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덕전통된장 이성훈 · 김경진 부부

드라마에서 우리는, 원하는 삶을 향해 뚜벅뚜벅 걷던 남자가 어느 날 가업을 이어가라는 아버지의 말에 원치 않지만 돌아서는 스토리를 많이 보았다. 그래서 누구나 아는 ‘낙점 받은’ 대물림이 아닌 경우를 검색하다가 김경진 씨의 블로그를 만났다. 포스팅된 308개의 글에는, 냉이와 쑥 차이도 잘 모르던 부산 아가씨가 잘생긴 총각을 만나 포항에서 신혼 살림을 시작한 일에서부터 농사엔 아마추어였지만 시부모님 하시던 일을 남편과 함께 십수 년째 해가고 있는 ‘또순이’ 모습까지,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그들 부부와 연락이 닿았고, 포항 도심에서 떨어져 있는 오덕마을로 가서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아쉽게도 비를 동반한 꽃샘바람이 종일 몰아치던 날, 기자의 일정에 차질이 생겨 본지 프리랜서가 녹음기를 들고 대신 찾아갔다. 나중에 이성훈 · 김경진 부부의 인터뷰 녹음 파일을 들으며, 스산한 바깥 날씨와 달리 진중하면서도 훈훈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대물림에 대한 그들의 깊은 생각이 독자들에게도 그대로 전달되길 바란다.

김경진 씨는 부산에서 호텔리어로 일하다가 휴가 때 농촌체험마을 교육장에 갔다가 6살 연상의 이성훈 씨를 운명처럼 만났다. 지금 부부는 포항의 농촌 마을에서 두 자녀와 행복하게 산다. 평소에 시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를 만큼 큰 사랑을 받았다며 인터뷰 중 울먹였다. 사진 주미순 프리랜서
김경진 씨는 부산에서 호텔리어로 일하다가 휴가 때 농촌체험마을 교육장에 갔다가 6살 연상의 이성훈 씨를 운명처럼 만났다. 지금 부부는 포항의 농촌 마을에서 두 자녀와 행복하게 산다. 평소에 시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를 만큼 큰 사랑을 받았다며 인터뷰 중 울먹였다. 사진 주미순 프리랜서

오덕마을에 들어서면 ‘오덕전통된장’ 간판이 걸린 집이 제일 먼저 보입니다. 이 일을 하기까지 각각 두 분의 사연이 궁금합니다.

남편: 저는 여기가 고향이지만 대학 졸업 후엔 대구와 구미에서 직장생활을 10년 정도 했습니다. 그때는 젊었고, 직장 아닌 다른 일도 해보고 싶어서 엉뚱하게 포장마차를 열었습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1년쯤 그 일을 재미나게 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전화를 하셨어요. 수확철이라 바쁜데 집에 와서 도울 수 있냐고요. 아버지는 제가 회사를 그만두고 쉬고 있는 줄로 아셨거든요. 그렇게 잠시 부모님을 도우러 집에 왔다가 지금까지 이곳에 살고 있습니다.(하하) 막상 집에 오니까 밀린 일들이 눈에 보여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어요. 하지만 부모님 밑에서 일하던 4년 동안 이 일이 제 업이 되리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습니다. 언젠가는 다시 직장으로 돌아갈 계획이었죠.

아내: 결혼한 지 벌써 12년이 흘렀어요. 그전에는 부산 센텀시티에 있는 호텔에서 근무를 했어요. 할머니가 사시는 경주 집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농촌체험마을 교육장을 방문하게 되었고요. 그때가 11월이었고, 거기에서 지금의 남편을 처음 만났어요. 그리고 이듬해 여름에 결혼했습니다. 농사일은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냥 남편이 좋아서 시골살이를 자청했어요. 시어머님은 이미 돌아가신 뒤라 뵌 적은 없었고요. 어설픈 새댁이 홀시아버님 식사를 챙겨드리며 두 집 살림을 하려니 벅찼어요. 남편에게 아버님 댁으로 들어가자고 해서 지금까지 여기에 살고 있습니다.

