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긴 분쟁의 역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2회

오늘날 ‘중동의 화약고’라 불리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첨예한 대립과 싸움이 멈출 줄 모르고 있다. 이들이 왜 서로를 존중하며 평화롭게 살 수 없는지 근본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 지난 번 기사에서는 4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유대인의 역사를 조망해보았다. 이번엔 후속편으로, 1900년간 유랑 생활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형성된 ‘시오니즘’이 무엇이며 중동전쟁 이후 계속된 갈등 상황에 대하여 알아본다.

같은 벽에 나란히 그려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국기(파란색). 하마스가 주축이 된 가자지구와 이스라엘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사진 프리픽
같은 벽에 나란히 그려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국기(파란색). 하마스가 주축이 된 가자지구와 이스라엘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사진 프리픽

옛 조상의 땅, 팔레스타인에 나라를 세우자는 시오니즘 운동

평화와 사랑의 보금자리가 되어야 할 거룩한 땅 ‘예루살렘’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수많은 분쟁과 전쟁의 단초를 제공해왔다. 유대인들은 조상의 땅이자 약속의 땅인 팔레스타인 지역에 그들만의 국가를 세우려고 했다. 그러한 운동을 ‘시오니즘 Zionism’이라고 부른다. 시오니즘의 ‘시온’은 예루살렘 남서쪽에 있는 해발 765미터의 산으로 유대인들에게는 정신적인 고향이자 종교의 중심지이다.

19세기 말 시오니즘 운동에 박차를 가한 인물은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 테오도르 헤르츨(1860~1904)이었다. 신문기자였던 그는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드레퓌스 사건’을 프랑스에서 목격한다. 프랑스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는 독일에 군사정보를 팔아넘겼다는 혐의를 받았고, 재판 과정에서 드레퓌스의 필체가 범인의 것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힌다. 나중에 무죄가 입증되었음에도 재판관들은 드레퓌스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반유대주의’로 가득한 세상을 경험한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의 정치적 결사체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드레퓌스 사건을 기점으로 시오니즘 운동이 본격화되어, 테오도르 헤르츨은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제 1차 시오니스트 대회를 개최했다.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하는 헤르츨은 이때 ‘바젤 강령’을 채택한다. 그 요지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 국가를 건설하자는 것이었는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팔레스타인은 빈 땅이 아니라, 아랍인들이 수십 대에 걸쳐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던 삶의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는 군사정보를 팔아넘겼다는 혐의를 받았고 훗날 무죄가 입증되었음에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무기징역을 받았다. 사진 위키피디아
드레퓌스 사건을 기점으로, 시오니즘 운동을 본격화시킨 테오도르 헤르츨. 그는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제1차 시오니스트 대회를 주재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오스만 제국을 탐낸 영국의 잘못된 이중계약

시오니즘의 바람이 불면서 1900년 초반까지 해외에 흩어져 살던 1만여 명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정착했다. 그들은 처음부터 나라를 세운 건 아니었고, 그 지역의 토지를 구입하여 아랍인들과 평화로운 공존으로 삶을 시작했다. 유대인들의 정착 배후에는 유대인 출신 자본가들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금융업으로 막대한 자본을 축적한 이들은 정착민에 대해 재정 지원을 계속해 주었고, 그 대표적 인물이 로스차일드 가문이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영국은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싸워야 했다. 영국은 승리를 얻기 위해 무리수를 둔다. 아랍과 이스라엘에 지키지도 못할 이중계약을 한 것이다. 1915년, 영국의 외교관 헨리 맥마흔은 아랍 지도자 후세인과 만나, 전쟁에 승리하면 팔레스타인 지역에 아랍인들의 독립국이 세워지도록 돕겠다는 협정을 체결한다. 이것이 바로 ‘맥마흔-후세인 협정’이다. 영국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은 아랍인들은 열심히 싸웠고, 이로 인하여 오스만 제국은 심한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같은 시기, 영국은 유대인을 대표하는 월터 로스차일드에게 편지를 보낸다. 재정적 지원을 해준다면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두고 당시 영국의 외무장관 밸푸어Balfour의 이름을 따서 ‘밸푸어 선언’이라 한다. 이처럼 영국의 잘못된 이중계약로 인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지금까지 갈등과 분쟁의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한편, 막강한 힘으로 중동을 다스리고 있던 오스만 제국이 패망하자, 팔레스타인 지역을 영국이 장악한다. 얼마 후 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었고 유대인들은 ‘밸푸어 선언’에 힘입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를 시작하였다. 아랍인들이 영국과 맺은 ‘맥마흔-후세인 협정’은 휴지 조각처럼 버려진 것이다.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오는 유대인을 보자 그곳의 아랍인들이 점점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치 독일의 박해가 심해질수록 유대인들은 더욱 더 팔레스타인 땅을 향해 몰려왔다.

