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로장생을 꿈꾼 진시황의 불안했던 삶

중국 최초로 천하통일을 이룬 진시황. 그에게 부담스런 존재는 북쪽 척박한 땅에 살고 있는 흉노족이었다. 풍년이면 쳐들어와서 약탈을 일삼는 이들을 막아보려고 만리장성을 쌓았으나, 그는 외적의 침입만 두려워한 게 아니었다. 실용서를 제외한 사상서들을 모아 불사르고, 수백 명의 유생들을 생매장하는 ‘분서갱유焚書坑儒’까지 단행하였다. 왜 진시황은 이런 끔직한 사건을 저질렀을까?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책을 없애면 인간의 사상을 통제할 수 있고, 똑똑한 유생들을 제거하면 반역을 예방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모든 권력을 손에 쥔 진시황이 실제로 얼마나 불안한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일례라 하겠다.

자신을 지키려는 집착은 사후세계로까지 이어졌다. 1974년에 중국의 한 농부가 진시황릉에서 1km가량 떨어진 곳에서 병마용갱*(兵馬俑坑 : 중국 산시성 시안시  진시황릉에서 1km 떨어진 곳의 유적지. 그 안에는 흙을 구워 만든 수많은 병사와 말, 전차 등이 있다.)을 처음 발견했는데, 발굴 조사 결과 그 안에 흙을 구워 만든 약 8,000구의 병마용이 있었다. 아직까지도 발굴 작업이 진행인 이곳을 보면 죽어서도 병사들이 자기를 호위해주길 원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의 폭정에 시달린 백성들은 등을 돌렸고, 진시황은 정작 군주가 지녀야 할 덕목에는 관심이 없었다.

불로장생을 꿈꾸었 으나 진시황(기원전 259~210)은 끝내 실현하지 못하였다. 사진 위키피디아
불로장생을 꿈꾸었 으나 진시황(기원전 259~210)은 끝내 실현하지 못하였다. 사진 위키피디아

결국 진시황이 죽고 3년 뒤 진나라는 항우에게 허무하게 무너지고 만다. 백성이 없으면 군주도 존재할 명분이 사라진다. 군주를 지탱해주는 것이 백성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 군주가 설 자리를 잃고 만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이다.

‘군주의 거울’ 첫 번째 필독서 《키루스의 교육》

진시황과 반대로, 살아서 백성의 존경을 받으며 통치를 했고 죽어서도 그의 명성이 오래오래 기억되고 있는 왕이 있다. 페르시아 건국의 아버지 ‘키루스 대왕’(기원전 590~530)이다. 흔히 사람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카이사르 같은 인물을 서양의 위대한 지도자로 알고, 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지도자가 키루스 대왕이라는 사실은 잘 모른다.

당시 강대국이었던 메디아, 리디아, 신바빌로니아를 정복해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세 대륙에 걸쳐 28개의 군소 국가들을 거느린 대 제국을 건설한 키루스 대왕은 다른 방식으로 식민지를 통치했다. 정복한 나라의 백성들을 노예로 삼지 않고 관용의 정책을 베푼 것이다. 그래서 식민지 백성들은 그에게 정복 당한 후 오히려 삶이 나아졌다며, 평화를 가져다 준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존경을 표시했다고 한다.

키루스 대왕의 리더십을 책에 기록한 인물이 크세노폰이라는 그리스 사상가이다. 플라톤과 함께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크세노폰은 전쟁에 참가했다가 페르시아 왕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조국 아테네에서 찾아볼 수 없던 리더십을 키루스 대왕에게서 발견한 그는 큰 감동을 받아 8권으로 일대기를 저술한다. 그 책이 《키루스의 교육》으로, 서양 최초의 리더십 교본이다.

중세 유럽에서는 장차 군주가 될 왕자가 선대의 훌륭한 리더들에 대해 공부하게 했고, 이를 위해 인문학 독서 장르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군주의 거울Mirror for Princes’이다. 왕자가 본받아야 할 인물들을 통해 자신을 비춰 보는 거울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군주의 거울’ 첫 번째 필독서가 바로 《키루스의 교육》이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이상적인 군주로 제시한 4명의 인물이 모세, 테세우스, 로물루스, 키루스이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인물이고, 테세우스는 아테네를 건국한 그리스 신화 속 영웅이며, 로물루스는 로마 건국의 아버지이다. 여기에 키루스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음은 《군주론》 책이 나온 16세기까지 그의 영향력이 막강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키루스, 이란의 조상으로 존경도 받고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은 키루스 대왕이 《구약성경》 속에 무려 19차례나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키루스 대왕은 신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후 당시 수도 바빌론에서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을 해방시켜주었다. 《구약성경》 중 ‘에스라’, ‘느헤미야’, ‘이사야’, ‘다니엘’ 예언서에는 키루스 대왕을 ‘고레스’라고 표현하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고레스에게 이르기를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서 너로 너를 지명하여 부른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 알게 하리라. …중략…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이사야 45:1~4)

