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이 상실된 시대

아는 밥집이 곧 문을 닫는다고 해서 일부러 들렀다. 고흥 앞 바다가 고향인 주인 부부가 한 상 차려오며 말한다.

“이건 살이 한창 오른 삼치로 묵은지 찜을 한 거고, 요건 봄에 지리산 취나물을 말렸다가 들기름에 무친 거고요. 저건 갯바위에서 딴 고동을 삶아 알맹이로만 초무침을 한 거예요. 제가 담근 된장으로 끓인 찌개도 맛보세요.”

이 반찬들이 그릇에 담기기까지 자연이 키운 시간과 사람이 들인 정성을 헤아리면 입에 넣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우리의 전통 식재료는 때를 기다려야 밥상에 오를 자격이 주어지는 것 같다. 식당 주인에게 왜 그만두냐고 물었다. 요즘은 제철 음식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적고 냉동식품과 인스턴트 조리법에 입맛이 길들여져서, 만드는 보람은 줄고 식당 적자는 늘고 있다고 했다. 그날 밥상을 끝으로, 주인의 푸근한 손맛은 나의 기억 속에만 남게 되었다.

예전에는 기다리는 일이 일상이었다. 아침에 오는 신문을,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답장을, 과일이 익고, 담근 장이 발효되기를 마냥 기다렸다. 때로는 떠난 사람도 언젠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런데 세상이 달라졌다. 식당 손님만 제철이 오기까지 못 기다리는 게 아니다. 예비 부모들도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가슴 졸이며 기다리지 못한다. 초음파로 미리 아이 성별을 알아내 필요한 물품도 장만해둔다.

기다림이 사라진 세상이 오기까지 스마트폰의 공헌이 컸다. 최재붕 교수가 명명한 ‘포노 사피엔스’(디지털 문명을 이용하는 신인류)의 출현이 우리 삶의 방식을 바꾸어 놓았고, 현대 문명의 이기利器는 갈수록 우리를 기다림의 반대쪽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인간의 욕구와 만족 사이의 간극을 좁히려는 시도는 더 강렬해져, 실시간 결제와 새벽 배송 등 ‘즉각 처리’가 가능해졌다. 따라서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또 기다릴 수도 없는 사회로 변했다.

그럼에도 기다림을 선택하는 사람들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망부석’ 설화는 외지로 떠난 남편을 아내가 산마루턱에서 간절히 기다리다 만나지 못한 채 돌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런 기다림을, 마법에 걸린 듯 지금도 즐거이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조바심이나 성급함, 산만함과 지루함, 안절부절과 오락가락한 상황을 가까이 두지 않는다. ‘기다림’으로 자기가 얻을 결과부터 챙기는 생각을 보류하고,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가 자신에게 오기를 고대한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동안 이들은 상대방과 관련된 섭섭한 추억이나 아픈 기억을 들춰내지 않는다. 지나간 과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며, 당장 보이지는 않아도 장차 올 것을 믿는 희망의 기다림이기 때문이다.

‘망부석’의 아내는 남편이 오지 않는다고 돌아가거나 찾아나서지 않았다. 기다리는 대상에 신뢰와 사랑이 있을 때, 상대방보다 자신이 부족한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그런 태도가 나오는 법이다. 엽렵하고 재치 있는 사람들 눈엔 돌덩이가 될 때까지 지키고 선 아내가 답답해 보인다. 그러나 한번 기다림을 선택한 사람은 불편하더라도 자리를 쉽게 옮기지 않고, 자신의 선택을 쉽게 뒤집지도 않는다. 이것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관계를 끌고가려는 이기적 본능을 봉쇄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난 기다릴 만큼 기다렸어’, ‘이젠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하면서 한계를 정하지 않을 때 진정한 기다림이 시작된다. 유익한 정보나 보상이 있을지 아무것도 따지지 않는 상태에서 기다림을 향해 마음을 열 때, 그 안에 행복과 감사가 들어 있다. 그것을 조금씩 발견하고 경험하는 사람은 기다림을 ‘인생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정말 행복하고 싶다면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기다림은 쓸데없는 시간이 아니다.

황동규 시인이 스무 살 때 발표한 ‘즐거운 편지’라는 시가 있다. 그중에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사람 사이의 사랑이 쉽게 깨지고 자주 틀어지는 걸 알기에, 시인은 변치 않는 기다림의 자세로 사랑이 승화되길 바랐다. 지금은 긴 기다림이 필요 없는 시대이다. 하지만 기다림 속에서 행복을 발견해 노래하길 바란다. 즐겁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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