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지 해외봉사 단원, 박은채

한국의 겨울이 맹추위를 드러내던 어느 날, 따뜻한 여름 나라 피지에서 보내온 사진 한 장과 편지가 기자에게 도착했다. 새파란 하늘과 바다 그리고 먹음직한 열대과일을 두 손 모아 든 한국 대학생들의 사진이었다. 피지 전통 의상 ‘술루Sulu’의 선명한 색깔만큼이나 기자의 눈에 또렷하게 들어온 것은 이들의 눈부신 미소. ‘세계에서 2024년 첫날을 가장 먼저 맞이한 나라(날짜 변경선이 피지 주변에 인접해 있어서 세계에서 가장 먼저 해돋이를 볼 수 있다) 피지에서 새해 인사드립니다.’로 시작한 편지에는 1년 간 봉사활동하면서 경험한 보석 같은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박은채 군을 화상으로 만나 피지에서의 봉사와 ‘행복’ 그리고 ‘함께’의 의미를 물었다.

표지 모델 박은채대학에서 물리치료를 공부하고 있다. 1월호 표지에는 피지에서 같이 봉사하고 있는 김가원, 정가영 학생도 함께 촬영했다. 피지에 와서 새롭게 만난 친구들과 추억을 나누고 행복을 공유하고 있다. 사진제공 박은채
표지 모델 박은채대학에서 물리치료를 공부하고 있다. 1월호 표지에는 피지에서 같이 봉사하고 있는 김가원, 정가영 학생도 함께 촬영했다. 피지에 와서 새롭게 만난 친구들과 추억을 나누고 행복을 공유하고 있다. 사진제공 박은채

보내준 편지에서 ‘지금 피지는 행복한 웃음꽃이 핍니다’, ‘행복은 함께할 때 두 배가 됩니다’라는 글이 인상적이었어요. 간단한 자기소개부터 해주실래요?

‘Bula!(안녕하세요)’ 올해 21살의 대학생 박은채입니다. 이름만 보고 저를 여자로 짐작하시는 분들이 많은데(하하) 아버지께서 ‘은혜의 빛깔’이라는 뜻을 담아 지어 주신 이름이에요. 잡지 투머로우의 2024년 첫 표지인물로 인터뷰할 수 있게 되어 큰 영광입니다.

사진 속 열대과일을 마치 선물로 건네주는 것 같았어요. 1년 간 경험한 피지의 ‘맛’은 어땠나요?

지상낙원에는 꼭 맛있는 과일들이 있죠. 더운 날 코코넛 물 한 모금에 제 세포 구석구석까지 적셔지는 기분이 들어요. 코코넛이 없다면 피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하하) 흰 열매 속은 마트에 파는 코코넛 음료에 든 젤리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맛있어요. 해산물도 풍부해요. 저희 지부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바다가 있는데 거기 해변에서 조개랑 게를 잔뜩 잡아 자주 요리해 먹곤 했어요. 또 이곳이 놀라운 건, 작은 섬나라여도 굉장히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해요. 특히 인도 출신 이민자들(피지 인구의 40%)이 많아서 카레와 같은 인도 음식을 쉽게 먹을 수 있어요. 피지 전통 조리법으로 만든 ‘로보lovo’ 요리도 잊을 수 없는 맛이고요. 땅을 1.5~2m 정도 깊이로 파서 그 안에 불을 지핀 다음, 바나나 잎이나 코코넛 잎으로 싼 먹을거리를 넣고 흙으로 덮으면 열기로 음식이 익어요. 정말 맛있어요.(하하)

이곳의 맛은 눈으로 더 잘 느낄 수 있어요. 하늘이 가까운 피지의 무지개는 정말 크고 아름다워요. 길을 가다가 야자수 나무 사이로 보이는 에메랄드빛 바다는 어느 순간 넋을 놓고 사진을 찍게 하죠. 해외 유명인들의 허니문 장소나 휴양지로, 또 ‘캐스트 어웨이’와 같은 할리우드 영화와 여러 광고의 촬영지로도 자주 등장하는 곳이에요. 평소에 무감각하게 보던 하늘과 바다와 숲이 얼마나 선명한 색을 띠고 있는지, 얼마나 생기 넘치게 아름다울 수 있는지 매번 느껴요.

