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리치바 전 시장 자이메 레르네르

아침에 뜬 해가 중천에 올랐다가 내려가듯이, 누구든 태어나면 성장의 정점을 찍고 점점 늙어간다. 현대 의학과 과학은 노화와 질병을 극복할 연구를 해서, 탄생과 죽음 사이의 거리를 더 늘려보려고 노력한다. 생로병사를 피할 길 없는 사람들처럼, 도시도 성장기, 전성기, 소멸기의 과정을 수없이 반복한다. 그 도시에 요즘 ‘재생’이란 키워드가 붙으면서 여러 방안이 생겨나고 있다. 도시재생의 좋은 사례 중에, 브라질의 쿠리치바는 빼놓을 수 없다. 그곳에는, 아픈 도시를 살아 숨쉬게 해준 건축가 출신의 전前 시장 자이메 레르네르Jaime Lerner(1937~2021)의 정신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각 분야 세계 최고의 전문가들이 나와 자기 분야의 경험과 아이디어를 이야기하는 테드 토크TED TALKS에 자이메 레르네르가 나온 적이 있다. 캘리포니아의 해변 도시 몬터레이에서 열린 이 강연에서 그는 시정市政을 책임지는 시장의 열정을 15분 37초의 짧은 시간에 오롯이 담아냈다.

시장이 시민을 위하는 것이 당연해 보일 수 있지만, 여느 시장들과 그가 다른 점은 도시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대부분은 시민의 편의와 행복을 위해 필요한 백그라운드 정도로 도시를 인식하기에, 오래된 건물을 밀어내고 첨단 건물들을 숲처럼 조성하거나 넓은 도로를 깔아 자동차 중심의 도시로 만드는 것에 큰 문제를 삼지 않는다. 마치 돈이 필요하다면 아픈 어깨에 파스를 붙이고라도 일을 하듯, 우리는 ‘발전’이라는 꿀맛에 교통과 환경 문제를 야기하는 개발의 역효과에 입을 다문 채 아픈 도시를 그저 바라만 본다.

분리해둔 쓰레기는 주말에 수거 차량이 와서 무게에 따라 과일이나 채소로 교환해준다. 쓰레기 분리를 의무가 아닌 놀이 개념으로 승화시킨 방식으로 수거율이 70%에 이른다. 사진 쿠리치바 시청 홈페이지
분리해둔 쓰레기는 주말에 수거 차량이 와서 무게에 따라 과일이나 채소로 교환해준다. 쓰레기 분리를 의무가 아닌 놀이 개념으로 승화시킨 방식으로 수거율이 70%에 이른다. 사진 쿠리치바 시청 홈페이지

도시를 남다르게 바라보는 자이메 시장

하지만 자이메 시장은 도시를 사람과 같은 ‘생명체’로 직시한다. 그래서 함부로 불도저를 들이대거나 길을 파헤치지 않는다. 그가 시장을 세 차례나 하고 주지사까지 역임한 파라나 주의 주도州都 쿠리치바는 그런 소신 덕분에 최고의 생태도시로 자리할 수 있었고, 사람도 도시도 같이 행복할 수 있음을 보여준 실증 사례가 되었다. 그의 마인드를 잘 표현한, 테드 영상 앞부분을 간추려본다.

“저는 강연할 때 ‘도시는 문제problem가 아니고 해답solution’이라는 말로 서두를 꺼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도시를 비관적으로 바라봅니다. 저를 찾아온 어떤 시장님은 도시 규모가 너무 큰 게 문제라고 하고, 또 다른 시장님은 재정 부족을 말합니다. 40년 넘게 도시를 위해서 일해온 제 경험으로 볼 때, 전 세계의 어떤 도시도 3년 정도 걸려서 모두 개선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도시의 규모나 예산 때문이 아닙니다. 여러분, 창의성은 예산에서 0을 하나 뺐을 때 시작된다는 사실을 아세요? 정말 그렇습니다. 도시의 모든 문제는 경제적 여력 때문이 아닙니다. 시민들이 참여해 공동 책임의 방정식으로 풀어가야 하고, 이에 대한 구상도 확고해야 합니다.

