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소통하러 갑니다]

3인의 지도자에게 배우다

사람은 일정한 가치와 세계를 지향한다. 하지만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는 유연성과 소통 능력이 없다면 가치관은 아집我執으로 굳어 다른 의견에 쉽사리 날을 세우게 된다. 국가를 이끄는 리더가 그러하다면 그 칼날은 더욱 날카로울 것이다. 한 시대를 혼란에 빠뜨린 지도자의 불통의 순간을 역사에서 포착해 본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그리스 신화에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이야기가 나온다. 영웅 테세우스가 물리친 악명 높은 도둑 중 하나였던 프로크루스테스는 지나가는 나그네를 붙잡아 자신의 집에 있는 철로 만든 침대에 눕혔다. 나그네의 키가 침대 길이보다 크면 몸을 잘랐고, 나그네의 키가 침대 길이보다 작으면 몸을 늘여서 죽였다. 운 좋게 키가 침대와 딱 맞는 사람만 살 수 있을 터인데 과연 몇이나 그럴 것인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자기 고집대로 하는 횡포, 자기 생각에 다른 사람의 생각을 끼워 맞추려는 독단과 독선, 상대의 존재를 거부하고 묵살하는 불통의 상징적 표현이 됐다.

네로 황제(왼편)와 스승 세네카 동상. 세네카는 올바른 이성과 덕의 정치를 네로에게 당부했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네로 황제(왼편)와 스승 세네카 동상. 세네카는 올바른 이성과 덕의 정치를 네로에게 당부했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스승 세네카를 거부하고 ‘로마의 적’이 되다, 네로 황제

대표적인 ‘프로크루스테스’ 지도자로 손꼽히는 로마제국의 네로 황제(37~68). 흥미로운 점은, 폭군의 대명사였던 그가 집권 후 5년간은 선정善政을 베풀었다는 것이다. 로마의 예술과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소외된 평민과 노예를 위한 정책을 펼쳤다. 그 배경에는 그의 가정교사이자 철학자, 정치가이기도 한 세네카의 공로가 컸다. 세네카는 네로의 통치를 도와 정부를 안정되게 운영하게 했으며 네로의 심성을 염려하여 ‘관용’의 정치를 당부했다.

네로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스승 세네카의 말을 조금씩 거부하면서부터였다. 21살이 된 네로는 자신의 애정사를 간섭한 어머니 아그리피나를 살해하면서 내면의 다른 면모를 드러냈다. 64년 로마 대화재 때, 27세였던 네로는 당시 로마인과 갈등 구조에 있던 기독교를 박해하려고 기독교인들에게 책임을 덮어씌워 십자가에 못 박고 산 채로 짐승의 밥으로 주거나, 불구덩이에 던졌다. 그의 폭정를 저지하고자 많은 이들이 간언諫言하였으나 네로는 독단과 아집의 성채에 틀어박혀 나올 줄 몰랐다. 결국 황제 암살 모의가 있었고 음모가 발각되자 그는 스승 세네카를 의심했다. 세네카에게 자결을 명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네로도 31살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국가의 적敵’이라는 선고를 받아 로마를 탈출한 직후였다.

한때 네로는 선정을 통해 훌륭하고 공정한 정부의 통치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스승 세네카를 거부하고 그 영향권을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프로크루스테스’로 변모해 갔다. 세네카의 조 언이 사라진 네로의 결말은 참혹하기만 했다.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프랑스 대혁명 당시 급진파 지도자. 청렴결백의 화신이자 공포정치의 대명사였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프랑스 대혁명 당시 급진파 지도자. 청렴결백의 화신이자 공포정치의 대명사였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청렴결백함이 양날의 검이 되다,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프랑스 혁명을 이끈 로베스피에르(1758~1794)는 단언할 수 없는 굉장히 다채롭고 복잡한 면모를 지닌 인물이다. 역사상 가장 신비스러운(비밀스러운) 지도자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는 어떤 면에서 보면 상당히 고결하고 의로웠다. 사치와 부패를 멀리한 도덕성의 상징이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재산도 없이 목수의 셋방에서 검소한 생활을 영위했으며 프랑스의 국가수반이 된 뒤에도 관사가 아닌 셋방에서 출퇴근할 정도였다. 설탕을 먹으면 악마의 유혹에 빠진다며 마시는 차에 설탕을 넣지 않는 금욕주의적 태도로도 유명했다. 그의 반대파조차 ‘부패할 수 없는 자’라는 별명을 붙일 정도로 청렴결백을 자처했다.

로베스피에르가 추구한 가치 또한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인민의 자유와 평등이 실천되는 이상사회를 꿈꿨다.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프랑스 혁명이 성공해야 했고, 그는 혁명을 완성시키려 반혁명 세력들을 숙청하는 아이러니한 길을 선택했다. 바로 ‘공포정치’이다.

그는 인간이 가진 ‘공포’의 감정을 이용하여 새 정부의 권위와 힘을 세워갔다. 그의 집권 시기인 1793년부터 1년 동안 체포된 사람만 30만 명, 단두대에서 사형된 사람은 1만 7천여 명에 이른다.

