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룬디에서 새로운 노래를 부르는 오가현

사람은 누구나 상황에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산다. 직장에 출근하면 회사 유니폼을 입고, 주어진 역할에 자신을 맞춘다. 그런 틀에서 벗어나 특별한 제약 없이 낯선 곳에서 외국인들과 교류하며 마음을 순수하게 나누는, 굿뉴스코 해외봉사 프로그램이 있다. 기간은 1년으로, 신분이나 직업, 누군가의 아들 딸로서의 역할을 모두 내려놓고 지내는 동안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게 된다. 본지의 2월 표지를 장식한 오가현도 지난 한 해 아프리카 한복판에서 자신의 청춘을 그렇게 누렸다.

오가현_올해 스무살로, 영어교육을 전공하다가 아프리카로 봉사를 왔다. 이 대륙에서도 ‘찐 아프리카(?)’에 가서 봉사의 참 맛을 느끼고 싶었던 그는 마침내 부룬디에 다다랐다. 해외봉사를 마친 후에는, 이웃 나라인 우간다로 유학을 가서 대학 생활을 할 계획이다.  사진제공 오가현

어떻게 해외봉사를 떠나게 되었나요?

저는 전부터 내가 ‘피에로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피에로는 서커스에서 우스꽝스럽게 분장하고 사람들을 재미있게 하잖아요. 그래서 ‘피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라는 노래를 자주 들었어요. “빨간 모자를 눌러 쓴 난 항상 웃음 간직한 피에로. 파란 웃음 뒤에는 아무도 모르는 눈물”, “사람들은 모두 춤추며 웃지만 나는 그런 웃음 싫어” 같은 가사가 꼭 제 이야기 같았어요.

저도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고 겉으로만 밝았거든요. 괜찮은 척, 아무 일 없는 척, 잘 지내는 척…. 주변에서 저를 보고 외향적이고 감정이 풍부하다고 이야기했는데, 사실 제 속은 공허하고 우울했어요. 그렇게 지내다 보니 나중에는 속이 답답하고 외로워지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 심리적으로 약간 고립되었던 거 같아요. 친구들과 어울리며 웃고 떠들어도 혼자서 겉도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어울리길 좋아했는데, 대학에 진학한 후로는 혼자 있는 시간이 점점 편했어요.

사진 언스플래쉬

그렇게 지낸 이유가 있었나요?

저희 어머니가 재혼한 후에 저와 동생을 낳으셨어요. 저는 중학생 때 그 사실을 알게 됐고요. 그래서인지 남들 눈에 밉보이면 안 된다!’라는 생각이 강했던 거 같아요. ‘나는 착하고 어른들 눈에 문제없이 크는 아이여야 해!’, ‘사람들에게 내 어두운 면을 보이면 안돼!’ 하며 제 삶에 대한 기준들을 세웠어요. 그리고 스스로 저를 그 속에 가두다시피 했어요. 맏딸이어서 그런지 부모님께도 항상 성실한 모습을 보여드려야 할 거 같았고요. 그렇게 지내다보니 주변 사람들이 제 성격이 밝고 긍정적이라고 칭찬했는데, 그런 제 이미지도 깨고 싶지 않았어요.

사실 저는 성격도 세고, 자기 주관도 뚜렷한 편이에요. 그런 저를 꽁꽁 숨기며 포장하고 사니까 가끔 속에 있는 게 터질 듯 감정이 격해졌어요. 그럴 때면 친구들과 언쟁이라도 벌일까 봐 그 상황을 서둘러 피했지요. 한번은 속을 터놓는 친구와 대화하다가 갑자기 목소리가 커져서 “내가 사람들하고 너한테 다 맞춰주고 살아야 하니?”, “나는 너희가 원하는 사람이 되기 힘들어!”라고 하며 울먹거렸어요. 그럴 때 친구가 당황하면 저는 아차 싶어서 ‘이러면 안되는데….’ 하며 후회하고 창피해했어요. 제가 예민해지면 주변 사람들이 제 눈치를 보는 듯했어요.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저도 지치더라고요.

맑고 순수한 아이들 속에 파묻혀 있을 때 나는 가장 행복했다.  사진제공 오가현

부룬디에서의 생활은 어땠어요?

제가 만든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일상에서 매일 비슷한 사람들과 만나니까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좀처럼 보이지 않았어요. 해외봉사는 낯선 환경으로 떠나서 생면부지 사람들과 만나게 되니, ‘그곳에 가면 내가 보다 자유로운 모습으로 더 나은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굿뉴스코 단원으로 지원했고, 어느 워크숍에서 선배 단원들에게서 ‘부룬디 사람들은 TV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정겹고 순수하다.’라고 전해 듣고, 저도 그 따뜻함을 느껴보고 싶어 부룬디를 선택했어요.