‘거북이 등’은 우리 도시의 유기적 연계성을 설명하기에 좋은 예시입니다. 건강한 도시는, 거북이 등 모양처럼 하나하나가 독립적이되 주변과 잘 이어져 있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거북이 등을 원하는 대로 잘라내면 거북이가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럽겠어요. 그런데 정작 우리는 도시에서 이런 행위를 하며 살고 있습니다.

제가 볼 때, 도시를 힘들게 괴롭히는 또 하나의 존재가 승용차입니다. 겨우 한두 명 태우고 다니는 승용차는 버스에 비해 휘발유를 더 많이 들이키고 매연만 뿜어댑니다. 게다가 도로와 주차장 확보 등 인프라 구축에도 비용이 꽤 듭니다. 한마디로 손 많이 가는 까탈스런 사람이죠.(웃음)”

자이메 레르네르 Jaime Lerner 브라질 쿠리치바 시에서 태어나 평생 고향에서 보낸 건축가이자 행정가. 시장을 세 차례나 하면서 교통과 환경 면에서 국제적 기준이 되는 도시를 만들었다. 이런 공로로 그가 받은 상은 열거 못할 만큼 많다. 나중엔 파라나주의 주지사,국제건축가연합(UIA) 회장도 역임했다. 사진 www. jaimelernerdesign.com
자이메 레르네르 Jaime Lerner 브라질 쿠리치바 시에서 태어나 평생 고향에서 보낸 건축가이자 행정가. 시장을 세 차례나 하면서 교통과 환경 면에서 국제적 기준이 되는 도시를 만들었다. 이런 공로로 그가 받은 상은 열거 못할 만큼 많다. 나중엔 파라나주의 주지사,국제건축가연합(UIA) 회장도 역임했다. 사진 www. jaimelernerdesign.com

그렇다면 자이메 시장이 꿈의 도시로 살기 좋게 만든 쿠리치바는 이전에 어떤 도시였을까? 인구 변이를 먼저 살펴보면, 1950년대부터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 10년 사이에 2배로 증가했고, 그가 건축학 공부를 마쳤을 즈음엔 50만 명에 육박했다. 그로부터 30년 뒤 쿠리치바 시민은 무려 4배가 불어난 200만 명이 되었다. 인구 증가가 가져올 문제들을 자이메는 미리 고민하기 시작했다. 인구가 많아지면 집, 일터, 학교, 시장 등 모든 게 더 필요할 텐데 마구잡이로 개발하면 도시가 점점 병들 게 뻔했기 때문이다. 얼마 후 도심의 교통 혼잡은 사회 이슈로 떠올랐고, 시에서는 도로확장을 대안으로 내놓았다. 하지만 무차별한 개발을 염려한 자이메는 도시계획연구소를 세워, 정책 결정권자들에게 개발에 필요한 자료와 해결의 실마리들을 꾸준히 알려주었다. 이런 솔선수범한 자세를 높이 평가한 당시의 주지사가 33살의 자이메를 쿠리치바 시장으로 전격 임명했다. 그때가 1971년이었다.

도시 침술, 공동 책임의 방정식, 창의적인 구상

오랜 연륜과 지혜에서 추출된 자이메 시장의 도시재생 철학은 크게 세 가지로 모아진다. 그것은 도시 침술, 공동 책임의 방정식, 창의적인 구상이다.

‘도시 침술’은, 쉽게 설명하면 ‘호미로 미리 막아 가래 쓸 일을 없게 하는’ 방법이다. 몸이 아플 때 마취를 하고 수술 받는 것보다 침을 맞아서 나을 수 있다면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침술이 훨씬 가뿐하지 않을까! 큰 돈을 써가며 도시를 개발해야 문제가 풀리는 게 아니다. 적은 비용으로, 작은 변화를 줌으로써 도시가 앓고 있는 근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자이메 시장은 확신한다. 그가 도시 침술을 적용시킨 대표 사례가 BRT(간선급행버스체계) 시스템이다. 세계 최초로 실행한 이 대중교통시스템은 버스와 열차의 기능적 장점을 결합한 것으로, 고비용의 지하철 건설을 대체할 방법이었다. 3칸으로 연결된 굴절버스에 270명이 탑승가능하며, 독특한 원통형 정류장은 쿠리치바를 상징하는 심벌 마크가 되었다. ‘지상의 지하철’이라고 불리는 이 시스템은 서울을 비롯해 전 세계 250여 개 도시에서 채택해 현재 운용되고 있다.