피지의 자연은 어디를 가든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건 직접 와서 봐야 한다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란다. 사진제공 박은채
피지의 자연은 어디를 가든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건 직접 와서 봐야 한다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란다. 사진제공 박은채

 

한글학교 수업 풍경. 이곳 역시 한류열풍이 강한 나라여서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많다. 사진제공 박은채
한글학교 수업 풍경. 이곳 역시 한류열풍이 강한 나라여서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많다. 사진제공 박은채

피지의 ‘멋’은 어때요? 매력적인 문화가 있다면요?

피지의 ‘멋’은 피지 사람들에게 있죠. 이곳 사람들은 정말 친절해요.(‘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피지의 인사말은 ‘Bula’인데요. 상대방의 ‘안녕’과 ‘생명’을 기원하는 의미예요. 어느 곳에 가든지 환한 미소로 ‘Bula’라는 인사를, 혹 더운 날에는 자기 집에 들어와서 물 한 잔 마시며 쉬고 가라는 말을 건네주세요. 한국의 옛날도 이런 정이 넘치는 풍경이 많았다고 들었어요. 피지는 아직까지 낯선 사람을 가족처럼 환대하는 따뜻한 정서가 보존되고 있는 곳이에요. 이들에게 가족은 굉장히 중요해요. 가족, 친척, 이웃끼리의 유대감이나 연대감이 높아서 서로를 무척 소중히 여겨요. 그런데 낯선 외국인도 가족처럼 맞으니 그 국민성을 알만 하죠.(하하) 피지의 항상 따뜻한 바다와 풍부한 자연이 ‘관계’를 중요시하는 친절한 사람들을 만든 건 아닐까 해요.

피지에 관광이나 휴양 오는 사람은 많아요. 그런데 방문 목적으로 ‘봉사’를 선택했어요.

이곳이 열대휴양지 이미지가 강하다 보니까 봉사를 한다고 하면 놀라는 사람들이 많아요. 저 역시 그랬으니까요. 제 친형의 영향이 컸어요. 2년 전에 푸에르토리코에 1년간 봉사를 갔다 온 형은 너무 좋았다며 저에게 똑같은 프로그램을 추천해 줬어요. 원래 자기는 피지를 가려고 했었다며 네가 한번 다녀오라고 하더라고요.(하하) 학과 공부며 군대 문제가 마음에 걸렸지만 정말 말이 없던 형이 봉사를 다녀와서 말수가 부쩍 많아지고 엄청 활발해진 것을 보고 궁금했어요. 봉사와 형의 변화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언어와 새로운 문화에 대한 욕심도 있고 무료한 삶이 싫었던 것도 있어서 과감하게 피지로 날아갔죠.

소속된 피지지부의 공식 인스타그램에 케이팝 댄스 영상을 자주 업로드한다. 반응을 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이다. 사진제공 박은채
소속된 피지지부의 공식 인스타그램에 케이팝 댄스 영상을 자주 업로드한다. 반응을 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이다. 사진제공 박은채
피지국립대학교의 개강식 행사에서 태권도복을 입고 한국을 알리기 위한 홍보활동을 했다. 참석한 현지 학생들과 함께. 사진제공 박은채
피지국립대학교의 개강식 행사에서 태권도복을 입고 한국을 알리기 위한 홍보활동을 했다. 참석한 현지 학생들과 함께. 사진제공 박은채
피지 전통 요리법 ‘로보lovo’ 로 만든 치킨. 사진제공 박은채
피지 전통 요리법 ‘로보lovo’ 로 만든 치킨. 사진제공 박은채

봉사의 내용은 어땠나요?

