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임예은이 나미비아에서 얻은 것들

인터뷰가 시작된 화상회의 모니터 안에 현지에 있는 임예은의 얼굴이 가득 들어왔다. 그는 초면인 기자에게 처음엔 낯설어하다가 금세 봇물 터지듯이 자신의 겪은 일들을 쏟아냈다. 수수하면서도 씩씩해서 이역만리 아프리카 땅에서 다져진 강인함이 느껴졌다. 그 모습이 참 맑아보였다.

표지 모델 임예은“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렇게 떠난 아프리카에서 그는 지금 자신이 한국에서 누리던 것들이 얼마나 귀했는지 실감하고 있다. 또 본인이 현지인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 한다.
표지 모델 임예은“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렇게 떠난 아프리카에서 그는 지금 자신이 한국에서 누리던 것들이 얼마나 귀했는지 실감하고 있다. 또 본인이 현지인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 한다.

나미비아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 나라여서요. 생소해하는 분도 많을 거 같아요.

저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놀라움을 금치 못했어요. ‘아프리카에 이렇게 좋은 곳도 있구나!’ 싶더라고요. 파스텔 톤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모습이 꼭 동화 속 유럽 마을 같았어요. 아프리카라고 하면 보통 가난한 사람들이 오지에서 어렵게 살 거 같잖아요? 그런데 나미비아는 33년간 독일의 식민지배를 받아서 전반적인 생활문화가 독일식이에요. 차들이 다니는 도로가 오르막길 하나 없이 한국의 고속도로처럼 쭉쭉 뻗어 있어서 신기했어요.

스바코프문트로 한국의 날 행사를 하러 가면서 처음으로 낙타를 타 보았다. 이날 낙타 등에서 바라본 사막은 하늘과 맞닿아 있어서 너무 아름다웠다.
스바코프문트로 한국의 날 행사를 하러 가면서 처음으로 낙타를 타 보았다. 이날 낙타 등에서 바라본 사막은 하늘과 맞닿아 있어서 너무 아름다웠다.

원래는 해외봉사를 그다지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요. 어떻게 마음이 바뀐 건지 궁금해요.

제가 집에서 1남 2녀 중 둘째에요.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주인공이었던 덕선이처럼 위로는 언니가 있고요. 밑으로는 남동생 사이에 딱 끼어 있지요. 저는 어려서부터 또래에 비해서 잘 하는 것도 없었고, 하고 싶은 일도 달리 없었어요. 형제들 사이에서 치이다시피 자라면서 설움이 쌓였어요. 그리고 ‘아빠는 언니만 좋아해!’ ‘엄마는 아들만 예뻐해!’라고 생각하면서 심리적으로 좀 고립되었죠. 학창 시절부터 공부에 별 관심도 없어서 밖으로 더 놀러 다녔어요. 저희 아버지가 꽤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이시거든요. 귀가 시간이 늦을 때마다 부모님과 언쟁하며 집안에서 큰소리가 나곤 했지요. “여자애가 그러면 안된다.”라며 저를 다그치실 때마다 “아빠는 왜 언니 동생과 나를 차별해!”라며 가시 돋친 말을 쏟아냈어요.

집이 속초인데 제가 대학을 춘천에 있는 강원대학교로 진학했거든요. 부모님의 속박이 갑갑해서 벗어나고 싶었는데, 막상 대학생이 되니 마음이 공허해지더라고요. 학과 친구들과 어울리며 이리저리 놀러도 다녔으나 제 마음은 늘 헛헛했어요.

영상을 만들어보고 싶어서 미디어 커뮤니케이션학과에 진학했거든요. 하지만 1학년 때는 전공과목을 깊이 공부하지 않아서 학교에 마음을 못 붙이고 약간 붕 떠 있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해외봉사에 대해서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문득문득 ‘내가 한국을 벗어나면 지금과 좀 다른 사람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 ‘경쟁에 찌들어 사는 것보다 해외에 가서 자유롭게 색다른 경험을 쌓고 싶다.’라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한편으로는 미래가 막연해 보이니까 낯선 오지로 가서 저 스스로를 단련시키고 싶었어요.

나미비아의 국립 과학기술 대학교를 방문했다. 대학 총장님 앞에서 아리랑 공연을 하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나미비아의 국립 과학기술 대학교를 방문했다. 대학 총장님 앞에서 아리랑 공연을 하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현지생활은 좀 어떠셨나요?

처음에는 이곳 날씨가 더워서 조금 힘들었어요. 그런데 나미비아는 한국의 여름처럼 습하지 않아요. 그늘 안으로만 들어가면 서늘해져서 이제는 모든 게 편해요. 이곳 사람들은 외국인에 대해 마음의 벽이 높은 편이에요. 그런데 K-pop 열풍으로 한국이 나미비아에서도 인기가 많아서 사람들이 한국 사람에게는 정말 친절해요. 어디를 가든지 BTS, 블랙핑크, 뉴진스 등 한국 가수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저희가 한국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환영을 해주세요. 길을 지나갈 때 “안녕”, “사랑해”라며 한국어로 인사말을 듣기도 해요.

피아노 아카데미에 온 아이들과 함께. 선생님과 학생 사이가 아닌,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될 수 있었다.     
피아노 아카데미에 온 아이들과 함께. 선생님과 학생 사이가 아닌,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드림캠프에서 K-뷰티 아카데미를 열어서 학생들에게 메이크업을 해주었다.
드림캠프에서 K-뷰티 아카데미를 열어서 학생들에게 메이크업을 해주었다.
드림캠프에서 K-뷰티 아카데미를 열어서 학생들에게 메이크업을 해주었다.
드림캠프에서 K-뷰티 아카데미를 열어서 학생들에게 메이크업을 해주었다.

