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가보훈부는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남한강변 자전거 도로에 3,421미터 구간을 지정해 ‘몽클라르의 길Road of Ralph Monclar’이라고 이름하였다. 사시사철 평화롭고 고즈넉해 나들이 코스로 알려진 그곳에 이국적인 이름까지 생기니 사람들의 관심이 더 모아지고 있다. 길 이름의 주인공은 6.25 전쟁 때 프랑스 군부대를 이끌고 온 랄프 몽클라르 장군. 도로의 길이는 참전한 프랑스군 연인원 3,421명을 상징한다.

프랑스군은 특히 지평리 전투에서 전쟁을 승리로 전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만약 그때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유엔군이 밀렸다면 평온한 이 마을은 사라졌을 것이고, 대한민국의 운명도 지금과 다른 길을 걷고 있을지 모른다. ‘전쟁’이란 단어는 한번의 공격과 반격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반도 땅에서 3년간 치른 6.25 전쟁 안에는 수백 개가 넘는 짧고 극렬한 전투들이 음표처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전투마다 목숨을 내놓고 싸운 이름 모르는 무수한 용사들이 있었다. 73년 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본다.

랄프 몽클라르Ralph Monclar(1892~1964) 장군의 본명은 라울 샤를 마그랭베르느레 Raoul Charles Magrin- Vernerey이다. 헝가리에서 태어난 그는 군인이 되기 위해 육군사관학교를 나왔다. 사진 지평의병 지평리전투기념관
랄프 몽클라르Ralph Monclar(1892~1964) 장군의 본명은 라울 샤를 마그랭베르느레 Raoul Charles Magrin- Vernerey이다. 헝가리에서 태어난 그는 군인이 되기 위해 육군사관학교를 나왔다. 사진 지평의병 지평리전투기념관

“나는 육군 중령이라도 좋다. 평생 전쟁터에서 살아온 나는 곧 태어날 자식에게 내가 최초의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다.”

1950년 7월, 당시 육군 중장(프랑스는 4성 장군에 해당)이었던 몽클라르 장군이 막스 르젠 국방차관에게 한 말이다. 군인에게 계급이란 때로 목숨만큼 소중하고 그 동안의 명예가 담긴 상징과도 같은 것이다. 하물며 다른 나라의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계급을 낮춘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그는 왜 스스로 계급을 강등하면서 한국전에 참전하려고 했을까? 알다시피 6.25 전쟁은 북한군이 남한을 기습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연합군을 결성해 한국에 파견하기로 했다. 프랑스도 참전을 발표했지만 지상군 전투 부대를 파병할 여력은 없었다. 당시 프랑스엔 사회주의적 정서가 팽배해 있었고, 인도차이나와 알제리에서의 식민지 전쟁으로 병력과 국방예산 확보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12명이라는 최소 규모의 시찰단을 한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지평리전투기념관에 있는 충혼탑.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곳이다. 사진 지평의병 지평리전투기념관
지평리전투기념관에 있는 충혼탑.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곳이다. 사진 지평의병 지평리전투기념관

프랑스 전국을 돌며 한국전 참전 자원군을 모은 4성 장군

그때 참전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이 랄프 몽클라르 장군이었다. 그는 한 달간 프랑스 전국을 돌면서 ‘현역 또는 참전 경험이 있는 예비역 중에서 자발적 지원자’들로 구성된 1,300여 명의 병력을 모집했다. 그리고 그가 주축이 되어 만든 ‘한국전 파병안’ 제안서가 마침내 8월 25일 프랑스 국회의 동의를 얻었다.

