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호 에세이, 졸업

꽃다발을 안고 걸어가는 학부모들, 교문 앞에서 북적이는 상인들, 한껏 들뜬 학생들로 북적이는 운동장. 여느 졸업식 풍경입니다. 학업의 한 단계를 잘 마친다는 건 축하 받을 일이죠. 우리 삶에서도 ‘마무리’를 잘 짓는 일은 중요합니다. 삶의 크고 작은 매듭을 지어가는 여러분의 사연을 소개합니다.

계급장을 떼고

이래서 여름에 입대하면 안된다고들 말해 준 건가. 유격장을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나는 내가 처한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두 번째 유격이라니!

작년에 받았던 첫 번째 유격 훈련은 9월로, 내가 이제 막 일병 계급장을 달았을 때였다. 그때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언젠가 계산을 해보니 내년 9월이 되면 나는 부대에서 최고 선임자인 병장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지휘통제실 근무나 여타 이유를 대고 유격에서 빠질 수 있을 것이다. ‘유격을 다시는 안 받을 수 있다.’라는 결론에 이르자 나는 행복한 꿈을 꿨다. 하지만 누가 알았겠는가. 올해 유격이 9월이 아닌 6월로 당겨질지. 내가 병장 진급을 한 달 앞둔 6월이라니! 결국, 나는 유격 훈련을 한 번 더 받는 것으로 확정이 났다.

유격장에 도착해보니 환경은 작년과 다를 것이 하나 없었다. 입소식을 마치자 바로 유격 체조를 한다고 했다. 체조 장소로 향하는 계단에 올라서자마자 저 멀리서 소리 지르는 조교들이 보였다. “빨리 안 뜁니까?!” 울화통이 치밀었다. 내가 병장 진급을 코앞에 두고 이런 말을 들어야 하나. 그렇게 뛰어서 가보니 뭔가 이상했다. 바닥이 진흙 범벅이었다. 굳이 진흙에서 유격 체조를 한다고?

“유격 체조 8번 실시!” 군복이 온통 진흙으로 버무려지고 있었다. 허탈한 웃음만 나왔다. ‘제발 더는 나를 자극하지 마.’ 그런데 나보다 입대를 늦게 한 조교가 나한테 다가온다.

“23번 교육생, 똑바로 합니다!”

그날 훈련을 마치고 나서 마음이 너무 괴로웠다. 깊은 화가 치밀었다. 유격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도, 굳이 진흙에서 굴러야 하는 이 상황도, 그리고 나보다 입대도 늦게 한 조교가 나에게 명령조로 말하는 것도 모두 인정이 되지 않았다. 그 심정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서만 마음을 삭이고 있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왜 괴로워하고 있나?’

훈련 강도는 작년에 비해 훨씬 약한데도 나는 작년보다 더 괴로워하고 있었다. 내가 불평의 근거로 내세우는 이유가 정말 이것일까? 아니었다. 내가 괴로워했던 진짜 이유는, 내 마음에 여전히 붙어있는 상병 계급장 그것 때문이었다.

유격훈련장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계급장을 떼어낸다. 태극기, 부대 마크를 떼고 난 뒤에 이름과 계급장도 제거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교육생 번호를 붙인다. 그때부터 나는 임성찬도 아니고, 상병도 아니다. ‘23번 교육생’일 뿐이다. 분명히 나는 가슴팍에 붙어있던 상병 계급장을 제거했다. 그런데 마음에 있던 계급장은 제거하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상병으로서’ 임성찬이었다.

교육생의 목표는 훈련을 받는 것이다. 교관과 조교는 교육생을 훈련하고, 교육생은 교관과 조교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훈련의 목적에 비춰봤을 때 교관이 진흙탕에서 교육생을 굴리는 것은 정당하다. 조교가 교육생에게 명령하는 것도 정당하다. 그런데 상병에게는 그 모든 것이 부당하다. 상병 임성찬은 진흙탕에서 구를 수 없고, 자신보다 늦게 입대한 용사에게 명령을 들을 수 없다. 그래서 상병 임성찬에게는 그 모든 것이 괴로움이었다.