공포정치의 상징인 단두대 처형 장면. 로베스피에르는 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를 포함한 수많은 이들을 단두대에서 처형했으나 본인 역시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한다. 사진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공포정치의 상징인 단두대 처형 장면. 로베스피에르는 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를 포함한 수많은 이들을 단두대에서 처형했으나 본인 역시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한다. 사진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로베스피에르의 고결하고 청렴결백한 눈에 조금이라도 부패해 보이거나 뜻에 어긋나는 사람이 보이면, 같은 혁명 정부 내 인사라도, 자신의 친구라 할지라도 단두대로 보냈다. 독재와 공포정치의 완화를 요구한 동지인 조르주 당통 역시 처형되었다.

1794년 7월에는 증거 없이 오직 혐의만으로도 반혁명 인사들을 처단할 수 있는 법을 제정했다. 사람들은 그를 더욱 혐오하게 됐고 신변의 위협을 느낀 동료들은 그를 경계했다. 결국 로베스피에르는 탄핵을 받아 1794년 7월 28일, 그가 공포한 법에 따라 사실 관계 조사도 없이, 변론의 기회도 없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로베스피에르의 고상한 인격, 이상, 가치관 자체는 훌륭한 것이었지만 마치 양날의 검처럼 자신의 실천을 합리화, 정당화시키는 무기가 되었다. 나만 옳다는 아집으로 상대를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눕혀 조금만이라도 길거나 짧으면 가차 없이 칼날을 휘둘렀다. 인간에 대한 존중 그리고 반대의 의견도 포용하고 함께 끌고 나갈 수 있는 능력이 그에게는 없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스 혁명 시기에 벌어진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 쿠테타를 통해 제1통령이 된 후, 황제에 즉위했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스 혁명 시기에 벌어진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 쿠테타를 통해 제1통령이 된 후, 황제에 즉위했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자아도취로 60만 대군을 잃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스혁명에 뒤이어 나타난 나폴레옹(1769~1821)이 몰락한 계기도 아집과 불통에 있다. 결정적 사건은 러시아 원정이다. 1812년, 프랑스의 황제이자 이탈리아의 왕 그리고 유럽 대륙 절반 이상에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한, 권력의 정점에 있던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침공한다. 그의 패권을 위협하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1세를 물리쳐 유럽 전역을 정복할 야망을 가지고 있던 것.

그는 35번의 전투에서 패배는 단지 3번만 맛본 사람이었다. 계속된 군사적 성공과 추종자들의 칭송은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게 만들었고 냉정한 판단을 흐리게 했다. 거침없고 자신만만한 나폴레옹은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되는 일에 대한 경험 있는 지휘관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경멸했다. 이러한 자아도취는 냉철한 이성과 철저한 준비 없이 무리한 원정길에 나서게 했다.

1812년 6월, 나폴레옹은 60만 명이라는 거대한 군대로 러시아를 제압하고자 나이만 강을 건너 러시아 영토로 진입했다. 러시아군을 압도하고 모스크바까지 진격했지만 모스크바 화재, 물자 부족, 보급의 문제, 매서운 겨울 추위로 프랑스 군대는 심각한 위협에 처했다. 질병, 동상, 기아, 탈주 등으로 군대는 와해됐고 불과 1년 후, 2만 명의 패잔병만이 귀환했다. 무리한 원정의 실패로 나폴레옹은 신용을 상실했고 1814년 프랑스에서 몰락했으며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해 완전히 실각했다.

매서운 추위와 보급 문제 등으로 나폴레옹 군대는 러시아 원정에 실패한다. 사진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매서운 추위와 보급 문제 등으로 나폴레옹 군대는 러시아 원정에 실패한다. 사진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나폴레옹의 행보를 성취를 향한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맞닥뜨리는 시련 정도로 여기는 이도 있을 것이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가 항상 나뉘고 논란이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하지만 지도자는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의 방향성, 뜻을 관철시키는 방법의 정당성을 다각도에서 끊임없이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주변의 직언과 충고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부분이지만 이를 거부한다면 기괴하고 고집스러운 자기 자신만이 남을 뿐이다.

안에서 ‘줄’ 할 때 밖에서 ‘탁’ 해야

우리 삶에는 다양한 자질이 필요하다. 명확한 비전, 도덕적인 모범, 어려운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추진력, 묵직한 책임감…. 이 중에서 시대가 갈수록 가장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공감과 커뮤니케이션, 즉 소통 능력이다. 4차 산업혁명으로 불리는 초연결시대를 사는 오늘은 더욱 그러하다. 더 이상 한 명의 천재의 놀라운 능력이 아닌 다양한 사람들과의 직간접적인 소통을 통해 창출되는 혁신이 더 가치가 있는 세상이 되었다.

소통하는 리더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사자성어를 통해 의미를 되새겼으면 한다. 병아리 부화시기가 되면 알 속의 병아리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사력을 다해 껍질을 쪼아댄다. 병아리가 부리짓을 하는 순간(줄-啐)에 어미 닭은 그 신호를 알아차려서 밖에서 알껍질을 쪼아(탁-啄) 생명 탄생을 돕는다. 안에서 쪼는 ‘줄’과 밖에서 쪼아주는 ‘탁’이 동시에 일어나야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다.

리더는 구성원들이 보내오는 신호와 의견을 주의 깊게 살피고, 그것에 적절히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 나와 다른 상대의 음성을 경청하고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길 바란다. 이것은 지도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누군가가 ‘줄’ 할 때, 모른 척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반응할 수 있는 ‘탁’의 마음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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