1948년 5월 14일, 초대 총리 벤구리온은 아랍의 불만을 묵살하고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했다. 사진 wol.jw.or

히틀러의 홀로코스트는 유대인 동정 여론을 만들고

그러던 중 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히틀러는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라는 이름으로 이전보다 더 잔혹하고 무자비하게 유대인 학살을 감행했다. 2차 세계대전 시기인 1941년에서 1945년까지, 유럽에 있던 900만 명의 유대인 중에 약 600만 명이 처참하게 학살되었다. 홀로코스트의 참상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유대인에 대한 동정 여론이 확산되었고,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가 들어서는 것을 동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팔레스타인에 아랍인이 살고 있었기에 무작정 유대인들이 들어가 나라를 세울 수도 없는 일이었다.

유대인들과 현지 아랍인들과의 갈등이 점차 커지자 영국은 이 문제를 UN에 상정하였다. UN은 1947년 팔레스타인 지역을 유대인 국가와 아랍 국가로 분리하되, 예루살렘은 국제공동 통치구역으로 두는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통과시켰다. 그런데 80만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전체 토지의 44%가 주어진 반면, 50만 명의 유대인들에게 56%의 토지가 주어진 것이 문제였다. 당연히 팔레스타인들은 UN 결의안에 반대했다.

결국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이 아랍 진영의 불만을 묵살하고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벤구리온은 이스라엘이 로마에 멸망한 지 1900년 만에 다시 건국한 것에 대해 “이스라엘에선 아무리 현실주의자라도 이 기적을 믿을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한 다음 날, 아랍은 전쟁을 선포하고

이스라엘 건국을 발표한 다음 날, 레바논과 시리아, 요르단과 이집트가 이스라엘에 전쟁을 선포한다. 그것이 1차 중동전쟁이 발발이다. 하지만 아랍 연합군 대부분은 목숨을 걸고 싸울 의지가 없었기에, 이스라엘은 전세를 역전시켜 승리할 수 있었다. 1차 중동전쟁에서 이긴 이스라엘은 훨씬 넓은 78%의 땅을 차지했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난민으로 전락했다. 이 사건을 두고 아랍인들은 ‘알 나크바’(대재앙)라고 부른다. 고향을 떠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가자지구와 서안지구로 몰려들어 비참하게 살아가야 했고, 이웃나라들로 흩어진 난민들의 상황도 암담하긴 마찬가지였다. 난민들은 빈곤에 시달리고 고용, 주거, 교육, 일자리, 귀국 등 여러 면에서 홀대를 받았다.

오늘날 500만 명이 훨씬 넘는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가 국제적 이슈지만, 아직 해결의 기미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 와중에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 간의 갈등과 마찰은 계속되어 4차 중동전쟁으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모든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요르단이 지배하던 서안지구와 이집트가 지배하고 있던 가자지구를 확보함으로써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지배권을 공고히 했다.

이스라엘이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미국의 도움이 컸다. 정확히 말하면 미국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외교 문제에 있어서도 항상 이스라엘 편을 들어줬기 때문이다. 미국의 유대인들은 전체 인구의 2.5%에 불과하지만 그들은 정치, 경제, 언론 등 모든 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에이팩AIPAC’ 등의 단체를 만들어 로비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스라엘 라빈총리(오른쪽)와PLO 대표 아라파트는 오슬로 평화협정에 조인한 공로로 1994년에 노벨 평화상을공동 수상했다.사진 노벨평화상 페이스북
이스라엘 라빈총리(오른쪽)와PLO 대표 아라파트는 오슬로 평화협정에 조인한 공로로 1994년에 노벨 평화상을공동 수상했다.사진 노벨평화상 페이스북

팔레스타인해방기구 PLO와 하마스

그렇다고 팔레스타인이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불평등한 상황에 불만을 품은 투쟁 단체가 하나둘 생겨났다. 그 대표적 단체가 팔레스타인해방기구 ‘PLO’이다. 1964년 결성된 PLO는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의 건설을 최고 목표로 하는 비밀저항조직이다. 하지만 비교적 온건한 PLO의 요구들은 서방국가들에게 묵살되기 일쑤였다.

