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시절, 일주일에 한 번씩 ‘독서’ 수업이 있었다. 그 시간엔 학교 도서관에 가서 주로 한국 단편소설 모음집을 읽었다. 1학년 봄으로 기억한다. 독서 시간에 펼친 책에 이상의 《날개》가 실려 있었다. 전에 읽었던 《부활》이나 《죄와 벌》 같은 스케일이 큰 장편소설에 비해 내용이 생소해서, 친구 다섯이 방과 후에 따로 모여서 읽고 난 소감들을 열띠게 주고받았다.

소설 《날개》는 살아 있지만 죽은 자처럼 지내는 주인공이 날개를 펴고 날아보려는 욕구를 느끼는 것으로 끝이 나는데, 짧은 소설은 서두에서 이렇게 묻는 것으로 시작한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생명은 빠져나가고 형체만 남은 박제(동물의 가죽을 곱게 벗기고 썩지 않도록 한 뒤 살아 있을 때와 같은 모양으로 만든 물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나 죽은 존재로, 소설 속 주인공이 그와 같은 존재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는 박제된 인간이 아닌 자유로운 존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꾼다.

날개를 멋지게 펼치고 있지만 정작 날지 못하는 독수리 박제처럼, 형체만 남은 인간 곧 마음 없이 행동만 만들어내는 인간은 슬프다. 세상에는 타인을 사랑하려고 하지만 마음에 사랑이 없고,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애쓰지만 이해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 사람이 많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어느 날 예수님께 물었다.

“주여, 형제가 나에게 죄를 범하면 몇 번 용서해 줄까요? 일곱 번까지 할까요?”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해라.”

베드로는 예수님과 용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용서할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용서하는 것이 좋으니까 그렇게 해보겠다는 것이었다. 용서하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지만 최대한 희생해서 일곱 번까지는 용서해 보겠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다. 그 말은, 70×7 = 490이니 490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게 아니라, 용서할 마음을 가지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좋은 일을 하려는 겉모양은 가지고 있지만 그런 마음은 없을 때가 있다. 많은 사람이 가치 있는 일들을 행하려고 하지만, 박제가 된 독수리처럼 생명은 빠져나간 채 날개를 활짝 편 모양만 남아 있을 때가 많다. 그래서 참고 참으며 애쓰고 애쓰다가 안되면 폭발해, 분노를 내쏟으면서 전혀 다른 모습의 사람을 드러내고 만다.

박제가 되어 사는 것이 싫어 자신의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아나 날고 싶어 했던 소설 《날개》의 주인공. 우리도 마음 없이 행동만 만들어내는 삶이 너무 싫을 때 잃어버린 마음이 그립고, 잃어버린 생명을 되찾고 싶어진다. 박제가 된 독수리는 자유롭지 않지만, 살아 있는 독수리는 하늘을 유유히 비행한다. 우리도 잃어버린 생명을 되찾을 때 가치 있는 삶을 마음에서부터 자유롭게 시작할 수 있다.

글 박민희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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