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로 온 호모 헐버트 박사

한국인보다 한글을 더 사랑했던 외국인이 있다. 미국에서 온 선교사 호모 헐버트 박사이다. 그는 한국인들보다 먼저 한글의 가치에 눈을 떴다. 그는 한글과 세종대왕에 대해서 연구했고, 띄어쓰기와 문장 부호를 도입하여 더 읽고 쓰기 쉽게 한글 체계를 정리했다. 분명히 푸른 눈을 가진 외국인이지만, 요즘엔 한국사 검증 시험 문제에도 출제될 만큼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자 은인이 됐다. 또한 그는 미국 곳곳을 다니며 평생 한글을 알린 최초의 한글 홍보대사이기도 했다.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1863~1949) 선교사 모습. 사진 제공 위키피디아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1863~1949) 선교사 모습. 사진 제공 위키피디아

한국 근대문명의 선구자가 될 운명

“문자의 단순성과 소리를 표현하는 방식의 일관성에서 한국의 소리글자와 견줄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한국사》 중 세종 편에서

헐버트 선교사는 미국 명문가의 자제였다. 그의 아버지는 버몬트 주 미틀베리 칼리지의 총장이었고, 어머니는 다트머스 대학 설립자의 증손녀였다. 그는 1886년 유니온 신학대학교 2학년 재학 중에 고종이 설립한 조선 최초의 공립학교인 육영공원의 영어교사를 자원하여 한반도 땅을 밟았다.

당시 조선은 고종 23년으로, 갑신정변이 일어난 지 2년 후였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에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열강들이 제국주의의 야망을 품고 간섭을 시작했다. 그가 오기 바로 이전 해는 영국이 전라남도 거문도를 불법 점거한 ‘거문도 점령사건’이 있었고, 이듬해에는 천주교 박해로 마찰을 빚던 프랑스가 조선과 수교를 맺고 통상을 하기 위해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이뤄졌다.

헐버트는 한국에 오자마자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 힘들어하며 귀국을 생각했다. 하지만 곧 한글과 운명 같은 사랑에 빠진다. 금발의 서양인이 ‘똑똑한 자는 아침나절이면 익히고, 어리석은 자는 10일이면 익힐 수 있는’ 한글의 우수성에 반한 것이다. 그리고 한글을 배운 지 4일 만에 그는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훌륭한 문자를 만들어낸 민족이라면 앞으로 충분히 발전할 수 있어!”

그는 한글에서 조선의 가능성을 엿보고 밝은 소망을 품었다.

한글로 만든 최초의 지리 교과서《사민필지》 사진제공 헐버트박사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한글로 만든 최초의 지리 교과서《사민필지》 사진제공 헐버트박사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한글을 현대화시키다

“조선 언문이 중국 글자에 비하여 크게 요긴하건마는 사람들이 요긴 한 줄도 알지 아니하고, 오히려 업신여기니 어찌 안타깝지 아니하리오. 이러므로 한 외국인이 조선말과 언문법에 익숙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잊어버리고 특별히 언문으로서 천하각국 지도와 목견한 풍기를 대강 기록한다.” -《사민필지》 서문 중에서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고 반포했다면, 헐버트 박사는 한글을 현대화시키고 보급에 앞장선 사람이었다. 그는 한국인보다 한글의 가치를 더 잘 알았다. 그래서 세종대왕과 한글의 우수성을 학술적으로 파헤쳤다. 동대문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하며 배재학당과 관립중학교(현 경기고) 등에서 학생들에게 세계 역사와 지리 등을 가르치면서도 늘 한글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한글이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글자라는 점과,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다는 점, 최대한 단순하면서도 광범위한 표음 능력을 지닌 점을 높이 평가했다. 그의 저서 《조선의 혼을 깨우다》에는 세종대왕을 존경했던 마음을 아래와 같이 곳곳에 드러내고 있다.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하지 않고 요동의 중국인 학자에게 열세 번이나 사람을 보내 비판과 조언을 구한 세종은 모든 위인들의 특징인 겸손함을 지녔음에 주목하라. 또한 백성들의 관습을 배려하고, 백성에게 익숙한 한자 필법에서 최대한 적게 벗어나게 하기 위해 음소를 삼각 구조로 배열하여 음절을 이루게 할 만큼, 탁월한 실용성을 지녔음에 주목하라. 이러한 점에서 세종은 참 독창적인 인물이었다.”

한편 헐버트 박사는 우리나라에 띄어쓰기와 문장 부호를 최초로 도입한 인물이다. 본인이 한국어를 배우던 중 표기된 부호와 소리 나는 부호가 서로 다름을 알고, 띄어쓰기와 쉼표, 마침표 등을 사용해서 의사전달에 용이하도록 기록했던 것이 그 시초였다. 한편 독립신문을 창간했던 배재학당의 제자 서재필에게 다른 제자였던 주시경을 추천해서 신문을 같이 만들도록 이끌며 이러한 문장 법칙이 독립신문에도 반영되도록 했다. 그리고 인쇄시설을 제공하고 독립신문의 영문판을 창간하는 등 그는 물심양면으로 함께했다.