땅 위를 다니는 ‘지상의 지하철’이라고 불리는 대중교통. 서울을 비롯한 전 세계 250여 개 도시에서 이 방식을 채택해 운용하고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땅 위를 다니는 ‘지상의 지하철’이라고 불리는 대중교통. 서울을 비롯한 전 세계 250여 개 도시에서 이 방식을 채택해 운용하고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원통형 정류장에 버스가 도착하면 먼저 발판이 내려오고 문이 열리면서 승하차가 이뤄진다. 사진 www.youtube.com/ EMBARQNetwork
원통형 정류장에 버스가 도착하면 먼저 발판이 내려오고 문이 열리면서 승하차가 이뤄진다. 사진 www.youtube.com/ EMBARQNetwork

친환경 자재로 빌딩을 짓는다고 도시의 지속가능성이 보장될까? 그 문제를 깊이 생각해 도출한 두 번째 원칙이 ‘공동 책임의 방정식’이다. 자이메 시장은 이 원칙을 쓰레기 분리수거에 적용했다. 먼저 시스템이 상용화되기 전에 아이들에게 분리수거의 필요성과 방법, 파생 효과에 관해 6개월간 차근차근 가르쳤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집에 가서 부모님께 다시 설명했고, 그러면서 분리수거에 동참하려는 시민들이 하나둘 늘어갔다. 공감대가 형성되자 시에서 분리수거를 시작했다. 누구든 쓰레기를 가져오면 무게를 달아 싱싱한 과일이나 채소로 바꿔주는 것이다. 쓰레기 분리를 의무가 아닌 놀이 개념으로 승화시킨 정책은 쿠리치바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주인 의식을 갖고 도시 문제를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 현재 쿠리치바의 쓰레기 분리수거 비율은 70% 로, 유럽에서 가장 잘한다는 독일보다 30%나 더 높다.

세 번째 원칙 ‘창의적인 구상’은 외형과 내면 두 부분으로 볼 수 있다. 외형적으로 창의적인 구상은, 폐광 장소에 오페라하우스를 지어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고 테마 공원들과 드넓은 식물원을 조성해 시민들이 여유 있게 보낼 쉼터를 늘린 것이다. 녹지공간이 많아지면 사람도 도시도 저절로 힐링이 된다. 실제로 쿠리치바의 녹지 면적이 1971년에는 1인당 0.5㎡였는데 지금은 1인당 52㎡에 이른다. 이 수치는 유엔이 권고한 기준의 4배가 넘는 면적이다.

그렇다면 그의 창의적 구상에서 내면적인 것은 무엇을 말할까? 녹지를 늘리듯이 사람들 마음에 긍정의 요소들을 늘려 가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자이메 시장은 초창기부터 도시의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해 미래의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공간을 기획했다. 그것이 도시 곳곳에 있는 등대 모양의 작은 도서관이다.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그들의 꿈이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단지 생존만을 위해 도시에 사는 게 아닙니다. 도시를 사랑해야 살아 갈 힘이 생깁니다. 자신의 정체성, 소속감을 그가 사는 곳에서 끄집어낼 수 있다면 더 바람직합니다. 버스나 학교조차 없는 동네에서도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그들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그곳에 살아오셨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은 어떤 장소에 소속되어 있다는 심리적 안정감을 얻으니까요.”

마치 등대가 바다를 오가는 선박을 어둠에서 안내하는 것처럼, 희망 없는 아이들을 꿈으로 이끄는 도서관은 가슴 속에 희망이 싹트도록 돕는 지혜의 등대이다.