몽클라르 장군은 곧 참전할 부대를 이끌고 한국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르젠 국방차관이 막아섰다. “미국의 대대 지휘관은 육군 중령인데, 중장인 당신이 대대를 지휘한다는 건 말이 안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 말에 몽클라르 장군은 망설임없이 중장에서 4계급을 낮춘 중령 신분을 자처했다. 공산주의에 잠식될 위기에 처한 나라를 건져내는 일이라면 계급 강등은 문제가 아니었다. 르젠 국방차관도 그의 결연한 의지를 존중해, 유엔프랑스군 사령관 겸 유엔프랑스대대의 행정 대대장에 임명했다. 그는 유엔연합군의 이름으로 한국에 파병할 대대 부대를 편성하고 제대별 훈련을 마친 후, 1950년 10월 25일 마르세이유 항을 출항한다. 36일이 지나서 11월 29일 부산항에 도착한 장군은 당시 나이가 58세였다.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남한강변 자전거 도로에서 3,421미터 도로의 길이는 평화 수호를 위해 찾아온 용사들의 인원 수를 상징하며, 도로명은 당시 프랑스대대를 지휘한 전쟁 영웅 몽클라르 장군을 가리킨다. 사진 국가보훈부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남한강변 자전거 도로에서 3,421미터 도로의 길이는 평화 수호를 위해 찾아온 용사들의 인원 수를 상징하며, 도로명은 당시 프랑스대대를 지휘한 전쟁 영웅 몽클라르 장군을 가리킨다. 사진 국가보훈부

한국에 도착했을 때 그의 눈앞에 펼쳐진 상황들

크리스마스를 앞둔 저녁, 그는 다음 달에 첫 생일을 맞는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아들아. 언젠가 너는 내가 (한국전쟁에) 가야 했던 이유를 물을 것이다. … 아버지는 너같이 어린 한국의 아이들이 이 땅의 길에서, 물 속에서, 진흙 속에서, 눈 속에서 헤매지 않게 하려고 여기에 왔단다.”

그는 한국 땅에 도착해 가슴 저리는 현장들을 목도했을 것이다. 추운 겨울에 부모를 잃고 길에서 헤매는 아이들, 피란길에 강물에 빠진 아이들, 살기 위해 진흙과 눈 속을 마다 않고 달려야 했던 헐벗고 배고픈 아이들…. 이들이 좀 더 안전한 땅에 살 수 있도록, 그는 자유를 짓밟고 평화를 허무는 공산주의자들을 저지하는 일에 머뭇거릴 수 없었다.

당시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크리스마스 때까지(전쟁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발표할 만큼 아군의 승리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1950년 10월, 예상치 못한 변수가 등장했다. 30만 명이 넘는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 전쟁에 개입한 것이다. 인해전술에 점점 밀려 이듬해 1월 4일엔 수도 서울이 적군에게 함락되었다. 중공군의 3차 공세 때까지도 우리는 번번히 지고 있었다. 이에 새로 부임한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이 반격을 위해 위력수색(威力搜索 : 일부러 적을 위협해 적군의 역량, 구성, 배치 상태를 알아내는 것) 작전을 개시하였다. 마오쩌둥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완전한 승리에 쐐기를 박기 위해 중공군 4차 공세를 명령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불리한 상황을 바꿔줄 유일한 돌파구가 지평리의 선점이었다. 동서로는 철로, 남북으로 도로가 지나가는 보급로이자 교통의 요충지인 이곳을 먼저 확보하면 서울 탈환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1951년 2월 3일 지평리로 향한 5,600명의 유엔군. 여기에는 며칠 전 쌍굴 전투에서 “까마롱, 까마롱”(프랑스 외인부대가 멕시코 까마롱 전투에서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워서 이긴 불굴의 전투)을 외치며 중공군을 무찌르고 고지를 되찾은 프랑스군과 지휘관 몽클라르 대대장이 미23연대 소속으로 합류해 있었다.

지평리 전투 후 훈장을 받는 프랑스대대. 도열한 사람들 맨 왼쪽에 몽클라르 장군이 서 있다. 사진 지평의병 지평리전투기념관
지평리 전투 후 훈장을 받는 프랑스대대. 도열한 사람들 맨 왼쪽에 몽클라르 장군이 서 있다. 사진 지평의병 지평리전투기념관
6.25 전쟁에 참전한 프랑스 군인들이 밝게 웃고 있다. 사진 지평의병 지평리전투기념관
6.25 전쟁에 참전한 프랑스 군인들이 밝게 웃고 있다. 사진 지평의병 지평리전투기념관

지평리 유엔군을 섬멸하려는 중공군과 맞선 프랑스군

양평군 지평리는 높고 낮은 고지들이 어깨동무하듯 이어져 있는 분지라서 선점한 유엔군은 원형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이들은 이곳에서 서울 탈환 후 전세를 역전시킬 전투를 준비 중이었다. 이에 질세라, 2월 13일엔 약 5만 명의 중공군도 도착해 진지를 포위한다. “지평리 미23연대를 섬멸하라!” 중공군에게 하달된 명령이었다.