1년을 살아보니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었어요. 기쁘고, 슬프고, 아픈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요. 또 청소년 문제의 수위도 점점 심해지고 있어요. ‘피지 청소년들이 범죄에 물들지 않고, 밝고 건강하게 지낼 수 있게 하자!’, 그게 저희 봉사의 주목적이었어요. 그렇게 한글학교를 시작했답니다. 한글, 케이팝 가요‧댄스, 태권도 등을 가르쳤고 수업 후에는 현지 학생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소소한 고민이나 마음을 공유했고요. 어느 날은 피지국립대학교의 개강식 행사에 전국의 고등학생 대부분이 이틀에 걸쳐 온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한국을 홍보하기 위해 댄스 공연을 한 적이 있어요. 청소년센터 건축을 위한 기초공사에 함께하기도 했고요. 또 어떤 날은 길거리에서 케이팝 플래시몹을 하기도 했네요.(하하)

플래시몹이요? 큰 용기가 필요했겠어요.

솔직히 하루하루가 도전의 연속이었어요.(하하) 저는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걸 선호했고, 남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었는데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며, 댄스며, 수업이라니, 와우! 한글학교 홍보를 위해서 짤막하게 케이팝 댄스 영상을 찍어서 SNS에 올리는 일도 많았거든요. 하지만 피하지 않고 자꾸 하다 보니까, 이제는 ‘어떻게 하면 홍보가 될까?’, ‘어떤 음악이 좋을까?’, ‘어떻게 스텝을 밟아야 할까?’ 이걸 연구하는 절 발견했어요.(하하)

그곳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 있었다면요?

피지에서 몸이 아팠던 적이 있어요. 모기에 물린 자국이 너무 간지러워 긁은 부위에서 고름이 생겨 나중에는 여러 군데로 번지더니 정말 아프더라고요. 참고 지나가자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부장님께서 “빨리 병원 가서 치료받자. 아프면 참지 말고, 얼른 치료를 받아야 해. 그래야 빨리 낫지.”라고 하면서 저를 병원에 데려다주셨어요. 치료받고 집에 돌아오니 단원들과 현지 친구들이 하나같이 괜찮냐고 걱정해주는 거예요. 저보다 저를 더 생각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감동을 받았어요. 저는 아파도 잘 참는 사람이에요. 마음이 아파도요. 여기에 와서도 내 속 어두운 이야기까지 드러내고 싶지 않아 내색하지 않고 살려했죠. 일을 할 때도 남에게 부담주기 싫어서 혼자 해버리는 게 편하고 익숙했고요. 그런데 이곳은 일을 할 때도 ‘함께’, 쉴 때도 ‘함께’예요.(하하) 제가 여기서 지내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은채야, 얘기하고 살아~.”, “왜 혼자 하고 있어? 같이 하지.” 이거예요. 그러면서 나를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어요. ‘왜 나는 날 숨기고 싶어 하지? 왜 혼자 하고 싶지?’, 잘 하지 않던 질문을 계속해보는 거예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나요?

사실 제가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 부모님이 별거를 시작했어요. 제가 사형제 중 셋째인데 아빠는 첫째 형과, 엄마는 나머지 삼 형제와 같이 살게 되면서 아빠의 빈자리를 채워보려고 엄마를 많이 도와드리려고 했던 것 같아요. 힘들어도 힘든 내색을 안하고, 어려워도 어렵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중고등학생 때도 엄마를 위한답시고 사고도 치지 않으려 노력했어요. ‘착실’과 ‘활발함’이라는 가면을 쓴 저는, 가족 안에 있었지만 부족한 것을 자유롭게 꺼낼 수 있는 진짜 가족을 잃고 산 것 같았어요. 그런데 여기에 와서 지부장님과 단원들과의 관계에서는 오히려 잘하려고 하면, 마음을 숨기려고 하면, 혼자 하려고 하면 혼나요.(하하) ‘함께’. 저에게 가장 힘들었던 ‘함께’를 이곳에서 배워요.