쿠리치바의 녹지 면적이 1971년에는 1인당0.5㎡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1인당 52㎡에 이른다. 이 수치는 유엔이 권고한 기준의 4배가 넘는다. 사진은 쿠리치바 식물원 풍경이다. 사진 www.youtube.com/ Exploropia
쿠리치바의 녹지 면적이 1971년에는 1인당0.5㎡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1인당 52㎡에 이른다. 이 수치는 유엔이 권고한 기준의 4배가 넘는다. 사진은 쿠리치바 식물원 풍경이다. 사진 www.youtube.com/ Exploropia

‘성장과 개발’ 패러다임을 ‘재생과 연결’로 바꾼 선구자

도시를 바꾸고 되살리는 그의 세 가지 원칙이 가능했던 이유는 바로 신속한 실행력이다. “우리는 계획하는 데 시간을 몽땅 쓸 수 없습니다. 그래서 빠르게 일하는 걸 늘 명심합니다.”라고 말한 자이메 시장은 금요일 저녁부터 월요일 새벽 사이에 1km의 도로를 속전속결로 만든 적이 있다. 그가 추진하고 있는 보행자 전용도로 설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월요일 아침에 데모를 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그는 경찰의 공권력이 개입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래서 나온 방법이 60일 걸릴 공사를 72시간 안에 끝내는 것이었다. 그는 현장에서 인부들과 함께 보내면서 보행자 도로를 만들었다.

월요일 아침에 시위대가 도착했을 때, 자동차가 사라진 그 거리에는 자유롭게 앉아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로 가득했다. 결국 시위대도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탄생한 보행자 전용 거리를 두고 시민들은 ‘꽃의 거리’라고 부른다. 처음에는 주변 상인들의 반대도 심했으나, 거리미술제를 개최하고 간이 시장을 열면서 관광지로 알려져 이제는 쿠리치바 시의 명소가 되었다. 이 일은 통상적으로 업무 진행이 느린 공무원 사회에서 보기 드문 ‘초고속 사건’으로 지금까지도 계속 회자되고 있다. 그 보행자 전용 거리를 벤치마킹하여 우리나라에도 차 없는 거리가 생겼다.

72시간 만에 속전속결로 만든 보행자 전용 도로. 시민들이 천천히 걸으면서 여유를 찾는 삶의 발원지가 되었다. 사진 쿠리치바 시청 홈페이지
72시간 만에 속전속결로 만든 보행자 전용 도로. 시민들이 천천히 걸으면서 여유를 찾는 삶의 발원지가 되었다. 사진 쿠리치바 시청 홈페이지
자이메가 주지사로 있던 2002년에 개관한 오스카 니마이어 뮤지엄 Oscar Niemeyer Museum. 건축의 거장인 니마이어에게 설계를 의뢰했고 신축 건물에 리모델링한 학교 건물을 이어 완성했다. 사진 www.pxhere.com 
자이메가 주지사로 있던 2002년에 개관한 오스카 니마이어 뮤지엄 Oscar Niemeyer Museum. 건축의 거장인 니마이어에게 설계를 의뢰했고 신축 건물에 리모델링한 학교 건물을 이어 완성했다. 사진 www.pxhere.com 

마치 자신의 고향 쿠리치바를 위하여 태어난 사람처럼 평생을 살아온 자이메 시장. 그는 ‘성장과 개발’ 중심의 시각을 ‘재생과 연결’로 바꿔서, ‘생명’을 가진 도시의 가치를 세상에 널리 알렸다.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탄생한 근대도시는 인구 증가를 담보로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선진국에서는 출산율이 낮아지고 노인 인구의 비중은 높아지고 있다. 이 현상을 두드러진 나라가 일본이다. 젊은이들이 사라진 텅 빈 중소도시에 온갖 방법으로 활기를 불어 넣으려고 애쓰는 일본의 지방 행정을 볼 때 남의 일 같지 않다.

벌써 우리나라도 중소도시의 붕괴와 소멸이 시작되고 있다. 도시를 되살리는 것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과 맥락이 같다. 사람과 도시는 같은 공간에서 행복과 불행을 공유하는 한몸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봄날에 밭흙을 갈아엎듯이, 과감한 개발로 천지개벽하던 시대는 저물었다. 앞으로의 시대엔 고치고 다듬고 가꾸어서 도시를 되살리는 ‘재생’이 가장 중요한 패러다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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