물론 아프리카에 적응하는 게 쉽지는 않았어요. 특히 부룬디는 11월부터 4월 말까지 집중 호우가 발생하는 우기이고, 나머지는 건기예요. 건기에는 전기가 아예 들어오지 않는 곳이 많아서 저희 단원들도 아예 손전등을 들고 다녀요. 인터넷도 잘 터지지 않는 곳이 많아서 지부에서 겨우 사용할 수 있어요. 이외에도 저는 처음에 아프리카 문화가 잘 맞지 않았어요. 특히 행사를 할 때 현지인들이 한두 시간씩 늦는 걸 전혀 이해하지 못했어요. 이런 부분에 스트레스를 받아 현지인을 차갑게 대하자 그곳 학생들이 제 눈치를 보며 어려워하더라고요.

그런데 안제Ange라는 친구가 저에게 끊임없이 다가와 친해지려고 노력했어요. 저는 화가 나면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는 편이에요. 안제는 부룬디 전통 간식인 만다지Mandazi 빵을 사와서 제 마음을 풀어주며 “네가 우리에게 말하지 않으면 네 마음을 알 수가 없어. 나는 너의 밝은 에너지가 좋은데, 우리에게 네 마음을 말해줬으면 좋겠어.”라고 했어요. 안제의 노력 덕분인지, 다른 친구들도 점점 저에게 다가와 제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어 했어요.

그게 너무 고마웠어요. 저는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면 사람들이 저를 나쁘게 여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렇지 않았어요. ‘이곳 사람들은 내 허물을 보고 나를 판단하지 않는구나!’라고 깨달았어요. 지금도 이곳 분들이 저를 참 좋아해 주세요. 제가 실수하는 모습도 다 품어주시고요. 저라는 사람 자체를 순수하게 반겨주세요. 그러니까 저도 이제는 ‘조금 못 하면 어때!’, ‘모르면 배우면 되지!’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옥죄던 습관에서 많이 벗어났어요. 처음에는 한마디, 한마디 실수할까 봐 눈치를 봤는데, 지금은 제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솔직한 모습으로 다가가니까 사람들이 저에게 마음을 더 열어주시는 거 같아요. 제가 가는 데마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거 같아서 기뻐요.

교육의 손길이 필요한 현지인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큰 보람을 느꼈다. 사진제공 오가현
아카데미 홍보를 다니면서 가는 길마다 동네 친구들을 잔뜩 사귀었다. 사진제공 오가현    

주로 무슨 활동을 하며 지내세요?

부룬디는 옛날에 벨기에의 식민지였어요. 그래서 불어, 영어, 스와힐리어 등 공용어가 많아요. 저희는 이곳에서 영어로 활동합니다. 공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주고 있어요. 아카데미를 열 때면 많은 아이들이 먼 곳에서부터 두 시간씩 걸어서 찾아와요. 그들과 함께 영어를 공부하고, 노래와 콩트로 발표회도 정기적으로 열고 있어요.

아카데미를 하면서 사람들을 정말 많이 사귀었어요. 현지인 집에 초대도 많이 받아서 짬짬이 놀러 다녀요. 그런 때에는 우갈리Ugali, 은디지 캉가Ndizi kaanga, 콩 등을 수북이 쌓아놓고 먹지요. 저도 이제는 이곳 음식에 맛을 들여서 백설기 맛이 나는 우갈리와 고기 맛이 나는 은디지 캉가를 참 좋아해요.

아프리카 하늘의 모습은 그야말로 예술이다. 사진제공 오가현

굿뉴스코 슬로건이 ‘내 젊음을 팔아 그들의 마음을 사고 싶다.’예요. 저도 이곳에 오기 전에 ‘내 모든 열정과 에너지를 현지인들에게 베풀고 와야지!’라고 마음먹었어요. 그런데 해외봉사를 마치게 되는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오히려 제가 이곳에서 너무 많은 걸 받았어요. 이곳 사람들 덕분에 스스로 저 자신을 가뒀던 기준들에서 자유로워졌잖아요. 또, 수도와 전기 등을 마음껏 쓸 수 있는 것이 세계 10위 안에 드는 경제대국인 한국에서 태어난 것이 큰 행운이었음을 실감했어요. 그 속에서 저를 정성껏 키워주시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셨던 부모님께 깊이 감사하고요. 아프리카는 진정 저를 치유해준 곳이에요!

물론 활동이 빡빡하게 이어져 피곤할 때도 있지요. 그럴 때는 친구들과 함께 노래를 흥얼거려요. 이곳에서 배운 부룬디 가스펠 송인데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네 나의 길을 인도하시네.’라는 가사가 이어져요. 멜로디가 한국의 발라드처럼 서정적이어서 저는 이 노래를 참 좋아해요.(웃음)

탕가니카 호수는 부룬디의 자랑이다. 이곳에는 악어는 물론 하마도 많이 산다. 친구들과 함께 호숫가로     간 날, 비교적 안전한 곳에서 수영을 즐기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사진제공 오가현
탕가니카 호수는 부룬디의 자랑이다. 이곳에는 악어는 물론 하마도 많이 산다. 친구들과 함께 호숫가로     간 날, 비교적 안전한 곳에서 수영을 즐기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사진제공 오가현

그는 활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귀국 발표회인 ‘굿뉴스코 페스티벌’에서 아프리카 댄스 팀의 일원으로 함께한다. 전국을 순회하며, 자신이 만끽했던 기쁨을 노래와 춤으로 관객들과 함께 나누고 있다. 그리고 다시 아프리카로 유학을 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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