그런데 PLO보다 훨씬 과격한 단체 ‘하마스’가 등장하면서 분위기는 급반전된다. 이스라엘에 대한 비난의 여론을 만들어 확산시키려고 하마스는 자살 폭탄 테러를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이들의 과격한 행동이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다.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테러 발생을 막기 위해, PLO는 하마스에게 팔레스타인에서의 지배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둘이 연합해 전략을 세운다. 1993년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서 이스라엘 라빈 총리와 PLO 대표 아라파트가 만나 오슬로 평화협정에 조인한 것이다. 이 일로 두 지도자는 1994년에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한다.

이스라엘 정부는 유혈 사태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 8미터가 넘는 콘크리트 장벽을 세우고 검문소를 설치했다. 장벽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을 너무나 불편하게 만들었다. 사진 언스플래쉬
이스라엘 정부는 유혈 사태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 8미터가 넘는 콘크리트 장벽을 세우고 검문소를 설치했다. 장벽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을 너무나 불편하게 만들었다. 사진 언스플래쉬

서방 국가와 아랍권 사이에 번지고 있는 신냉전 기류

하지만 노벨상 수상 이듬해인 1995년 라빈 총리는 극우파 청년에게 암살되고, 아라파트 역시 팔레스타인에서 배신자 취급을 받게 되었다. 사실 오슬로 평화협정의 이행에는 많은 장애물이 존재했다. 그중 가장 큰 장애물이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있는 ‘하마스’이다.

이스라엘 정부가 하마스의 테러 행위로 인한 유혈 사태를 방지할 명목으로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 8미터가 넘는 콘크리트 장벽을 세우고 검문소를 설치했다. 이 장벽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불편하게 만들었다. 검문소를 통과할 때마다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학교와 직장을 다니는 게 어려워졌고, 이는 경제적 빈곤으로 이어졌다. 물과 전기가 부족한 건 물론이고 생필품을 구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이집트도 보안을 이유로 국경을 폐쇄한 상태여서 가자지구는 거대한 감옥이 되고 말았다. 가자지구 남쪽에만 이집트로 통하는 비밀 터널이 무려 2,000개나 있다고 하는데, 이 터널을 통해 힘겹게 생필품을 구해오는 실정이다. 특히 가자지구의 불만은 극에 달해서, 팔레스타인 사람 3명 중 1명은 이스라엘과 싸우다 죽는 순교자가 되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하마스는 지지자들의 힘을 얻어 테러 행위를 강화하고, 이에 이스라엘은 더 강경한 조치를 취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가자지구 빈민층의 지지를 기반으로 삼고 있는 하마스는 주민들의 희생을 부추기면서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당연히 팔레스타인 주민들이다. 이렇게 양측은 지금까지 출구 없는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향후 어떤 평화 협정이 이뤄지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모두의 동의와 공감대를 얻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될 때까지 양측의 갈등은 끊이지 않을 전망이다. 이번 전쟁으로 중동뿐만 아니라 세계 안보 지형은 크게 요동칠 위기에 있다. 전 세계 여론이 분열되는 양상을 보이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국들과 중국, 러시아, 아랍권 국가들 사이에 신냉전 기류도 가속화되고 있다. 암담한 현실의 끝은 보이지 않지만, 전쟁이 그친 평화의 날이 꼭 도래하기를 새해를 맞으며 기원해본다.

글쓴이 이한규

어릴 때 선생님을 통해 교사의 꿈을 갖게 된 그는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선생님이 되었다. 교사의 길을 걸어온 자신을 일컬어 ‘마음 밭에 농사를 짓는 농사꾼’이라고 한다. 국어 교사와 여러 대안학교 교장을 역임했고, 전국대안학교총연합회 서울시 지부장을 맡았다. 현재 여러 매체에 인문학과 교육철학에 관한 글을 계속 기고하고 있다. 국내외 여러 교육기관에서 특강을 하고, 교육 관계자 및 학부모, 학생들과 상담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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