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로 얻은 명성, 현대 미술의 아버지

‘사과’ 때문에 실패한 인생이라는 말을 주변에서 듣던 화가 폴 세잔. 지금은 그의 ‘사과’가 현대미술의 꽃을 피웠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해도 묵묵히 자신만의 보폭으로 ‘사과’를 화폭에 담았던 폴 세잔의 그림을 눈여겨 보자.

‘모자를 쓴 자화상’, 1894년, 캔버스에 오일, 60X49cm, 도쿄 아티존미술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폴 세잔

법학도에서 화가의 길을 선택한 그는 19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프랑스의 화가다. 인상주의의 중심에 서 있었고, 하나의 완성된 그림에서 여러 시점을 동시에 표현하여 입체파의 시작을 열었다. 대담한 색채사용, 혁신적인 원근법 사용, 기하학적인 형태와 명암의 교차에 몰입, 독특한 화면구성이 특징이다.

오곡백과로 풍성한 가을이다. 이번 호에는 사과, 오렌지와 같은 과일로 정물화를 잘 그렸던 화가 폴 세잔 Paul Cezanne(1839~1906)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현대 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사과 하나로 파리Paris를 놀라게 하겠다.”라는 말도 안되는 목표를 세우고, 사과를 그려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과 정물화만 110여 점에 이르는데, 그는 ‘사과’를 그리면서 무엇을 표현하려고 한 것일까?

‘사과와 오렌지’, 1900년, 캔버스에 오일, 73X94cm, 파리 오르세미술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폴 세잔의 말년 대표작 ‘사과와 오렌지’를 보면 여러 형태의 그릇에 담긴 사과, 접혀진 테이블보에 올려진 사과, 옹기종기 모여 있거나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사과, 곧 바닥으로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테이블 끝에 있는 사과가 보인다. 무질서한 배치와 구도는 불안하면서도 묘한 안정감을 준다. 세잔은 집착이라고 할 만큼 사과를 관찰하고 그리기를 반복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사과만 쳐다봤고, 사과가 시들어가는 과정을 관찰하여 화폭에 담았다. 이 작품은 무려 6년에 걸쳐 완성한 것이다.

처음에 나는 이 작품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사과가 예쁘게 그려진 것도 아니고, 먹음직스러워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어떤 사과는 썩은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테이블은 이상하게 삐뚤게 그려졌고, 사과들은 금방 테이블 밑으로 굴러 떨어질 듯이 아슬아슬하다. 잘 그렸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 그림이다.

세잔과 비슷한 소재를 그린 18세기 화가 장-시메옹 샤르댕(1699~1779)의 작품과 비교해 보면 더 확연해진다. 우리에게는 다음 면에 나오는 샤르댕의 그림이 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안정적인 구도와 색, 빛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으며 과일은 탐스럽다. 사물들이 정갈하고 가지런하게 놓여 있어 정물화가 살아 숨 쉬는 듯하다. 반면에 세잔의 정물화는 뭔가 어수선하고 과일의 아름다움과 탐스러움의 표현도 샤르댕의 작품에 비하면 약하다. ‘잘 그렸다’는 말은 샤르댕의 정물화에 더 어울리는 것 같다.

보통 ‘잘 그렸다’는 기준은 무엇인가. ‘사진 같다’고 할 때이다. 사진은 한 렌즈로 하나의 초점, 하나의 각도로 사물을 포착한다. 기존 회화가 가지고 있던 원근법이 그런 방식이다. 정형화된 원근법의 기준에서 보면 세잔의 작품은 뭔가 이상하다.