1896년 1월에 월간《조선소식》에서 점찍기와 띄어쓰기를 시도해 보라고권유하고 있다.
1896년 1월에 월간《조선소식》에서 점찍기와 띄어쓰기를 시도해 보라고권유하고 있다.

한글 보급과 홍보에 본보기가 되다

“세계 200여 개의 문자와 비교해 봐도 조선의 글씨와 견줄 문자는 없다. 한글은 배운 지 나흘이면 어떤 책도 읽을 수 있다.” - 헐버트 박사의 회고록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 중에서

그는 한국어를 터득한 지 3년 만에 《사민필지》(1891년 1판본, 1896년 2판본)라는 한글판 교과서를 출판했다. 이는 ‘서민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알아야 한다.’라는 뜻으로 천연색 세계지도가 아홉 장이나 들어간 최초의 순우리말 세계 지리서이다. 조선 어린이들의 수준에 맞춰서 우리나라의 전래동화집 《마법사 엄지》도 출간했다. 여기에는 마법사인 엄지가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흥부놀부’, ‘콩쥐팥쥐’ 등 10편의 전래동화가 실렸다.

대외적으로는 미국 《타임스》와 AP 통신의 객원 특파원, 삼문 출판사의 책임자 등을 역임하며 한국의 소식을 매번 세계에 알렸다. 특히 미국 연례 보고서에는 《조선 글자》라는 학술 논문으로 한글의 기원과 우수성을 발표했다. 그의 이런 저서는 한문 역사책 《대동기년》(5권, 1903)과 영문으로 된 《한국사》(2권, 대한 제국사), 《대한 제국 멸망사(소멸되는 한국)》(1906), 《한국어와 드라비다어(인도남부, 파키스탄, 스리랑카)의 비교 연구》 등이 있다. 또 개인적으로 조선을 배경으로 《The Face in the Mist : 안갯속의 얼굴》이라는 모험소설도 창작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현재 서울시 합정동의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 안장되어 있다.
그의 유언에 따라 현재 서울시 합정동의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 안장되어 있다.

재미있는 점은 헐버트 박사가 그때까지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아리랑을 지역별로 모아서 서양식 음계로 표기한 후 세계에 소개한 것이다. 영문 월간지 《한국 소식》을 발행하고, 1896년 2월호에 문경 아리랑을 서양 음계로 채보하여 다른 시조, 민요들과 함께 논문으로 써서 발표했다. 이후에도 한국 민요의 악보집을 만들어서 국내에 배포했다. 지금도 문경시에는 그의 초상화와 그가 채굴한 문경아리랑 악보가 기념비로 새겨져 있다.

이런 활동들로 인해 헐버트 박사는 일본에 아주 눈엣가시였다. 그래서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서 강제 퇴위될 때 그 역시 강제 추방이 되어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그는 미국에서도 곳곳을 다니며 강연과 기고, 저서 출간 등 여러 방면으로 한글을 홍보했고, 조선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은 후 일제치하에서 독립된 대한민국 땅을 다시 밟을 수 있었다.

헐버트 선교사가 받은 건국공로 훈장증.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에 함께한 그를 ‘34번째 민족 대표’라고 평가도 한다.
헐버트 선교사가 받은 건국공로 훈장증.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에 함께한 그를 ‘34번째 민족 대표’라고 평가도 한다.
1949년 7월 29일, 그가 인천항에서 부축을 받으며 해방된 대한민국 땅을 밟고 있다.사진 제공 헐버트박사 기념사업회
1949년 7월 29일, 그가 인천항에서 부축을 받으며 해방된 대한민국 땅을 밟고 있다.사진 제공 헐버트박사 기념사업회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한국으로 가는 배를 타는 날, 그는 미국 기자들에게 유언처럼 위와 같은 소회를 남겼다. 하지만 태평양을 건너는 한 달여간 여행의 여독으로 광복절 행사를 열흘 앞둔 8월 5일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장례는 국내 최초로 외국인 사회장으로 거행되었고, 그의 배재학당 재직 시절 제자이기도 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 최고의 건국훈장인 태극장을 사사했다. 이후 김대중 대통령도 1999년에 묘비명을 친필 휘호로 다시 새겼다. 그 외에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2013년), 금관문화훈장 추서(2014년), 서울 아리랑 페스티벌의 제1회 ‘서울 아리랑 상’(2015년)에 추서되었다.

헐버트 박사의 한국 이름은 ‘홀법 할보’이다. 그는 오늘날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대한민국의 은인 중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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