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 공부를 하는 동안에는 오전 공부를 마치고 점심에 시간이 남으면 습관적으로 고시촌에 있는 서점에 갔다. 고시생들에게 가장 유명한 월간 잡지 두 종이 있었고, 거기에는 매달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분의 글 한 편과 특이한 과정을 통해 합격한 분의 글 한 편이 각각 실려 있었다. 합격기의 제목과 내용도 여러 가지였다. 마치 전장에서 목숨을 바치고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말할 법한 ‘제 힘을 다하였나이다’, 학교 급훈으로 자주 봤던 ‘하면 되고 안하면 안된다’, 남이 한 고생에 비하면 자신은 별 것 아니라는 식의 ‘남은 나보다 더 심하다’,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는 ‘푸른 바람이고 싶었다’도 있었다. 한편 철학적으로 보이는 ‘자기 확인의 벽’이나 ‘행운은 노력하는 자에게 온다’ 같은 맞는 말이어도 독자를 조금 열 받게 하는 제목들도 있었다.

고시 인생이 다 달라서 합격기 내용은 재미있었으나 내가 찾고자 했던 것은 제대로 된 공부 방법이었다. 나에게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은 다른 사람의 우수한, 또는 기구한 인생 이야기보다 어떻게 하면 실수를 줄여 공부할 수 있는가의 길이었다. 고시 공부라는 것이 한두 번만 실패해도 금방 5년, 10년이 지나가 버리기 때문에 초반에 요령을 피웠다가는 낭패를 볼 게 뻔했기 때문이다. 7월에 신림동 고시촌에 올라 가면서 다음 해 2월에 있을 시험에 붙지 않으면 미련 없이 진로를 바꾸리라 마음을 먹었기에 공부의 왕도王道만 찾으면 그 길을 따라 가겠다고 생각했다. 몸이 고되고 삶의 여유가 없는 것은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합격기에 공부의 왕도가 있으리라 기대하였지만, 누구라도 따라 하면 합격할 수 있는 그런 공부 방법은 없었다. 오히려 하나 같이 ‘공부에는 왕도가 없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다. 우리가 걷는 길도 지름길이 있고, 운동을 할 때에도 올바른 방법이 있는데, 공부라고 해서 왕도가 없을 리가 없다. 공부 방법을 정확하게 말해 주는 글은 없었지만, 합격기를 보면서 개인의 특징, 운이 따랐거나 과장된 부분들을 하나씩 걸러내 보았다. 그러니 제대로 된 공부 방법이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고, 1차 시험을 준비하면서 나는 몇 달 남지 않은 기간 동안 그 방법을 믿고 그 대로 공부를 해나갔다.

나는 공부의 세 가지 원칙을 정했다. 짧은 기간이지만 최대한 책을 많이 볼 것, 요약본이나 정리 위주의 책보다 내용이 풍부하고 두꺼운 책을 볼 것, 자신의 바닥을 들여다 봐야 하는 고통이 따르겠지만 틈만 나면 모의시험을 볼 것. 어떻게 짧은 시간 안에 이걸 다 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이게 가장 시간을 줄이는 방법이다. 합격할 수 있는 책을 봐야 하는 것이지, 자신이 보기에 좋은 책을 보는 것은 시험과는 거리가 멀다. 모든 것을 시험에 맞추어서 그 시험에 합격할 수 있는 분량을 공부하지 않으면 시험 때마다 자신에게 잘 오지 않는 ‘운’에만 맡겨야 한다.

원칙을 정하니 공부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수험생들에게는 간단명료하게 잘 요약된 책이 매혹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요약된 것은 모두 암기를 해야 하고, 그것은 이해를 위한 풍부한 내용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 암기만으로 시험에 합격할 수는 없다. 남이 정리한 것은 스스로의 사고과정이 생략되기 때문에 나만의 요약이 있으려면 ‘요약을 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어머니를 ‘여자, 출산, 자녀, 아버지의 아내, 나중 할머니 됨’으로 무작정 외우는 것과 같다. 두꺼운 책에 담겨 있는 풍부한 내용은 ‘쓸데없는’ 소리가 아니다. 학설의 결론이 어떻게 도출되고, 변화되고, 서로 대립되었는지를 말하려면 철학과 역사적인 면을 곁들여야 하고, 그런 내용은 한두 번만 보면 아주 쉽게 이해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머리 안에 자리를 잡게 된다. 내용이 풍부한 책을 여러 번 보다 보면 많은 양을 빨리 습득하게 된다. 마지막으로는 자신이 한 공부를 수시로 모의고사 등을 통하여 ‘평가’를 한다. 그래야 내가 제대로 공부하고 있는지를 체크할 수 있고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 게 된다.

세 가지 원칙이 흔들릴 때도 있었지만 수험생활 내내 지켜나갔다. 삶도 비슷하다. 많이 보고, 많이 듣고, 자주 이야기하고 충분히 생각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평가를 한 후 자신의 모습을 고쳐나가야 한다. 적게 공부해서 합격하는 사람, 적게 일해서 성공하는 사람은 그 자신에게는 행운이지만, 이런 사람을 롤모델로 삼았다가는 -이런 표현을 해서 죄송하지만- 공부 기간이 정말 길어지고 패가망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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