“같은 소재라도 다른 각도에서 보면 아주 강력하고 흥미진진한 대상이 돼. 그러니 앞으로 몇 달간은 같은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관찰할 거야. 오른쪽에서 보면 전에 못 본 게 나와. 왼쪽으로 보면 또 전에 놓친 게 나오곤 해.” -폴 세잔, 1906년 9월 8일, 아들에게 쓴 편지 중

장-시메옹 샤르댕, ‘포도와 석류’, 1763년, 캔버스에 오일, 47×57㎝, 파리 루브르미술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사과바구니’, 1895년, 캔버스에 오일, 62×79㎝, 시카고미술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그 비밀은 세잔이 하나의 시점이 아닌 다양한 시점으로 사과를 바라보았다는 데 있다.(마치 3D기법처럼 말이다.) 작품 ‘사과와 오렌지’와 ‘사과바구니’를 자세히 보면 어떤 것은 위에서 사과를 본 것 같고, 어떤 건 옆에서 보는 것 같다. 사과를 보는 눈의 높이와 각도가 조금씩 다르다. 다양한 시각에서 사과의 실제 모습에 접근하려는 세잔의 독특한 시도였던 것. 작품 ‘사과와 오렌지’는 무려 6년 동안이나 그렸으니 작품 속 사과는 빨간 윤기가 흐르는 사과부터 푸석해진 사과, 썩기 시작한 사과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사과의 빛깔과 형태가 한 화면에 담겨 있다.

폴 세잔은 전통적인 원근법에서 벗어나 다각도에서 사물이 가진 진짜 형태와 색채, 구조를 바라보려고 했으며 그 다채로움을 한 화폭 안에 동시에 구현하여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는 거의 ‘혁명’으로 받아들여져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열었으며, 앙리 마티스, 파블로 피카소 등 후대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과’와의 인연은 세잔의 청소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839년 프랑스 남부의 아름다운 도시 엑상프로방스에서 태어난 그는 10살이 되던 해에 세인트 조셉 학교에서 그림을 배웠고 14살에 부르봉 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세잔의 인생 대부분을 함께한 친구 에밀 졸라Emile Zola(1840~1902, 소설가)를 만난다. 졸라는 작은 체구에 몸이 약해 늘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았다. 어느 날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그를 세잔이 도와 준 계기로 졸라는 사과를 건네며 고마움을 전했고 둘은 단짝 친구가 된다. 세잔은 선물 받은 사과를 그려 졸라에게 보여주었고 그는 세잔의 그림을 칭찬해 주었다.

‘사과와 프림로즈 단지가 있는 정물’, 1890년, 캔버스에 오일, 58X91cm,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사과와 비스킷’, 1895년, 캔버스에 오일, 65.5X81.5cm, 파리 오랑주리미술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이후 졸라는 파리로 이사를 가고, 세잔은 아버지의 반대로 고향에 남아 법학대학교에 진학했다. 파리에서 꽤 유명한 작가로 자리 잡은 졸라는 세잔에게 계속 편지를 보내 화가가 되기 위해 파리로 오라고 권했다. 어렵게 아버지의 승낙을 받은 세잔은 큰 포부를 갖고 파리로 넘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당대의 벽은 너무나 높았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인상파 화가들이 자연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순간을 표현한 데 반해, 세잔은 변하지 않는 근본적인 것에 관심을 두었다. 그런 그의 눈에 다시 들어온 것이 ‘사과’였다. “나는 사과 하나로 파리를 놀라게 하겠다.”는 선언은 에밀 졸라에게 보낸 편지에 쓴 말이다. ‘사과’로 친구의 연緣을 맺어 화가의 꿈을 꾸게 해 주었던 에밀 졸라에게 세잔은 자신을 향한 변함없는 지지와 격려를 부탁했던 것이리라.

하지만 친하게 지내던 인상주의 화가들은 그의 그림을 보며 ‘미친 화가!’라고 혹평했고, 졸라마저 세잔의 그림에 비난을 가했다. 졸라는 현실 사회의 부조리와 문제점을 생각하지 않고 사물의 근원에 관심을 갖는 세잔을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예술의 순수성과 현실성에 대한 시각 차이로 볼 수 있겠다.)

“세잔은 앞으로 15년간 미술사에서 가장 기억되는 웃음거리로 남을 거야.” -프랑스의 시인‧비평가 카미유 모클레르, 1905년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며 세잔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마음은 상처투성이였지만 그의 작품세계에는 멈춤이 없었다.