지평리 도착 당일, 중공군이 공격을 개시했다. 그날은 음력으로 일 년 중 가장 춥고 밤이 긴 동지섣달 그믐날이었다. 해가 떨어지자 시퍼렇게 홉뜬 달빛과 매섭게 몰아치는 삭풍이 무슨 일이 생길 듯한 징조를 전해주고 있었다.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해 유엔군은 진지 둘레에 철조망을 두르고 포와 기관총을 배치한 뒤, 참호를 더 깊게 팠다. 산으로 둘러싸인 삼면에 미군이 자리를 잡고, 프랑스대대는 분지 입구인 서쪽에 배치되었다. 그쪽은 적군과 전투가 벌어지면 최전방의 총알받이 위치였다. 몽클라르 대대장은 베레모에 붉은색 머플러를 하고 참호를 순시하며 다녔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나지막이 명령했다.

“적들이 20야드 앞으로 접근해오기까지, 나는 어떤 명령도 하지 않는다. 너희들은 그때까지 쥐죽은 듯 참호를 지켜야 한다.”

전선은 태풍의 눈처럼 고요했고, 영하 20도를 밑도는 추위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어둠을 타고 멀리서 피리, 나팔, 북, 꽹과리가 엉켜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가까워질수록 위협적인 소음으로 변했다. 거기에 벌떼 같은 중공군의 군화 소리까지 뒤섞여 묘한 공포감을 조장했다. 그렇지만 프랑스군은 참호 속에 잠복해 대대장의 지시만 기다렸다. 드디어 마지노선 20야드(약 18미터) 가까이에 적군이 접근해왔다. 그 순간, 정적을 가르는 몽클라르 대대장의 우렁찬 목소리.

“일제 사격! 전 대원은 공격 앞으로!!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두 쏘아 죽여라!”

뒤이어 “웨에에에앵!! 웨에엥~” 고막이 찢어지는 사이렌 소리가 울려댔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수동식 기계의 파열음에 이번에는 중공군이 기절초풍했다. 그들의 피리 소리가 사그러드는 순간, 밤하늘에 조명탄이 터지면서 사방이 환해졌다. 참호 코앞까지 와 있던 중공군의 식겁한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를 놓칠세라 소총을 쏘아대던 프랑스 군인들이 참호 속에서 뛰어나와 대검을 들이댔고, 백병전으로 맞붙은 프랑스군은 혼비백산한 중공군들을 볼링 핀 넘어뜨리듯이 쓰러뜨렸다. “돌격 앞으로!”를 외치는 대대장의 명령에 프랑스군의 기세는 검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중공군은 어둠 속으로 도망치는 병사보다 전사, 전상하는 숫자가 훨씬 많았다. 중공군에 완전히 포위되어 있던 유엔군은 프랑스군의 용맹과 지혜로 지평리 전투의 첫날 밤을 승리로 장식할 수 있었다. 그 기세가 계속되어 포위 3일째인 2월 16일에 지원군인 미국의 크롬베즈 전차부대가 도착했고, 화력 무기가 취약한 중공군은 큰 피해만 입고 퇴각했다.

