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 젖어 빛을 발하다

누구나 삶 속에 찾아오는 문제나 질병으로 몸과 마음이 무너질 때가 있다. 하지만 그게 끝은 아니다. 신기하게도 우리의 몸과 마음은 다시 회복될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그 길을 찾기가 조금 어려울 뿐이다. 7년 전, 난소암과 자궁암으로 죽음의 문턱에 섰던 재미교포 김윤옥 씨가 새 삶과 마음을 얻은 에세이를 전해왔다. 암에서, 절망에서 벗어난 그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김윤옥1958년생. 중학교교사로 근무하던 그는 주한 미군과 결혼해 미국으로 갔다. 25년간 캔사스시티의 한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했으며, 현재는 여성들을 위한 모임 ‘커피와 펠로십’과‘기독교 지도자 오찬 모임’의 리더로 활동하고 있다. 2016년, 암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그는 오히려 암 덕분에 몰랐던 행복과 기쁨을 찾았다고 말한다. 사진 김윤옥
김윤옥1958년생. 중학교교사로 근무하던 그는 주한 미군과 결혼해 미국으로 갔다. 25년간 캔사스시티의 한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했으며, 현재는 여성들을 위한 모임 ‘커피와 펠로십’과‘기독교 지도자 오찬 모임’의 리더로 활동하고 있다. 2016년, 암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그는 오히려 암 덕분에 몰랐던 행복과 기쁨을 찾았다고 말한다. 사진 김윤옥

2016년 2월 22일, 나는 항생제 부작용으로 급히 응급실에 실려갔다. 놀라긴 했지만, 다음날 퇴원하면 해야 할 일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나를 향해 걸어 오는 담당 의사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눈에 눈물이 서려 있었다.

“부인은 암에 걸리셨습니다. 아주 심각합니다.”

“네?……”

마치 날벼락을 맞은 듯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정신은 혼미해지고, 눈 깜짝할 사이에 온 세상이 생기와 의미를 잃었다. 내 마음은 어둠으로 뒤덮여버렸다. 그 가운데 뚜렷하게 떠오르는 단어는 ‘죽음’ 하나였다. 곧 격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밖에 없는 딸아이의 소리였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나를 위해서도 내 딸을 위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하며 하늘을 향해 그저 부르짖는 것밖에는.

이후로 모든 일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나는 곧바로 암센터로 이송되어 수술을 받았다. 즉시 수술을 하지 않으면 6개월도 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너무 억울하고 부당하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었다. 평생 좋은 음식만 먹고 몸에 나쁘다는 것은 피하며 나는 건강을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그 노력이 내 몸에 가져다준 결과가 몹쓸 암이라니 기가 막혔다. 분노의 화살은 곧 나를 향했고 ‘내가 저주를 받았다.’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인 남자와 결혼한 게 떠올랐고, 나를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큰 상처를 주면서 이기적으로 살아온 내가 벌을 받는 것 같았다. ‘결국 암까지 걸려 가족들에게 염려를 끼치다니….’ 이런 생각이 나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대학 시절, 친구를 따라 특별 찬양을 하러 갔던 미군 부대 안의 교회에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은 남편 스코트 씨. 함께한 세월이 벌써 41년이다. 사진 김윤옥
대학 시절, 친구를 따라 특별 찬양을 하러 갔던 미군 부대 안의 교회에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은 남편 스코트 씨. 함께한 세월이 벌써 41년이다. 사진 김윤옥

마음이 죽음에서 벗어나면

나의 병명은 난소암, 자궁암 말기였다. 수술을 통해 주먹만 한 암 덩어리 두 개를 비롯해 열아홉 종류의 종양이 몸에서 잘려나갔다. 숨쉬기도 말하기도 어려운 상태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한국에서 여동생이 왔다. 말은 안하지만, 임종 때까지 곁에서 잘 보살피라는 가족들의 당부를 받고 온 듯했다. 파리한 내 모습에 동생은 잠시 눈물을 흘렸지만 이내 내가 생각지 못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언니, 이 일은 저주도 재앙도 아니야. 축복이고 평안이야!”

“이렇게 내가 고통스러운데… 이게 어떻게 축복이야?”

