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때 들었던 강연 중 아직도 기억에 크게 남아 있는 것이 있다.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 진로 선택을 위해 ‘내 적성은 무엇일까?’를 치열하게 고민하던 나는 도움이 될 듯한 강연들을 열심히 찾아다녔다. 당시 국내 최초로 인터넷 쇼핑몰을 창업해 폭발적인 성장을 해온 기업 대표가 진로와 적성에 대해 강연한다는 소식에 기대를 가지고 참석했다. 어떻게 자신의 적성을 발견하고 잘 맞는 진로를 선택했는지 비법을 듣고 싶었다. 그날 강연의 핵심은 이랬다.

진로를 어떻게 선택했는지의 질문에는 “어쩌다 보니 이 분야로 발을 들이게 됐고, 또 어쩌다 보니 기회를 만났고, 계속 하다보니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가 답변이었고, 내가 가장 궁금해했던 ‘적성’에 대해서는 “이 일이 제 적성에 잘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오래 하다 보면 적성이 됩니다.”라는 말로 마무리했다. ‘너의 적성은 이거야! 그러니까 이런 길로 가면 돼!’라는 정답지를 찾고 있던 나로서는 그다지 명쾌한 결론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메시지는 되새길수록 점점 나에게 큰 위로가 됐고, 오랫동안 나를 짓누르던 ‘적성’에 대한 고민과 멀어지게 해주었다. ‘일단 해보자’는 용기를 준 것이다.

사진 프리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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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업무를 통해 나를 이해하다

그후 나는 취업을 했고 현재 8년차 직장인이다. 회사생활을 하는 동안 나의 적성(어떤 일에 알맞은 성질이나 적응 능력)이라는 특정 주제에 몰두하기보다는 좀 더 다양한 생각을 했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인식을 정리해갔다. 주로 어떤 성격인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 남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지 등에 대한 것들 말이다.

나는 취향이 확고한 편이 아니라, 반드시 하고 싶은 일이나 너무 좋아서 빠져드는 분야가 분명하지 않다. 그래선지 좋고 싫은 구분이 명확해 무엇이든 판단이 빠르고 결정을 잘 내리는 사람이 부러운 적도 많다. 반면에 이런 밋밋한 성향 덕분(?)에 주변의 제안에 귀를 기울일 때가 많았고 주어진 기회를 종종 따라갈 때도 있었다. 직장생활 역시 동일한 방식으로 흘러왔고 의외의 기회에서 얻는 배움이 많았다. 회사에서 만나는 다양한 업무와 인간관계를 통해 내가 가진 강점과 약점을 알게 됐고 앞으로 어떤 가치에 무게를 두고 살고 싶은지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경력이 쌓이면서 다시 마주한 적성 문제

배움도 좋고 나를 알아가는 것도 좋지만, 결국 나는 피해갈 수 없는 주제인 ‘적성’과 마주하는 순간을 다시 만나고야 말았다. 모든 직업이 그렇듯 내가 하는 업무에는 즐겁고 보람된 일도 있지만 부담스럽고 피곤한 일도 있는데 후자로 인해 신경을 많이 쓰던 시기였다. ‘이 일이 나한테 맞나?’라는 생각이 발전되어 ‘역시 내 적성은 아닌 것 같은데 이 일 계속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답답한 마음에 나는 직장생활 첫 사수였던 선배에게 연락을 했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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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는 나보다 경력도 훨씬 많고 노련하게 일을 잘하는 분이라 나는 늘 이 직무에 적격인 분(적성이 잘 맞는 분)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선배는 “나도 그런 상황은 어렵다. 지금도 가끔 멍하니 누워 있다 잠들곤 한다.”는 의외의 이야기를 했다. 그럼에도 지치지 않고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본인이 선택해 온 방식을 알려주며 “네 적성이랑 잘 맞다. 잘 하고 있고 앞으로 더 잘 할 거다.”라는 응원을 해주었다.

선배와 나는 고민의 지점이 달랐다. 선배는 이 일이 자신에게 맞냐 안 맞냐를 고민하지 않았다. 선배는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이런 어려움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이를 극복하고 계속 해나갈 수 있지?’를 고민했고 여러 방법을 찾아가면서 그 일을 했다. 하다보니 어느 순간 선배의 적성이 된 것이었다. 오래 전 특강에서 들었던 ‘적성의 비밀’이 다시 떠올랐다. 어느 직업이든 어떤 업무든, 애초에 100% 딱 맞는 적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내 앞에 주어진 일을 ‘나의 일’로 받아들이고 온전히 끌어안는 정직한 마음이 필요할 뿐이었다.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나의 적성을 의심하는 순간이 온다. 적성에 대한 고민이라면 어디서도 꿀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으로서 감히 말하고 싶다. “적성에 너무 목매지 않아도 된다”고. 적성에 맞는 일을 해서 지금 당장 즐겁고 수월한가보다는, 내 앞에 주어진 기회를 나를 위한 자리로 만들어 가는 태도가 훨씬 멋지다. 일이 힘들다고 느낄 때마다 ‘적성’의 탈을 쓴 시커먼 의문은 우리를 찾아오겠지만, 이 비밀을 안다면 어느 곳에서든 최고의 적임자가 될 수 있다. 회사는 단순히 ‘직무’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곳이기에, 지금 내게 주어진 소중한 자리를 적당히 지나치지 말자. 진로를 고민하는 누군가에게 같은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대학시절 들었던 특강의 내용을 조금 각색해 본다. “적성이 아니라 기회에 집중하세요. 재지 않고 끌어안으면 내 것이 됩니다.”

글쓴이 조민지

90년대생 8년차 기업 커뮤니케이터. 서울대 언론정보학과에서 공부하고 L사, C사에서 실무를 배웠으며 현재 H사 기업 커뮤니케이션 전략가로 활동하고 있다. 기업과 개인 구성원 간의 ‘더 좋은 커뮤니케이션’이란 무엇인지 고민하고 답을 찾으면서 그는 배우는 설렘과 소통하는 기쁨을 쌓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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