위대한 왕으로 존경과 칭송을 받아온 페르시아 건국의 아버지, 키루스 대왕(기원전 590~530). 사진 위키피디아 
위대한 왕으로 존경과 칭송을 받아온 페르시아 건국의 아버지, 키루스 대왕(기원전 590~530). 사진 위키피디아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에스라 1:1~3)

“내가 의로 그를 일으킨지라. 그의 모든 길을 곧게 하리니 그가 나의 성읍을 건축할 것이며 나의 사로잡힌 자들을 값이나 갚음 없이 놓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사야 45:13)

여기에서 ‘바사’는 키루스 대왕이 세운 페르시아로, 현재의 이란에 해당한다. 《구약성경》에 언급된 내용들을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일부만 보더라도 키루스 대왕이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받았는지 알 수 있다. 지금도 이란 사람들은 키루스 대왕의 후손이라는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을 느낀다고 한다.

바빌로니아에 잡혀 있던 유대인을 해방하는 키루스 대왕. 장 푸케가 1470년 경 책에 그린 삽화. 사진 위키피디아
바빌로니아에 잡혀 있던 유대인을 해방하는 키루스 대왕. 장 푸케가 1470년 경 책에 그린 삽화. 사진 위키피디아

‘키루스 실린더’에서 발견된 관용적인 통치 이념

크세노폰이 쓴 《키루스의 교육》과 《구약성경》 여러 곳에서 기록된 키루스 대왕의 업적에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1879년 대영박물관이 후원한 탐험대가 이라크의 바벨론 신전 발굴 당시 ‘키루스 실린더(원통)’가 발견되면서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여러 책에 나온 그에 대한 기록들과 똑같은 내용이 2500년 전 유물에 쐐기문자로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신전 벽에서 나온 럭비공 크기의 진흙 원통 ‘키루스 실린더’에는 기원전 538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의 해방을 역사적으로 증명해줄 키루스 대왕의 업적이 조서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쐐기문자로 진흙에 새긴 내용은 이렇다.

“나 키루스는 세계의 왕이자 전지전능한 왕이며 바벨론 수메로 아카드의 왕이다. 짐은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주지 않는 제도와 그들에게 사회적인 신분을 보장해 주지 않는 제도를 없애겠다. 짐은 살아 있는 한, 짐이 정복한 나라의 전통과 종교를 존중할 것이다. 짐은 빚 때문에 남자나 여자가 종이 되는 것을 반대한다.”

그의 통치 이념은 종교적 관용과 종족 융합이었다. 대부분 정복 당한 나라의 제도나 전통, 종교는 모두 말살되는데 키루스 대왕은 정복한 나라의 전통과 종교를 존중했다. 그는 바빌론에서 혹독한 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낼 때 그동안 밀린 월급을 다 받게 했고, 귀환 길의 안전도 보장해 주었다. 또한 유대인들이 염원한 예루살렘 성전을 중건하도록 허락했다. 고대 역사에서 이런 포용성을 가진 지도자는 없었다. 그는 이런 지도자의 덕목을 타고난 것일까? 배운 것일까? 크세노폰의 기록에 의하면, 부모님으로부터 배웠다고 한다.

1879년 이라크에서 발견된 ‘키루스 실린더’는 기원전 538년에 유대인들이 해방된 사실을 역사적으로 증명해주는 유물이다. 진흙 위에 쐐기문자로 키루스 대왕의 업적과 통치 이념이 새겨져 있다. 사진 www.worldhistory.org
1879년 이라크에서 발견된 ‘키루스 실린더’는 기원전 538년에 유대인들이 해방된 사실을 역사적으로 증명해주는 유물이다. 진흙 위에 쐐기문자로 키루스 대왕의 업적과 통치 이념이 새겨져 있다. 사진 www.worldhistory.org

부모로부터 배운 위대한 지도자의 덕목

키루스는 아버지 캄비세스에게 지혜를, 메디아의 공주였던 어머니에게는 권리의 평등을 배웠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백성이 없다면 군주도 존재하지 않음을 강조했고 백성의 자발적 복종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상명하복이 군주를 치명적인 위험에 빠뜨릴 수 있음을 강조했다.

자발적인 복종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아야 하는데 그것은 권력을 휘둘러서 가능한 게 아니다. 피지배자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오히려 그들을 섬기고 그들의 종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 그래야 상관에 대한 무한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지위가 높은 자가 명령하고 낮은 자가 복종하는 방식은 타의적인 복종에 속한다.

