군요. 영상 촬영이나 편집은 혼자서 하나요?

처음에는 모든 걸 혼자서 했어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다.’라는 마음으로 편하게 만들었으니까요. 그런데 구독자가 많아지면서 고민이 늘었어요. 시간이 너무 빠듯 했거든요. 하루는 카메라 앞에서 수업하다가 그런 제 속마음이 툭 튀어나왔어요. 그런데 그 영상 아래로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저도 돕고 싶어요.’ 하는 댓글이 많이 달렸어요. 평소에도 댓글창을 통해 구독자와 소통을 활발히 하는 편이었는데, 그 응원이 힘이 되더라고요. 고민 끝에 스텝을 모집했어요. 5천 명이 넘게 지원했던 걸로 기억해요. 놀랐죠. 면접도 보면서 줄이고 줄였지만, 더 자를 수 없어서 1천 명을 모두 스텝으로 받았어요.(웃음)

그는 강단에서 말한다. 자신보다 남을 위해 사는 삶이 더 행복하다고. 사진제공 조성혁
그는 강단에서 말한다. 자신보다 남을 위해 사는 삶이 더 행복하다고. 사진제공 조성혁

그 많은 인원을 운영하는 것도 쉽지 않겠는데요?

맞아요. 막막해서 이분 저분에게 운영 방법에 관하여 많이 물었어요. 최종적으로는 20, 30명씩 한 팀을 구성해서 30개 팀을 만들어 운영했어요. 각 팀의 리더를 두 명씩 뽑았고, 그 팀장들만 모여 저와 회의를 했어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저녁 팀장들을 만나고, 토요일이 되면 제가 수업 영상을 촬영하고, 일요일에는 피드백을 받았어요. 다들 자신의 일처럼 정말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셨어요. 영상이 업로드되면 너나 할 것 없이 서로 공유하고, 홍보도 해주셨고요. 그렇게 스텝 1천 명의 도움 속에 12개월간 함께 활동했습니다. 그때가 제 채널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네요. 일도 열심히 했지만, 서로 대화도 많이 하면서 참 가까워졌어요.

아버지는 청년 시절, 사업가를 꿈꾸다 더 크고 귀한 예수님의 마음을 만나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철없던 자신을 믿어주고, 지켜봐 주신 아버지를 무척 존경한다. 사진제공 조성혁
아버지는 청년 시절, 사업가를 꿈꾸다 더 크고 귀한 예수님의 마음을 만나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철없던 자신을 믿어주고, 지켜봐 주신 아버지를 무척 존경한다. 사진제공 조성혁

유튜버가 된 후 만난 사람들 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분이 있다면요.

필리핀에서 만난 한 남학생이 떠오르네요. 2년 전에 필리핀에서 오프라인 행사를 했어요. 과분한 사랑을 받았던 만큼,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었거든요. 제게 주어진 시간이 2주였는데 총 30개 도시를 다녔어요. 구독자분들과 Q&A 시간도 갖고, 감사한 마음도 마음껏 표현했어요. 그때 수도인 마닐라에서 만난 남학생이 자신도 스텝으로 같이 투어를 하고 싶다고 했어요. 이름이 ‘에이스’였어요. 흔쾌히 수락했고 그때부터 저와 24시간을 함께하며 많은 대화를 나눴어요. 알고 보니 이 학생이 어릴 적부터 보육원과 친척 집을 전전하며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더군요. 대학생이 된 해에 우연히 제 영상을 보게 되었대요.

투어 마지막 날, 에이스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선생님, 저는 살면서 늘 외로웠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몰랐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타인을 위해 살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말에 오히려 제가 감동을 받았어요.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들을까?’ 싶었죠. 제가 한국에 돌아온 후, 그 학생이 필리핀 청소년 센터에서 봉사활동을 하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일본에 가서 봉사를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필리핀에서 중요한 손님이 한국을 방문할 때, 대사관에서 종종 통역 요청을 받았다. 사진은 필리핀 파퀴아오 의원님 그리고 그의 부인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사진제공 조성혁
필리핀에서 중요한 손님이 한국을 방문할 때, 대사관에서 종종 통역 요청을 받았다. 사진은 필리핀 파퀴아오 의원님 그리고 그의 부인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사진제공 조성혁

그 남학생의 마음을 울린 조성혁 씨의 삶이 궁금해지네요.

