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를 보니 밤 11시다. 씻고 아이패드로 책을 좀 읽을까 하다가, 지척에 바다가 있어선지 자꾸만 나가고 싶다. 부산 바다는 놀기에 좋고, 서해 바다는 체험하기에 좋고, 이곳 동해 바다는 화폭에 담기 알맞은 풍경이 많아서 좋다. 그러나, 오늘은 바다 풍경을 보고 싶은 게 아니라, 심란하고 답답해서 바닷길을 걷지 않고는 이대로 지날 수 없어서 자꾸 마음이 바다로 향한다. 결국 나는 외투를 걸쳐 입고 바다로 나선다.

내 가슴의 빗장을 풀고 싶다. 많은 것들이 쌓여 있다. 소소한 일상에서 받은 스트레스들, 갑작스럽게 닥친 일들을 수습하면서 생긴 상처들, 이런 것들이 뒤섞여 내 마음을 내리누르고 있는 어둠. 내일 하루를 나는 이렇게 시작하기 싫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없어지는 것들도 있겠지만, 그러는 동안 나는 밝고 맑은 눈을 가질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나면 어두웠던 마음에서 내가 했던 말과 행동들에 후회할 것이다. 지금 당장 이것들을 쏟아부어야 할 곳이 필요하다. 그러기엔 모래에 반사된 햇살이 눈부신 낮보다는, 조용히 그러나 늦지 않게 내 소리가 스며들 수 있는 밤바다가 좋다.

‘드르르럭’ 나는 가슴에서 빗장을 빼내고 해변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를 걸었다. 떠미는 바람을 등에 업고 쏴 소리를 내며 해변으로 달려오던 파도와, 먼저 해변에 닿았다가 다시 바다로 돌아가던 파도가 땅과 물이 닿는 지점에서 만나 서로 부딪치며 하얀 포말을 일으킨다. 바다로 돌아가던 파도가 해변으로 달려오는 파도를 붙잡아 놓고 말하는 것 같았다. “거기엔 우리가 찾던 것이 없어.” 그 말을 들었는지 성난 듯했던 파도는 갑자기 속도를 늦추고 높이를 낮춘다.

빗장을 푸니 마음에 있던 것들이 하나씩 나온다. 내 마음을 많이 힘들게 했다면, 뭔가 묵직한 게 나와야 핑곗거리라도 되는데, 내가 찾던 것은 나오지 않고 대신에 질문만 쏟아져 나온다. ‘금도끼 은도끼’ 동화처럼 누군가가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을 하나씩 집어 들면서 내 것인지를 물어본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그토록 힘들어하냐고 묻는다.

“아니, 제가 꼭 그것 때문은 아니고요, 다른 것도 있을 텐데요.”라고 대꾸해 보지만, 아까 파도가 말했던 것처럼 내가 찾아내려는 것은 나오지 않고 뭔가를 기대하고 있던 나를 부끄럽게 했다. 수치를 느낄 때의 그런 부끄러움이 아니라 안도할 때 느끼는 부끄러움과 같아서 나도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졌다. 별것도 아닌 것으로 혼자 심각해 하며 마음을 닫고 어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마음을 묵직하게 누르고 있었던 것은 ‘어려웠던 일’이 아니라, ‘어려웠던 일’을 바라보며 생긴 ‘생각’이었고, 가끔 그 ‘생각’은 엄청난 무게가 되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다.

끝났다. 나에게 찰싹 달라붙어 질척거리던 어둠이 빠져나갔다. 이 녀석은 소리도 없이 슬쩍 들어오더니 나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밤공기가 차다는 것을 그제야 느끼며 40분만에 발걸음을 돌린다. 올 때에는 무섭게 보이던 검푸른 바다가 지금은 화선지에 그린 수묵화처럼 신비하게 보인다. ‘어려웠던 일’은 골짜기를 메운 구름처럼 언뜻 우리를 공포스럽게 할 수 있겠지만, 천천히 걸어 들어가서 주변을 둘러보면 아름다운 산수山水가 보인다. 구름을 걷어내려고 애쓸 필요 없이 한 걸음씩 내딛기만 하면 된다. 마음을 활짝 여니 가슴이 시원하고, 불청객이 물러가니 마음이 편안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고맙고 감사하게 보인다. 참 좋다. 그놈들이 나중에 또 온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한마디 던진다. “야, 박문택, 너 겁먹을 것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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