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광장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의 모습은 한 손에는 책을 들고 다른 한 손은 백성들을 다독이는 듯한 모습이다. 사진출처 문화체육관광부 홈페이지
서울 광화문광장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의 모습은 한 손에는 책을 들고 다른 한 손은 백성들을 다독이는 듯한 모습이다. 사진출처 문화체육관광부 홈페이지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

세종대왕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나라의 근본이 백성에게 있음을 알던 세종은 아버지인 태종이 훈구 세력과 외척을 물리치고 다져놓은 왕권 위에서 자신이 해나가야 할 시대의 과제를 면밀히 파악하고 있었다. 왕좌에 있었던 32년간 학문, 제도, 국방, 과학 등 국가 전반에 다양한 분야로 민본주의의 기틀을 만들었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품은 ‘애민정신의 절정’을 보여준다.

인권 존중과 복지정책으로 시대를 앞서가다

세종대왕은 역사적으로 보기 드물게 생각이 깨어 있는 지도자였다. 그는 세속적인 추앙을 받고 싶지 않았다. 사대주의를 중시하는 관료들과 마찰을 빚더라도 백성들의 어려운 삶을 직시하려고 했다. 그래서 백성의 눈높이에 맞춰 실용적인 정책들을 과감히 추진했다.

한 예로, 관노비가 아이를 낳으면, 산모와 남편에게 각각 100일과 30일간 세종대왕이 출산휴가를 준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신분제 사회에서도 노비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주인을 처벌했다. 출신에 관계없이 80세가 넘은 노인들을 위해서는 ‘양로연’ 잔치를 열었고, 90세가 넘은 노비에게는 장수의 의미로 쌀을 제공했다. 특히 장애를 가진 이들이 사회에서 차별받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장애인 단체에 노비와 쌀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장애인들의 직업훈련을 활성화시켰다. 이에 천민 출신이라도 시각장애인이 악기를 다룰 줄 알면 시험을 통해서 음악 관련한 직종에 채용하도록 했다. 또한 부모 없는 고아들을 위해서 의료기관인 ‘제생원’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고 입양을 돕도록 명했다.

그의 애민정신은 오늘날의 민주주의와도 일부 맞닿아 있다. 토지법 제정을 앞두고는 지역별로 관리를 파견해서 5개월 여간 백성을 상대로 민심을 직접 확인, 이를 정책에 반영했다. 흉년으로 백성들이 기근에 허덕일 때는 왕가의 토지를 대폭 줄이고, 백성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농사지을 땅을 빌려주었다. 또 굶어죽는 사람이 없도록 곡식 외에도 자연에서 쉽게 먹거리를 얻는 방법인《구황벽곡방》을 편찬했다.

경기 여주시에 자리한 세종대왕릉은 왕비였던 소헌왕후와 합장릉이다. 정문을 들어서면 역사문화관도 있어서 관람할 수 있다. 사진 출처 세종대왕유적관리소 홈페이지
경기 여주시에 자리한 세종대왕릉은 왕비였던 소헌왕후와 합장릉이다. 정문을 들어서면 역사문화관도 있어서 관람할 수 있다. 사진 출처 세종대왕유적관리소 홈페이지

한글, 계몽군주의 위대한 결단

왕도 사람이기에 권력욕이 있고, 자신의 권위를 오래도록 유지하길 바라기 마련이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보통 왕들과는 생각이 많이 달랐다. 당시 양반들은 한자를 읽고 쓴다는 데에 우월감을 느끼며 특권층을 누리고 싶어 했지만, 세종대왕은 오히려 백성들을 가르쳐서 소통하고자 했다. 아니, 후에 백성들이 문자를 사용하여 지배계층에 도전하더라도 그것 또한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만 나라가 평안하게 된다. 내가 박덕한 사람으로서 외람되이 생민의 주가 되었으니, 오직 이 백성을 기르고 무수하는(撫綏하다:어루만져 편안하게 하다) 방법이 마음속에 간절하여….” 이 말은 1423년 세종 5년,《세종실록》21권에 기록된 것이다. 이처럼 그는 평안한 나라를 이루기 위해 평소에 여러 측면에서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그 뒤로 23년 뒤, 세종대왕은 재위 28년에 훈민정음을 반포했다. 1446년이었다. 역사상 유일하게 반포한 날짜가 분명하고, ‘백성을 가르치는 올바른 소리’라는 뜻처럼 온전히 백성을 위해서 만들어진 획기적이고 실용적인 문자였다.