한글학교를 홍보하러 나간 길에 만난 피지의 초등학생들과 한 컷. 사진제공 박은채
한글학교를 홍보하러 나간 길에 만난 피지의 초등학생들과 한 컷. 사진제공 박은채
피지에 세워질 청소년 센터 건축 기초작업을 위해 봉사 중이다. 힘든 내색 없이 오히려 주변을 챙기며 일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느꼈단다. 사진제공 박은채
피지에 세워질 청소년 센터 건축 기초작업을 위해 봉사 중이다. 힘든 내색 없이 오히려 주변을 챙기며 일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느꼈단다. 사진제공 박은채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볼 기회가 많았겠네요.

맞아요. 특히 피지라는 곳이 가족을 아끼고 사랑하는 문화가 강하다고 이야기했었는데요. 저희 지부 근처에 사는 ‘칼리’라는 여자 아이를 만난 적이 있어요. 처음엔 제가 하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어디가 아픈가 보다 생각했어요. 어느 날 칼리 아빠와 대화할 기회가 있었는데, “우리 아이가 청각기관에 문제가 좀 있어요. 이야기를 들어도 이해를 잘 못하고, 말도 어눌해요. 그리고 우리 아이가 장난기가 좀 많아요. 하하하.”라는 뜻밖의 말을 들었어요.

그 후로 칼리는 저에게 마음을 열고 제가 묻는 말에 어눌하지만 표현도 제법 해줬어요. 집을 지날 때마다 환하게 웃으며 인사해 주는 모습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아요. 칼리의 부모님은 칼리를 참 사랑하는 것 같아요. 칼리가 아파도, 칼리가 부족해도 사랑의 크기에는 변함이 없었어요. 피지에서 제가 그 칼리와 같았어요. 제 곁의 지부장님, 단원들 그리고 피지 사람들이 절 돌봐주고, 아껴주고…. 그 사랑이 가슴으로 만나지니까 울컥할 때가 많아요. 내가 부족하고 어려울 때 나를 도와줄 사람들이 가까이에 있다는 게 이렇게 좋은지 몰랐어요.

자기 이야기를 꺼낸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고마워요.

이제는 형의 변화가 이해가 돼요. ‘아, 이래서 말이 많아지고 밝아졌겠구나.’ 최근 우리 가족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어요. 다시 가족이 합치게 됐거든요. 예전에 부모님은 서로 얼굴 붉히며 정말 많이 싸우셨고 고통스러워하셨는데 지금 어머니는 참 행복해 보이세요. 우리 가족이 원래의 모습을 찾고 있듯이 저 역시 잃어버렸던 나를 조금씩 되찾고 있어요. 더 이상 이중적인 박은채가 아닌 솔직하고 단순하게 그러면서도 남을 배려하는 박은채로 살고 싶어요.

무더운 날씨를 시원하게 해 줄 아이스크림을 아이들과 함께 나눠 먹었다.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니 덩달아 기뻐진다. 사진제공 박은채 
무더운 날씨를 시원하게 해 줄 아이스크림을 아이들과 함께 나눠 먹었다.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니 덩달아 기뻐진다. 사진제공 박은채 

세계에서 가장 빨리 2024년을 맞이한 사람 중 한 명이 됐어요. 올해 계획은요?

봉사활동을 마치고 귀국하면 학교에 복학하겠죠. 저는 물리치료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계속할 거예요. 학업과 일상생활이 바쁘다는 핑계로 가슴속에 담아두고 있던 ‘감사’를 새해에는 전하고, 나누고 싶어요. 그러다 보면 행복한 한 해가 되겠죠?

새로운 세상을 보려고 떠났던 여행이 뜻밖에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는 순간을 허락할 때가 있다. 잘 알려하지 않았던, 어쩌면 마주하기 힘들었던 자기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시간이다. 여행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 답하다 보면 우리는 부쩍 성장해 있으리라. 그러니 길을 떠나자. 아직 열리지 않는 수많은 문들을 두들겨 보자. 여행을 마치고 자신의 여정이 아름다웠다고 말하자. 박은채 군처럼 말이다. 그가 그린 여행의 지도는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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