참된 군주는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추구한다. 또 지혜로운 사람이 있으면 찾아가 배우는 데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나는 최고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배울 필요가 없다는 사람은 군주의 사명을 잃은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 캄비세스는 “네 휘하의 군사들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함께 기뻐하고 나쁜 일이 생기면 함께 슬퍼해라. 그들이 고통받고 있으면 도우려고 하고 그들에게 안 좋은 일이 닥치지 않을지 항상 염려하고 실제로 닥치지 않게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군사들과 동행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부하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다.”라고 가르쳤다.

업적과 명성에 비해 키루스 대왕의 무덤은 작고 소박하다.사진 위키피디아
업적과 명성에 비해 키루스 대왕의 무덤은 작고 소박하다.사진 위키피디아

지혜로운 왕에게 바치는 백성의 선물, 자발적인 복종

자발적인 복종은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군주에게 바치는 백성의 선물이다. 크세노폰은 백성들이 키루스 대왕을 어떻게 추앙하는지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은 키루스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했다. 어떤 이들은 키루스가 있는 곳에서 며칠이 걸리는 거리에서, 다른 이들은 몇 달씩이나 걸리는 거리에 떨어져 살았다. 그들은 키루스를 본 적도 없으며 그들 중 일부는 앞으로도 보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키루스의 백성이 되기를 기꺼이 원했다.”

백성들은 만나본 적도 없는 왕을 존경하고 그의 백성인 것을 자랑스레 여겼다. 키루스 대왕은 일반 사병과 귀족을 구분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에게 배운 평등을 그대로 행동에 나타낸 것이다. 그는 성공에 대한 보상을 똑같이 나누었고, 군주인 자신도 사병들과 같이 훈련하며 같은 식사를 했다. 그것으로 사병들의 신뢰를 얻었고 사기를 높였다. 백성들에게 선을 베푸는 것을 행복해하는 왕에게 군사들은 무한 존경과 충성을 보냈다. 이것이 자발적인 복종이다.

인재등용의 세 가지 기준 신앙심, 자제력, 노력하는 사람

전쟁이 끝나고 그가 승리의 왕관을 쓰던 날, “제국을 얻는 것은 위대한 일이지만 얻은 후에 그것을 지키는 것은 더욱 위대한 일이다.”라는 명언을 한다. 키루스 대왕은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 필요한 사람을 잘 발탁하는 것이라며 제국의 지속성은 거기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자격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 국사를 맡긴다면 제국은 망할 것이라고 말했다.

키루스의 인재등용 첫 번째 기준은 신앙심을 가진 사람이어야 했다. 어떤 종교든지 깊은 신앙심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절제하는 힘이 강하고 도덕적 기준이 높다고 본 것이다. 두 번째 기준은 자제력이 강한 사람이었다. 만일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이 높은 자리에서 방탕하고 탐닉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아랫사람들이 그것을 따라하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자제력이 강한 사람을 중요하게 평가했다. 마지막 기준은, 노력하는 사람을 찾았다.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할 뿐 아니라 탁월함을 지속하기 위해 자신의 노력과 시간을 계속 쏟아붓는 사람은 어디서든 빛을 발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키루스 본인의 삶이기도 했다. 그는 땀을 흘리지 않으면 식사하지 않았으며, 말도 열심히 훈련 받지 않으면 먹이를 주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모범의 삶을 살았다. 그래서 수많은 역사 속의 리더들이 닮고 싶어한 ‘거울 속 인물’이었다. 불사신이 되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먼지처럼 끝나버린 진시황과는 무척 대조적인 모습이다.

훗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를 점령했을 때 키루스 대왕의 무덤이 너무 소박해서 놀랐지만, 묘비명의 글을 보고 아무도 훼손하지 말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이보게, 자네가 누구든 그리고 자네가 어디서 왔든, 나는 자네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네. 나는 페르시아인의 제국을 건국한 키루스라네. 나의 뼈를 감싸고 있는 이 한 줌의 흙을 비웃지 말게나.”

사람의 본능은 권력이 주어지면 겸손하기가 힘들다. 자연스럽게 마음의 높이가 외형적인 지위보다 더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기의 판단력이 흐려지면서 자신의 실수에는 관대해진다. 반면에 남의 실수나 잘못에 대해서는 까다롭고 날카로워진다. 그렇기에 키루스 대왕의 한결 같은 삶은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 여전히 귀감이 되고 있다.

글쓴이 윤미화

경남 남해 종가집에서 5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경영대학원에서 마케팅MBA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의령에서 30년 째 살면서 신문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알아두면 유익한 1일 1지식 한달 교양수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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