구독자분들에게 제일 많이 받았던 질문이 있어요. “왜 무료로 한국어를 가르쳐 주세요?” 답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야기가 나와요.(웃음) 말씀드린 대로, 저희 아버지는 필리핀 선교사이세요.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서 자랐고, 배고픈 날이 많았어요. 자라면서 불평불만이 많았어요. 대학생이 된 후엔 학비나 용돈을 직접 벌어야 했어요. 한국어도 가르쳐봤고, 통역 일도 많이 했어요. 그때는 아버지의 삶보다 그렇게 돈을 벌어서 사는 길이 더 좋아 보였어요.

생각해 보면, 불평만 했지 어머니 아버지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오셨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하루는 아버지가 설교 중 이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필리핀에서 복음을 전하고 살면서 많은 일을 만났지만, 단 한 번도 어려움이 어려움으로만 끝난 적이 없습니다. 그 일은 더 큰 기회로, 소망으로 반드시 바뀌었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그렇습니다. 잘 먹이지 못한 날도 많았고, 학교를 보내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는데, 아이들이 이렇게 밝게 자란 것을 보면 정말 감사합니다.”

처음엔 ‘아, 그때 아버지도 어려우셨구나.’라는 생각에 원망이 눈 녹듯 사라지더군요. 또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해하는 아버지를 보며 처음으로 ‘아버지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오셨을까?’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어요.

그 질문의 답을 찾았나요?

한 번은 한국 교회에 와서 1년 정도 머물면서 교회 일을 도왔어요. 그때 예수님의 사랑을 만나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제가 느낀 행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어요. 제 머릿속에는 ‘내일은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까?’, ‘울고 있는 저 친구도 행복해질 방법이 있겠다!’ 등 기대로 가득했죠. 어렴풋이 알 것 같았어요. ‘아, 아버지도 이런 기쁨을 느끼셨겠구나.’ 하고요. 그 시간이 제 삶의 터닝포인트였어요. 그리고 어느새 저도 아버지의 길을 함께 걷고 있었죠. 유튜버 활동을 하면서 한국어도 열심히 가르치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신앙 상담도 많이 하려고 해요. 찰나의 순간일지라도 희망을 얻고 삶이 바뀌는 사람들을 볼 때가 좋거든요. 그 즐거움이 원동력이 되어 하고 싶은 일을 만들어내요. 최근에는 인천에 필리핀 다문화 센터도 열었습니다.

기쁜 소식이네요. 그곳에서 어떤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요?

한국에 거주하는 필리핀 사람들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어요. 유학생, 근로자, 한국인과 결혼해 다문화 가정을 이룬 사람들. 이들이 겪는 공통적인 어려움이 언어와 문화예요. 문화가 다른데, 소통이 잘되지 않으니까 오해가 잘 생겨요. 일하는 사람들은 사장님과 트러블이 생기고, 주부는 남편과 다투게 되고, 학생들은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는 등 문제가 생기는 거죠. 그럴 때 전화로 통역을 하거나, 직접 제가 찾아가서 중재 역할을 해드리기도 했어요. 제가 필리핀 문화도 알고, 한국 문화도 알아서 참 다행이었어요. 이외에도 한국 음식 교실을 열거나 같이 나들이 갈 때도 있어요. 또한 기업 후원을 통해 법률 자문 및 의료 혜택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사진 이성옥  프리랜서
사진 이성옥  프리랜서

앞으로 더 바빠지겠군요. 그래도 유튜브 활동은 이어가실 거죠?

네, 올해는 새로운 콘텐츠를 많이 선보이려 합니다. 예전에는 늘 혼자 콘텐츠를 구성했는데, 최근에 결혼하면서 이젠 아내가 함께 고민해주고 있어요. 너무 좋습니다.(웃음)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 입국을 위해 치러야 하는 시험이 있는데요. 한국어능력시험 공부에 도움이 되는 영상을 먼저 제작해보려 합니다. 그렇게 올해도 정신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보면, 또 모르죠. 구독자가 100만 명이 될지요.(하하)

그의 수업 비결은 역시나 특별했다. 필리핀에서 20년간 살며 몸소 익힌 문화와 현지어 실력도 그랬지만, 뒤늦게 한국어를 익히며 느꼈던 어려움, 문화와 언어 차이로 겪는 고충의 경험, 배고팠던 시절들이야말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것이었다. 그랬기에 한국어를 쉽게 가르칠 수 있었고, 누군가를 향해 손을 내미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주어진 삶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각자의 선택이다. 조성혁 씨는 그의 아버지의 말을 가슴에 담고 살았다. ‘삶에 어려움은 있지만, 어려움으로만 끝나지는 않는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겪는 일도 마침내 그렇게 될 것이라 믿는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니 비가 그치고 따뜻한 해가 얼굴을 내민다. 그렇게 또 새로운 생명이, 희망이 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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