포항 기북면 오덕리에 자리해 ‘오덕’이란 이름을 붙였단다. 매실, 옥수수, 감자, 고구마, 고추 등 제철 농산물을 사러 단골들은 수시로 방문한다.  손님들 헛걸음하는 일 없도록 대문을 늘 열어둔다고. 사진제공 김경진
포항 기북면 오덕리에 자리해 ‘오덕’이란 이름을 붙였단다. 매실, 옥수수, 감자, 고구마, 고추 등 제철 농산물을 사러 단골들은 수시로 방문한다.  손님들 헛걸음하는 일 없도록 대문을 늘 열어둔다고. 사진제공 김경진

부모님은 예전부터 농사를 지으셨나요?

남편: 주로 콩 농사를 지으셨어요. 아버지는 당시 새마을 운동 지도자로 농촌 부흥을 위해 바쁘셨어요. 그 일이 점점 커지면서, 어머니가 농사를 도맡으셨어요. 체구가 작아도 정신력은 대단한 어머니는 된장 일을 사업으로 하시면서 더 강해지신 것 같았어요. 예전엔 자기 가족 먹을 된장은 집집마다 담갔잖아요. 어머니도 시집 와서 배운 전통 방식대로 40여 년간 장을 담그셨죠. 동네 농민들이 직접 생산한 국산콩을 재래식 가마솥에 장작불로 삶아 황토방에서 자연 발효시켰습니다. 항아리도 자연 유약을 발라 섭씨 1천 도 이상에서 구운 것들만 골라 쓰셨어요.

어머니가 우연한 기회에 구한 염도 측정기로 재래식 된장의 염도 21%를 약간 싱거운 18%로 낮춰 된장을 담갔는데, 장맛 좋다고 소문이 자자했대요. 콩을 2차 가공해 된장으로 만들면 부가가치가 높아져 소득 향상에도 좋겠다고 생각하신 어머니는 포항시 농업기술센터의 ‘겨울 농촌 일감 갖기 사업’에 동참했고, 1999년부터 본격적으로 된장을 상품화하셨어요. 지금 오덕전통된장의 출발점입니다.

어머님이 앞선 생각을 하셨네요. 지금까지 이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든 고비가 있으셨는지요.

남편: 농사일을 돕는 게 당연한 줄 알고 자랐지만, 성인이 되어 하려니 쉽지 않았어요. 시작하고 5년차가 될 때까지 가장 고비였죠. 정체성의 혼란이랄까요? 저는 집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고 ‘주변인’ 같이 살았어요. 두 번째 고비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였죠. 주인의식도 없이 거드는 일만 했으니, 어머니 곁에 있으면서도 된장, 고추장에 대해 배울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모든 일은 어머니가 중심이셨는데 갑자기 건강이 나빠지면서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철 모르는 막내아들은 혼자 벌판에 남겨진 듯 했습니다. 나중에 아버지는 치매를 앓으셨고요.

막상 혼자 해보려니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 거예요. 이게 맞나 틀리나도 불확실해서 고민을 무척 했죠. 10년을 그렇게 헤매니까 뭐가 좀 보이더라고요. 그때 제 마음이 가장 괴로웠어요. ‘좀 더 배워둘 걸’, ‘좀 더 열심히 볼 걸’, ‘좀 더 물어볼 걸’… 이런 후회의 격랑이 지나가자, 이제는 어떤 신체적 노동도 두렵지 않게 되었어요. 일하는 강도의 차이일 뿐, 물리적 고통이 제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니까요.

온라인 스토어에 입점하는 데 필요한 연출 컷을 아내가 직접 촬영했다. 밭에서 따왔을 줄기가 튼실한 호박꽃, 농사 지은 메주콩, 그걸로 담근 감칠맛 나는 된장은 모두 이성훈 · 김경진 부부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또 다른 자식과 같다.  사진제공 김경진
온라인 스토어에 입점하는 데 필요한 연출 컷을 아내가 직접 촬영했다. 밭에서 따왔을 줄기가 튼실한 호박꽃, 농사 지은 메주콩, 그걸로 담근 감칠맛 나는 된장은 모두 이성훈 · 김경진 부부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또 다른 자식과 같다.  사진제공 김경진

고비를 겪으면서 우리는 세상 이치를 배우네요. 오덕전통된장을 만드는 운영 방식에 어떤 장점이 있을까요?