몽클라르 장군에게 국가보훈부가 헌정한 등채. 참전을 위해 그가 포기했던 별 4개를 새겨 넣었다. 등채는 조선시대 무관이 업무를 볼 때 손에 들고 사용하던 지휘봉이다. 사진 국가보훈부
몽클라르 장군에게 국가보훈부가 헌정한 등채. 참전을 위해 그가 포기했던 별 4개를 새겨 넣었다. 등채는 조선시대 무관이 업무를 볼 때 손에 들고 사용하던 지휘봉이다. 사진 국가보훈부
지평리 전투 후에 유엔군 총 사령관 맥아더 원수(사진 맨 오른쪽)와 만난 몽클라르 장군. 사진 지평리를 사랑하는 모임
지평리 전투 후에 유엔군 총 사령관 맥아더 원수(사진 맨 오른쪽)와 만난 몽클라르 장군. 사진 지평리를 사랑하는 모임

전세를 바꾸고 군인의 사기를 끌어올린 지평리 전투

유엔군의 10배가 넘는 중공군에 맞서 승리를 거둔 지평리 전투는 6.25 전쟁의 방향을 바꿨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첫째, 중공군의 개입 후 유엔군이 처음으로 승전보를 울린 전투라는 점, 둘째는 지평리 전투의 승리로 우리가 한강 이북으로 다시 진출할 수 있었고 잃었던 38도선도 되찾게 된 점, 세 번째는 중공군의 4차 공격을 막아내고 유엔군의 저하된 사기를 끌어올렸다는 점이다. 지평리 전투로 전세를 만회한 유엔군은 다음 달인 1951년 3월 14일에 대한민국의 심장인 서울을 다시 탈환할 수 있었다.

한편, 조용히 그러면서 단호히 부대를 이끌던 몽클라르 장군은 1951년 11월 28일로 1년간의 한국 파병 임무를 마치고 귀국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52년 프랑스 육군 중장으로 정년 퇴역해 40년 간의 군복무를 마감했다. 그 기간에 18종의 프랑스 훈포장을 41회 수상했고, 외국에서 수여받은 훈포장도 17종에 달한다. 지략이 뛰어나고 부하를 다스리는 리더십도 남달랐던 몽클라르 장군은 이미 1, 2차 세계대전에서 전쟁 영웅이라는 명성을 얻었기에 본국에 남아 있으면 평안한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게다가 평생 전쟁터에서 살던 그가 뒤늦게 가정을 이뤄 가장의 역할을 재미나게 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불의한 힘에 의해 자유와 평화를 잃어버리게 된 한국인들을 그는 모르는 척할 수 없었다. 보장된 노후를 뒤로 하고 그는 부산행 배에 올랐던 것이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 찍은 몽클라르 장군의 가족사진. 장군 옆에 둘째를 임신 중인 아내가 품 안에 장남을 안고 있다. 사진 지평리를 사랑하는 모임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 찍은 몽클라르 장군의 가족사진. 장군 옆에 둘째를 임신 중인 아내가 품 안에 장남을 안고 있다. 사진 지평리를 사랑하는 모임
위 가족사진 속의 아들 롤랑 몽클라르 씨가 중년이 되었다. 아버지 탄생 130주년이었던 지난해에 국가보훈부 초청을 받아 한국을 방문했다. 행사에서 박민식 보훈부 장관과 함께. 사진 국가보훈부
위 가족사진 속의 아들 롤랑 몽클라르 씨가 중년이 되었다. 아버지 탄생 130주년이었던 지난해에 국가보훈부 초청을 받아 한국을 방문했다. 행사에서 박민식 보훈부 장관과 함께. 사진 국가보훈부

지금 우리가 밟고 있는 땅엔 보이지 않는 흔적들이 있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 물러서지 않고, 자유를 얻기 위해 고통도 견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사건들과 개인적 사연들이 땅 속에 겹겹이 쌓여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발전하는 데에는 몽클라르 장군과 같은 외국 용사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어서 가능했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의 내가 만들어진 배후도 찾아보면 누군가의 헌신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 만들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다. 반드시 누군가의 도움을 입는다.

가을 깊은 어느 날, 지평리에 갈 일이 생긴다면 ‘몽클라르의 길’을 들러 보자. 그 위에서 장군의 심정을 느껴보고, 또 장군처럼 자신의 젊음을 기꺼이 희사했으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무명용사들의 희생정신도 헤아려 보자. 오늘 하루가 어제보다 더 고맙고 감사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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