현지에서 사귄 친구도 있겠지요?

이곳에서 친해진 백인 아주머니 한 분이 계세요. 한국 문화를 너무도 사랑하시는 분이시지요. “이 아프리카로 봉사를 와줘서 너희에게 고맙다.”, “나는 너희와 함께 하는 시간들이 너무 소중하다.”라며 가까운 이웃처럼 저희를 따뜻하게 대해주세요. 한국어를 너무 배우고 싶어 하셔서 저희가 개인적으로도 알려 드리고 있어요.

이분이 “너희가 어떤 행사를 치를 때 도울 사람이 필요하면 나에게 연락을 줘서 말해줘.”라고 하시며 다방면으로 본인의 지인들을 소개해 주시는 등 저희를 살뜰히 챙겨주세요. 얼마 전에는 저희들 먹으라며 나미비아의 전통음식을 해서 가지고 오셨어요. 집으로 초대해서 밀크 타르트도 만들어 주셨고요. 그리고 “가족이 사는 집으로 저희를 초대하고 싶다.”라며 고향의 농장으로 저희 단원들을 불러주셨어요.

사실 몇 달 전부터 초대해 주신 건데, 저희의 봉사 일정이 이미 정해져 있어 한가한 날을 내기가 쉽지 않잖아요. 이번 달 말에 포럼 행사를 마치고 다음 행사 준비를 하고 나면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을 거 같아요.(웃음)

고등교육부 장관님이 우리의 키즈 마인드교육 프로그램에 와주셨다. 장관님과 장관님의 손녀도 함께 사진을 찍었다.
고등교육부 장관님이 우리의 키즈 마인드교육 프로그램에 와주셨다. 장관님과 장관님의 손녀도 함께 사진을 찍었다.

실제 해외에서 경험해 보니 예전과 달라진 게 있나요?

한국에 있을 때 굿뉴스코 워크숍에서 만난 선배들의 모습이 무척 인상 깊었어요. 저는 항상 ‘내가 누구 때문에 힘들고’, ‘이 일은 이래서 안 되고’라는 식으로 부정적인 말을 품고 산 사람인데요. 그분들은 “그곳에서 이런 일이 즐거웠고”, “이래서 행복했다!”라며 긍정적인 말로 경험담을 쏟아내더라고요. 나도 ‘내 속에 있는 것들을 저렇게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을까?’ 싶어서 내심 부러웠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해외봉사를 정말 가고 싶어서 가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어 고민 했거든요.

나미비아 국립 과학기술 대학교에서 초청공연으로 태권도시범을 보였다.     
나미비아 국립 과학기술 대학교에서 초청공연으로 태권도시범을 보였다.     

그런 고민이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점점 궁금해지네요.

하루는 지부장님께 이런 말을 들었어요. “예은아, 너가 여기 학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엄마처럼 아이들을 잘 데리고 다니는 걸 보면 나는 네가 다른 사람보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걸 느낀다.”라고요. “사랑을 많이 받았던 사람이 사랑을 베풀 줄도 아는데 너는 아이들을 진심으로 아껴주더라.”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날 ‘나는 이제껏 부모님에게 서운한 마음을 품고 살았는데, 이런 말을 들을 정도로 소중하게 자란 걸 모르고 살았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그러고 나니 철이 없어서 잘 보지 못하고 살던 사실들이 하나씩 보이더라고요. 사실 친언니랑 같은 기수로 해외봉사를 신청해서 저희 부모님이 다른 가정보다 비행기 값에 대한 부담이 크셨을 텐데요. 온갖 정성으로 그걸 다 뒷받침해 주셨거든요. 지금도 가족이 모두 모인 핸드폰 대화방에서도 “현지에서 힘든 건 없니?”, “좋은 경험을 하고 있으니 엄마가 필요한 건 다 지원해 줄 수 있다.”라며 가끔 여비도 보내주세요. 그날 부모님께 핸드폰으로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어요.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이런 사실들을 잘 몰랐을 텐데, 나미비아로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며 “모진 말로 상처를 드렸는데 미안하고 사랑해요.”라고 전했어요.

한국문화만큼이나 한국에서 온 단원들을 사랑해주시는 리젯 아주머니와 함께.
한국문화만큼이나 한국에서 온 단원들을 사랑해주시는 리젯 아주머니와 함께.

해외봉사를 하며 가장 좋은 건 뭐예요?

영어 실력이 많이 향상되었어요. 저는 학교 다닐 때 영어를 너무 싫어해서 사실 토익시험도 한번도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나는 영어를 못 하는데 어떻게 발표를 하지?’하고 주눅 들어 있었어요. 그러다가 ‘어차피 원어민이 아닌데 좀 부족하더라도 일단 말하고 보자!’라고 마음먹었어요. 또 모르는 말은 찾아서 외워가며 영어로 한국어 수업을 진행하기 시작했어요. 어린이들도 가르쳤고요.

얼마 전에 인근 국가의 단원으로 온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 친구가 학교 다닐 때 제 영어실력을 알잖아요.(웃음) 제가 현지인과 자유롭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며 놀라더라고요. 저도 지금은 무엇이든 영어로 말하는 게 편하고 재미있어요. 학교로 다시 복학하면 교내 외국친구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전에는 영어로 말하기가 부담스러워 일부러 국제 행사에 참가하는 것을 꺼렸는데, 이제는 어떤 행사에도 가서 영어로 말하며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이밖에도 한국으로 가서 하고 싶은 일들이 참 많아요.(웃음)

그는 인터뷰 말미에 “이곳에 온 것만으로도 올해는 최고의 한 해가 되었다!”라고 전했다.

저작권자 © 데일리투머로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