남편: 된장은 주원료인 콩이 가장 중요합니다. 콩값이 널뛰듯 하면 해마다 된장 수급량을 맞추기 어렵죠. 콩값에 따라 된장값을 달리 받을 수도 없고요. 또 된장은 3년 기다려야 상품으로 전환이 되잖아요. 그래서 저는 콩을 직접 재배해 자급합니다. 농사를 해보니까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콩밭 면적이 5천 평이에요. 올해는 과하게 7천 평을 했는데 여기서 더 늘리면 일손이 필요하겠더라고요. 그러면 인건비 때문에 원가가 올라가겠죠. 제 인력이야, 비용으로 칠 필요가 없으니 더 욕심내지 않으려고 합니다.(하하)

아내: 남편의 농사가 이 정도만 지속되면 저희는 원료가 되는 콩값에 가공비만 조금 붙여 된장을 판매하면 됩니다. 지금 모든 물가는 점점 오르고 원료도 계속 비싸지고 있어요. 저희가 농사를 더 지을 욕심만 부리지 않으면 콩값이 올라가도 가격을 맞출 수가 있어요. 실제로 저희는 10년 넘게 판매가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게 운영의 지혜가 아닐까요?

메주콩 삶을 때 농장에서 키우는 두충나무 가지를 장작으로 쓴다. 사진제공 김경진
메주콩 삶을 때 농장에서 키우는 두충나무 가지를 장작으로 쓴다. 사진제공 김경진
가마솥 옆에 둔 된장 제품들. 사진제공 김경진
가마솥 옆에 둔 된장 제품들. 사진제공 김경진
봄비 내리는 장독대 풍경. 사진 주미순 프리랜서
봄비 내리는 장독대 풍경. 사진 주미순 프리랜서
찻집에서 인터뷰를 했다. 노경자 프리랜서가 부부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사진 주미순 프리랜서
찻집에서 인터뷰를 했다. 노경자 프리랜서가 부부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사진 주미순 프리랜서

자급자족의 합리적 운영이 돋보입니다. 그렇다면 가업의 대물림은 무엇일까요?

아내: 어머님이 된장을 만들면서 좋다고 생각하신 게 분명히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어머님은 저희한테 이렇게 이어서 해보라고 정해주신 것도 없지요. 하지만 어머님과 똑같이 할 수는 없어도 저희가 긴 세월을 해오면서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게 있어요. ‘어머님이 이런 걸 원하셨겠구나!’ 가끔씩 무언無言의 가르침을 받아요. 정신적으로 받은 것들을 바탕으로 해서 꾸준히 개선해 나가는 게 대물림이 아닐까 싶습니다.

남편: 부모님이 해오신 시간을 소중하다고 느끼면, 부모님의 그 시간을 보태어 더 많은 시간을 공유할 수 있죠. 다시 말해, 만약에 제가 어떤 일을 10년간 했는데 부모님이 앞서 30년을 먼저 하셨다면 저는 40년의 연륜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계승을 소중하게 느끼는 사람은 부모님의 시간을 받으려고 하겠죠. 한편 대물림은, 그것이 좋다는 건 알아서 남 주기는 아깝고 내가 하자니 힘들어하는 ‘계륵鷄肋’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봐요. 이건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하하) 우리가 흔히, 남 주기는 아까운데 내가 하기에는 부담스러울 때 계륵, 닭 갈비뼈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살점 없는 계륵을 잘 발라 먹으면 맛이 있어요. 살을 발라내는 요령을 알기까지가 좀 힘들긴 하지만요.