그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동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언니한테 오기 전에 우리 교회 목사님을 찾아가서 언니 이야기를 했는데, 목사님은 암 환자들을 많이 만나보셨대. 마음이 먼저 죽음에서 벗어나는 게 중요하대.”

머릿속에 ‘죽음’과 ‘저주’ 두 가지만 가득 차 있던 내 마음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목사님께 상담을 받고 싶어서 전화를 드렸지만 연결이 안되었다.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그 이튿날 동생 교회의 목사님이 전화를 주셨다. 말할 수 없이 기뻤다.

“부인, 몸 상태가 어때요? 어렵지요? 힘들지요?”

“네… 많이 힘듭니다.”

“제 이야기를 잘 들어보세요. 예수님은 어떤 병자든지 한 번도 못 본 체하고 그냥 지나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만나는 병자마다 다 고쳤다는 말씀이네요? 그렇다면 저도 반드시 고치시겠네요!”

“네 맞아요. 암 환자의 마음에 암이 들어오면 암이 일하기 시작하고, 예수님이 들어오시면 예수님이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어떤 것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목사님의 말씀이 가문 땅에 내린 비처럼 마음에 모두 스며들었다. 나는 내 병을 고치실 예수님을 믿기로 했다.

“자신의 허물과 연약함을 보지 마세요. 연약함은 예수님께서 일할 수 있는 좋은 조건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모습과 상관없이 오직 은혜로 고쳐주십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목사님의 한마디 한마디가 꽁꽁 묶고 있던 사슬에서 나를 풀어주었다. 처음으로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아, 저는 이제 살았네요. 목사님!”

“예, 다 나았습니다!”

강한 소망의 빛은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용기를 불어넣었다. 나는 가족들의 정성 어린 간호를 받으며 세상 가장 행복한 환자가 되어 하루하루를 보냈다. 통증을 느끼는 것도 감사했다. 살아 있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혼자 거동할 수도 없고, 오랜 시간 침대에 누워서 살아야 했지만 내 마음은 둥실둥실 구름처럼 행복의 세계를 떠다녔다. 사람이 행복하면 몸에서 좋은 효소가 나온다던데 그때부터 내 몸은 그 효소를 듬뿍 받으며 행복한 내 마음을 따라와야만 했다.

독감이나 폐렴에 한 번도 걸리지 않고 항암치료를 마쳤다. 남편과 딸이 기뻐하는 날 보고 항암 치료를 우등생으로 끝냈다며, 항암치료 졸업식을 하자고 했다. 내가 생각해도 장학금을 타야 할 만큼 좋은 성적으로 끝낸 것 같아 사각모를 쓰고 가운을 입고 암 졸업식을 가졌다. 사진 김윤옥
독감이나 폐렴에 한 번도 걸리지 않고 항암치료를 마쳤다. 남편과 딸이 기뻐하는 날 보고 항암 치료를 우등생으로 끝냈다며, 항암치료 졸업식을 하자고 했다. 내가 생각해도 장학금을 타야 할 만큼 좋은 성적으로 끝낸 것 같아 사각모를 쓰고 가운을 입고 암 졸업식을 가졌다. 사진 김윤옥

또 다른 고통의 시작

그 후 항암치료가 시작되었다. 두세 번 받고 나니 온몸이 아프기 시작했고, 이전보다 더 중한 병자가 되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가장 어려운 것이 음식을 먹는 일이었다. 입맛이 쓴 정도가 아니라 쇳물 냄새가 나서 토할 것 같았다. 문제는 음식을 먹지 못하면 체력이 없어서 항암치료를 계속 받을 수 없었다. 두려움이 찾아왔다. 목사님께 다시 전화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부인, 음식은 맛으로 먹는 것이 아니에요. 안 먹으면 죽으니까 먹는 것입니다. 자동차는 휘발유가 맛이 있다 없다 하지 않고 그냥 꿀꺽꿀꺽 삼켜요. 그래서 잘 굴러가잖아요. 음식을 먹어야 면역체계가 유지됩니다. 음식이 가장 좋은 약입니다.”

“아 목사님, 그러네요!”