세잔이 화가의 꿈을 꾸고 실현할 수 있게 한 매개체 ‘사과’. 그는 사과가 가장 사과다워 보이는 형태와 각도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연구했다. 사과를 사과답게 그리기 위해 수없이 많은 덧칠을 거듭하며 사물의 본질과 근원에 접근하려는 예술혼을 불태웠다. 110여 점의 사과 정물화 속에는 세잔의 고뇌와 집념이 서려 있다.

세잔은 생전에 화가로서 크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 56세가 되어서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개인전을 열었고, 뒤늦게 세잔의 그림에서 미래를 발견한 화가들이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사과가 있는 정물’, 1894년, 캔버스에 오일, 46X55cm, 개인소장. 사진 위키아트
모리스 드니, ‘세잔에게 드리는 경의’, 1900년, 캔버스에 유채, 46.5X55cm, 파리 오르세미술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모리스 드니, ‘세잔에게 드리는 경의’, 1900년, 캔버스에 유채, 46.5X55cm, 파리 오르세미술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나의 유일한 스승 세잔은 우리 모두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파블로 피카소

모리스 드니가 그린 위의 그림은 1895년 세잔 개인전시회를 기념하기 위한 작품이다.

화폭 안의 미술계 인사들은 세잔이 그린 ‘과일그릇과 유리잔과 사과’를 진지한 분위기에서 흥미롭게 감상하고 있다.

세잔의 사후에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고, 그곳을 찾은 파블로 피카소는 세잔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큐비즘’(입체파)을 탄생시켰다. “사과 하나로 파리를 놀라게 하겠다.”는 선언대로 결국 그의 새로운 미술사조는 파리뿐 아니라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세잔이 그린 수백 개의 사과는 전통적인 회화 관습을 깨고 현대 미술의 획기적인 지평을 연 핵심이 되었다.

 ‘과일그릇과 유리잔과 사과’, 1880년, 캔버스에 유채, 49X62cm, 개인소장. 사진 위키아트
 ‘과일그릇과 유리잔과 사과’, 1880년, 캔버스에 유채, 49X62cm, 개인소장. 사진 위키아트
‘일곱 개의 사과가 있는 정물화’, 1878년, 캔버스에 오일, 17X36cm, 케임브리지 피츠윌리엄박물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일곱 개의 사과가 있는 정물화’, 1878년, 캔버스에 오일, 17X36cm, 케임브리지 피츠윌리엄박물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세잔의 사과는 꼭 예쁘지만은 않다. 조금 작은 사과, 약간 벌레 먹은 사과, 아직 덜 익은 사과, 멍이 든 사과…. 생긴 건 제각각이지만 모두 세잔이 사랑했던 사과였다. 세잔 역시 동료가 보기에는 못생긴 사과, 그의 마음은 상처투성이 사과였다. 당대 화가들과 그의 단짝친구마저 세잔의 작품세계를 비난하는 상황에서 그는 슬프지만 묵묵하게 자신만의 보폭을 가지고 붓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마치 이런 사과도 있다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결국 그의 그림은 결실을 맺었다.

세잔의 인생은 한 번이라도 실패하면 주저앉아 버리고,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들면 시도조차 하지 않는 나의 삶과 너무나 다르다. 내가 가진 사과가 조금 썩었다고 해서 쉽게 버릴 것이 아니다. 실패한 인생이라는 낙인에도 묵묵히 자기 길을 갔던 세잔의 삶, 한 점의 정물화를 그리기 위해 6년의 시간을 오롯이 바친 그의 충실함이 내가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지 알려준다.

글쓴이 정유진

충북대학교 미술과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 교육대학원에서 미술과 석사학위를 받았다. 다수의 단체전을 통해 작품 발표를 해왔으며, 길가온 갤러리에서 갤러리스트로 활동했다. 행복한미술심리센터에서 교육 프로그램을 연구했고, 현재 파랑새 인성교육원 대표로서 미술교육에 대해 계속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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