오덕전통된장의 주요 판매품은 된장과 청국장이다. 어머니가 해오신 것을 막내아들 부부가 이어간다. 사진제공 김경진
오덕전통된장의 주요 판매품은 된장과 청국장이다. 어머니가 해오신 것을 막내아들 부부가 이어간다. 사진제공 김경진
잘 빚은 메주가 청명한 햇살을 받고 있는 모습. 예쁜 메주를 마당에 널면서 맛있는 된장과 간장이 나오길 기대한다. 사진제공 김경진
잘 빚은 메주가 청명한 햇살을 받고 있는 모습. 예쁜 메주를 마당에 널면서 맛있는 된장과 간장이 나오길 기대한다. 사진제공 김경진
지금 초등학교4학년이 된 큰딸이 어릴 때 놀고 있는 모습이다. 가을걷이 때, 아이는 길에 떨어진 쥐눈이콩 줍는 일을 하는 효녀였다고. 사진제공 김경진
지금 초등학교4학년이 된 큰딸이 어릴 때 놀고 있는 모습이다. 가을걷이 때, 아이는 길에 떨어진 쥐눈이콩 줍는 일을 하는 효녀였다고. 사진제공 김경진
신록이 푸르른 이성훈 씨댁 주변 풍경이 더욱 아름답다. 사진제공 김경진
신록이 푸르른 이성훈 씨댁 주변 풍경이 더욱 아름답다. 사진제공 김경진

앞으로의 계획이나 꿈이 있으시면 알고 싶습니다.

남편: 제가 된장을 만들고 있지만 저희 것이 최고의 맛이라고 할 순 없죠. 다만, 맛없는 된장이라는 비난만 받지 않는다면, 제가 감당할 만큼 꾸준히 농사짓는 게 희망입니다. 된장을 먹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예전엔 손님들이 장 담을 콩을 사갔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메주를 사가는 분들이 많았죠. 하지만 지금은 집에서 장을 담그지 않는 것을 정상으로 아는 시대입니다. 마트용 된장이든 유기농 된장이든, 된장 먹는 사람들이 대한민국 인구처럼 확 줄어들지만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전통 식문화는 이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아내: 메르스, 코로나를 겪으면서 집으로 손님이 찾아오는 것보다 택배로 배달해주는 온라인 판매가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옛날에 어머님과 아버님은 된장 가게의 문을 365일 닫지 않으셨다고 고모님께 들었어요. 저는 휴일 없이는 유지를 못하겠더라고요. 남편은 우리 집에 사람들이 와서 제품을 보고 구입해 가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이곳에 사람들의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가득하면 즐겁겠다는 말도 하고요. 직접 찾아오시는 손님들과는 소통도 잘되고 서로 좋은 느낌을 갖게 되거든요. 그래서 판매 방식을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병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머니가 그러셨듯이, 멀리서 오시는 손님께 차 한잔 대접하는 공간을 만들고 싶습니다.

만약에 자녀가 부모님의 업을 잇고 싶다고 하면 어쩌시겠어요?

남편: 아이들의 의사가 최우선이고 제가 먼저 권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아직은 아이들이 어리지만 18살이 되면 가치관이 분명해질 테니 그때 한번 대화를 해보고 싶네요. 제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된장을 만드는 게 힘은 들지만 무척 재미있고 보람도 크단다. 그리고 된장은 재고가 없어. 시간이 오래되면 될수록 된장의 가격은 더 올라가고. 판매 조건으로 보면 최고가 아니겠니?” 이런 정도일 것 같네요. 그리고 된장 만드는 사람은 요리를 할 줄 알면 더 좋아요. 된장찌개는 기본적으로 잘 끓여야겠죠.(하하) 우리 아이가 이런 생각을 다 받아들인다면 대물림을 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된장 익는 시간이 좀 오래 걸리잖아요. 요즘 같은 속전속결 시대에 인내력 훈련이 필요할 분야 같기도 합니다.

지금 이성훈 씨는 부모님이 살아오신 오랜 터를 지키며,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콩 싹이 올라올 때면 먹이를 찾아오는 산비둘기들을 쫓아내려고 수천 평 밭을 운동장처럼 뛰어다니곤 한다. 4남매 중 막내지만, 그는 형과 누나들 대신에 부모님 모두 눈 감으실 때까지 곁에서 같이 사는 복을 누렸다. 그래서 대물림은 서열과 능력 순이 아니다. 배운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고도 몸 사리지 않고 달려드는, 사랑을 품은 자에게로 계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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