평범한 진리를 깜빡 잊었던 거다. 그날부터 무조건 먹기 시작했다. 맛이 없어도 먹고 속이 울렁거려도 먹고, 입이 아파도 먹고, 배가 안 고파도 먹었다. 거실, 부엌, 침실 등 집안 곳곳에 음식을 두고 먹어대니 남편도 딸도 기뻐서 계속 음식을 챙겨주었다. 몸무게가 늘기 시작했다. 항암치료를 건너뛸 필요도 없었고 수혈하거나 백혈구 수치를 올려주는 촉진제를 맞을 이유도 없었다. 내가 먹은 음식이 면역체계를 충분히 유지해 준 것이다. 그렇게 ‘먹어야 산다!’라는 또 하나의 말이 내게 들어와 나를 사는 길로 인도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내 핏줄을 타고 들어오는 약물이 위벽을 깎아내려 자주 위경련을 일으켰다. 하늘이 노래지고 방바닥에 떼굴떼굴 굴러도 해결할 수 없는 통증 때문에 응급실에도 몇 번 갔다. 그때마다 또다시 죽을 것만 같아 무척 두려웠다. 한 번은 응급실에서 돌아오는 길에 목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목사님, 위경련이 너무 심해서 죽을 것만 같아요.”

“지금도 위경련 일어납니까?”

“지금은 아니에요.”

목사님이 웃으셨다.

“목사님, 나는 심각한데 왜 웃으세요?”

“날 웃겼잖아요. 지금 위경련 안 일어나면 다 나은 건데 왜 염려하세요? 그리고 위경련은 암 환자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아무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에요.”

“어머나, 목사님, 그러네요. 위경련 아무것도 아니네요.”

그렇게 마음에 있던 두려움이 사라졌다. 예수님은 나를 그냥 지나치시지 않고 고쳐주셨는데 한두 번 일어난 위경련으로 인하여 내 생명을 잃을까 떨고 있던 것이다. 나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암이 원인일까 봐 겁을 먹었다. 목사님께서 그날 많은 것을 말씀해주셨다. “세상에 자기 스스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 있습니까? 죽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이미 하나님 책에 정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이 사람의 마음에 심길 때 일어난 변화에 대하여 성경 속 이야기를 통해 설명해주셨다. 결국, 어떤 병이나 어떤 문제이든지 거기에 예수님이 더해졌을 때 해결된다는 간단한 공식이 보였다.

열여덟 번의 항암치료를 받으며 어려운 순간이 많았지만, 그때마다 이 공식을 내 마음에 적용하니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모든 일이 내게 허락된 특별한 일로 생각되었다. 성경 말씀은 실제로 살아서 능력이 있었다. 병든 사람을 고치며 약한 사람을 강하게 하며, 두려운 사람에게 평안을 주며, 불행한 사람을 행복으로 이끌어주었다. 병들어 쓸모 없고 불쌍하게 죽어가는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푸는 세계가 있음이 너무 놀랍고, 감사했다.

지금도 그 시절을 회상해 볼 때마다 참 다행이며 감사한 것은 목사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그대로 믿어진 사실이다. 나는 길이 없어 절망했는데, 하나님은 나를 고쳐주려고 예수님을 통해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이미 준비해놓으셨다.

나를 간호하러 한국에서 온 동생 혜영. 가족들의 사랑은 늘 말할 수 없이 기쁘고 고맙다. 동생 덕분에 한국의 목사님과 연결되어 살아날 수 있었다. 사진 김윤옥
나를 간호하러 한국에서 온 동생 혜영. 가족들의 사랑은 늘 말할 수 없이 기쁘고 고맙다. 동생 덕분에 한국의 목사님과 연결되어 살아날 수 있었다. 사진 김윤옥
‘기독교 지도자 오찬모임’의 리더로 활동하고 있는 최근 나의 모습. 항암치료가 끝난 후, 하나님은 내가 병에서 나았고, 마음에 새 소망이 생겼음을 주변에 전하도록 이끄셨다. 그 시작은2016년 12월이었다. 처음 2천여 명 앞에서 내 이야기를 했다. 이듬해엔 서울 스카이돔에서 열린 행사에서 2만 명 군중 앞에 설 기회도 얻었다. 사진 김윤옥
‘기독교 지도자 오찬모임’의 리더로 활동하고 있는 최근 나의 모습. 항암치료가 끝난 후, 하나님은 내가 병에서 나았고, 마음에 새 소망이 생겼음을 주변에 전하도록 이끄셨다. 그 시작은2016년 12월이었다. 처음 2천여 명 앞에서 내 이야기를 했다. 이듬해엔 서울 스카이돔에서 열린 행사에서 2만 명 군중 앞에 설 기회도 얻었다. 사진 김윤옥