문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이다. 인류는 문자를 쓰면서 논리적인 생각을 하게 되고, 생각의 틀과 사고의 체계를 완성한다. 말을 문자로 옮기기 때문에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끼리 민족의 정체성 또한 굳건해진다.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가 그 위대한 일의 시작이 되리란 걸 알고 있었다. 그의 혜안대로 한글은 백성들의 눈과 귀, 입을 열어주었다. 문서를 읽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이 한글을 사용하며 비로소 관청에서 알리는 문서를 읽게 된 것이다. 또 자신의 억울함을 한글 로 호소하고 구제받을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한문이나 외국 서적을 순우리말로 번역해서 어리석은 백성들의 교육에 큰 역할을 했다. 충신, 효자, 열녀 등의 행실을 수록한 대표적인 윤리 책인 《삼강행실도》도 역시 세종 때 간행되었으며 성종 때 한글로 언해*(한문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가 이루어져 더욱 널리 퍼졌다. 세종대왕은 이렇게 문화보국文化保國, 즉 문예로써 나라를 지키는 조선의 문화부흥기를 열었다. 한글 이외에도 해마다 농업, 음악, 의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출간했는데 늦은 밤까지 직접 교정을 보곤 했다.

《용비어천가》는 훈민정음으로 쓴 현존하는 최초의 책으로 조선 왕조 건국의 정당성을 찬양한다. 사진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용비어천가》는 훈민정음으로 쓴 현존하는 최초의 책으로 조선 왕조 건국의 정당성을 찬양한다. 사진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왕이 민족에게 내린 최고의 유산

세종대왕이 한글을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1443년의《세종실록》에 보면 ‘임금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만들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실 세종대왕은 아들딸의 조언을 받으며 한글 창제를 해갔다. 당시 집현전 학자 중 수장이었던 최만리의 상소에도 “세자는 할 일이 많은데 언문에 지나치게 빠져 있다.”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를 통해 훗날 문종이 되는 왕세자 이향이 아버지의 오른팔처럼 한글 연구에 깊이 관여했다는 걸 가늠할 수 있다. 여기에 세종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 역시 영재로 소문났던 왕자들도 풀지 못한 변음(變音: 말로 할 때 변하는 소리)과 토착음(吐着音: 입안에서 나왔다 들어가는 소리)의 게재를 해결해 문장쓰기를 완성시켰다. 정의공주가 출가한 안맹담 집안의 《죽산안씨대동보》에 의하면 공주는 총명하고 지혜롭고 그의 아버지인 세종대왕과 관심 분야가 비슷해서 수학과 천문학, 역산曆算에 능했다고 한다. 그런 딸이 변음과 토착음의 게재를 풀어내는 모습에 세종대왕은 크게 기뻐했다. 또 이를 민간에서 시험하라는 하명을 받은 정의공주는 그 결과를 세종에게 보고했다고 한다.

보수적인 학자들은 한글 창제가 명나라에 대한 도전이며, 양국 간의 관계를 틀어지게 할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최만리를 중심으로 집단 상소문을 올리며 항의했다. 세종대왕은 이를 예상했다는 듯이 너무 명나라만 생각하지 말자며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반박했다. 또 한글 사용 후의 장점을 열거해서 설명했다. 상소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하옥되었고 다음날 풀려나 집현전으로 복귀됐다. 그리고 바로 훈민정음의 원리와 쓰임새, 사용방법을 알리는 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훈민정음해례본》이다. 이들은 추가적으로 조선의 건국과 선왕들의 성덕을 기리는 《용비어천가》도 지었다. 훈민정음은 그렇게 창제 후 3년이 지나서야 반포되었다. 여기에 후에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이 불교의 《석가보》와 《법화경》 등을 발췌하여 한글로 옮긴 《석보상절》 30권을 편찬해냈다.

온 세상이 세종대왕의 사랑을 누리다

세종대왕은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한평생 몸 바쳐 일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방식으로 왕의 책무를 다했다. 항상 과중한 업무로 스트레스를 받고, 초인적인 연구를 하다 보니 30대 초반부터 수면 부족과 만성피로에 육체가 한계에 달했다. 두통과 설사가 잦았고 40대부터는 이질과 당뇨, 종기, 척추염 등으로 고생했다. 말년에는 눈병이 심해서 한쪽 눈이 시력이 나오지 않아서 지팡이 없이 다니기 힘들어했다. 그럼에도 승하하기 나흘 전까지 평상시처럼 일했다.

오늘날 ‘한글’이라는 말은 1910년대 주시경 선생을 비롯한 한글학자들이 만든 이름이다. ‘한’은 순우리말인 ‘크다’는 뜻으로, 자음 14자와 모음 10자로 약 8,800개의 소리를 만들 수 있는 한글은 지구상에서 가장 완벽한 문자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문자 기호가 하나의 음성적 특징을 나타내는 세계 유일의 자질문자資質文字로서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요즘 들어서는 중국과 일본, 남미에서도 한글을 공식 문자로 채택해서 자국의 언어를 표기하고 있다니 곧 온 세상이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의 혜택을 누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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