내가 중학생 때, 존경하는 선생님과 나눴던 대화가 생각이 났다. 선생님은 입대했을 때 군 생활 내내 자신을 이끌어주던 멘토의 말 한마디가 있었다고 했다. “그곳에서 계속 이등병의 마음으로 살거라.” 이등병의 마음이라니. 당시 내 군 생활을 돌아보면 나는 선생님과는 너무 다르게 살았음을 느꼈다. 나는 이등병의 마음에 머무르지 못했다. 조금 더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이등병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자리 혹은 직책이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바꾸는지 군대에 와서 여실히 느꼈다. 이등병 때는 나는 누구를 만나든 먼저 인사를 해야 했다. ‘충성’도 큰소리로 하고 어떤 행동을 할 때도 혹시 꾸중을 듣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그런데 상병이 되자 누구든 나를 보면 먼저 인사를 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딴지를 거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생활관에서 후임들이 내 눈치를 봤고, 내가 남의 눈치를 볼 일은 없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상병이 됐고 그와 동시에 나 스스로를 남들보다 높은, 대접받아야 하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 자리는 달콤했다. 사실, 상병이라는 계급장 뒤에 숨겨져 있는 나는 그만한 대접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그 모습은 보지 못했다. 항상 옳아야 하는 사람, 남들이 섬겨주어야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정말 행복할까? 그리고 지금 나는 여기서 행복한가?

땅은 말이 없다고 한다. 누가 밟으면 밟히고, 침을 뱉으면 맞을 뿐이다. 땅이 할 말이 없어서, 못나서 그런 것일까? 아니다. 땅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다. 울창한 숲을 이루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땅은 그 무엇보다 위대하다. 하지만 땅의 마음은 항상 가장 낮은 곳, 땅에 머물러 있다. 나는 잘난 것 하나 없으면서 국방부가 준 상병 계급장 하나 달고 무엇이 그렇게 불만이었을까.

유격 훈련 1일 차를 마치면서 마음에 목표가 하나 생겼다. 마음에서 상병 계급장을 떼어버리고 처음 입대했을 때의 나로, 다시 이등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훈련에 임했다. 유격 체조를 할 때도 첫째 날보다 열외 횟수가 적었고, 장애물 훈련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임했다. 한 과목을 빼고 만점을 받았으니 잘은 몰라도 부대에서 가장 높은 점수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마지막 화생방 훈련을 끝으로 유격을 다 마쳤을 때, 해방감에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씁쓸했다. 내가 원했던 목표를 이룬 것 같지 않았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내 마음의 위치가 정말 이등병처럼 낮아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유격은 끝났고 나는 다시 상병 계급장을 달았다. 교관님과 조교들도 나를 교육생이 아닌 상병으로 대하고, 같은 교육생이었던 이등병, 일병과도 다시 계급 차가 생겼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지만, 내 마음은 어찌할 것인가. 부대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이제는 아무도 내 가슴에 붙은 계급장을 떼가지는 않겠지만, 내 마음에서 계급장을 잠시 떼어내 보자고. 이등병으로 돌아가 보자고, 그 마음을 다시 배워보자고 말이다.

그렇게 6개월이 흘렀고, 2023년 12월 13일. 나는 전역 신고를 했다. 1년 반의 길면 길었던 군 생활 졸업. 이제는 다시 사회로 돌아가야 한다. 1년 반을 군대에 있다가 복귀하니, 마치 갓 20살이 되어서 처음으로 사회 진출을 했을 때의 느낌이 났다. 다시 사회 초년생이 되어서 하나씩 배워나가야 한다. 설레기도 하면서 긴장도 되는 이 기분. 그래, 이등병 계급장을 막 달았을 때의 그 기분이다. 무엇 하나 문제가 될 것 없었던 말년 병장이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 하는 사회 초년생이 된 지금. 이 마음가짐을 평생 기억하고 싶다. 꾸지람을 들어도 문제가 되지 않고, 항상 배우려고 하는 지금 이 마음을.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여도 언제나 이등병의 마음으로, 초년생의 마음으로 살고 싶다.

글|임성찬

24살, 꿈 많은 청년이다. 군 생활 중 쓴 에세이로 병영문학상 가작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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