항암치료, 졸업

2016년 8월, 많은 사람의 도움을 입으며 항암치료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남편과 딸이 너무 기뻐했다. 딸이 석사과정 졸업식에 입었던 졸업가운과 사각모를 내게 씌워 항암치료 졸업식을 해주었다. 그날은 내가 암에서 풀려났음을 상징하는 특별한 날이 되었다. 직장에도 다시 출근하며 정상적인 생활을 시작했다. 몸도 마음도 고침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이 신기하고 다행이다.

암에서 나은 후에도 목사님과 자주 통화를 하고 미국에 오실 때마다 만나 뵈었다. 목사님께서는 내가 어떻게 암을 이길 수 있었는지 나보다 더 생생하게 기억하시며 내게 상기시켜주셨다. 나는 내 행복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하며 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나를 위한 삶의 결과는 암 두 덩어리였다. 또한, 병에서 나를 지킬 수 없었다. 내 마음은 절망과 죽음을 향해 걸어가려 했다. 이제는 예전과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그때, 목사님께서 치명적인 병이나 스스로 해결하지 못할 문제에 갇혀 두려움과 절망 가운데 묶여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받은 소망을 전하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러면 그들도 나처럼 건강을 되찾고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말이다. 그날 이후, 많은 사람 앞에 서서 내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겼다. 미국을 비롯해 일본, 한국을 다니며 소식을 전했다.

2020년에는 정년퇴직하고 딸이 사는 메릴랜드 주로 이사를 왔다. 과거 암 판정을 받았을 때 난 ‘하나뿐인 딸이 결혼하는 것도 보지 못하는 걸까’라는 생각에 슬픔에 빠졌다.

그런데 이제 딸이 결혼해 사위가 생겼으며, 사랑스러운 손녀딸까지 얻었다. 내 눈에 보였던 절망의 그림은 허상이었다. 전에는 눈에 보이는 대로 생각하고 말했지만, 이제는 내가 보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좋은 마음을 받아들이고, 그 마음을 따라 살기 시작했다.

메릴랜드 주로 이사온 후, 가까운 곳에서 딸을 일주일에도 몇 번씩이나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올해 6월, 나는 예쁜 손녀와 사랑에 빠진 할머니가 되었다. 사진 김윤옥
메릴랜드 주로 이사온 후, 가까운 곳에서 딸을 일주일에도 몇 번씩이나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올해 6월, 나는 예쁜 손녀와 사랑에 빠진 할머니가 되었다. 사진 김윤옥

요즘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암 환자를 온라인에서 만나 그들에게 소망을 전한다. ‘커피와 펠로십’이라는 온라인 모임도 진행하고 있다. 때론 다른 교회로부터 초대받아 간증하러 간다. 온라인 모임의 장점 덕분에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등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상상하지도 못했고, 계획하지도 않았던 삶을 살고 있다. 외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윤옥潤玉’이라는 내 이름의 뜻을 생각해본다. ‘물에 젖어 빛나는 구슬.’ 나는 암에 걸린 후에야 내가 소망에 젖어 빛을 발하는 보석이었음을 알았다. 나는 여전히 마음이 약하고 부족함도 있다. 하지만 그 모습에 반응하지 않는다. 나는 받은 소망과 참 행복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행복한 사람이다. 많은 사람이 매인 것에서 풀려나 행복하고 건강하게 사는 것을 보고 싶다.

재앙이고 저주라고 생각했던 암이 내게 큰 축복이 되었다. 산산이 깨어졌던 나를 이어붙인 사랑이 무한했기 때문이다. 어떠한 조건 없이 나를 회복시켰으며, 몇 번이고 깨어져도 다시 나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을 안다. 암 때문에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훨씬 많다. 연약하고 부족한 나를 못 본 체 지나치시지 않은 예수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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