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선교사, 이한솔

대한출판문화협회 지난해 통계에 따르면 매일 167종의 새 책이 나온다. 1주일이면 1천여 종, 1년이면 6만 종이 넘는 신간이 쌓인다는 말이다. 요즘 나온 책들을 보려고 온라인 서점을 살피다가 눈길 가는 논픽션 책이 있었다. 《아이티 안녕!》이라는 제목이었는데, 여기서 ‘안녕’은 처음 만나 반갑다는 뜻일까, 헤어짐 앞에서 나누는 석별의 정일까, 궁금했다.

책을 읽어보니, 주인공은 가난과 무기력이 가득한 아이티에 가서 자신을 던져 헌신하고 있는 37세의 선교사였다. 그곳에서의 고통과 절망, 환희와 기쁨을 글로 옮긴 그는 청소년들에게 아버지로 불렸고 꿈을 찾아주는 선생님이기도 했다. 디지털 시대에 낙후된 나라에 가서 ‘역주행’의 삶을 사는 작가에게 응원의 이메일을 보내고 싶었다. 출판사로 연락을 했더니, 작가가 마침 한국에 잠시 와 있다고 해서 부랴부랴 인터뷰 날짜를 잡을 수 있었다.

사진 박가원
사진 박가원

책을 읽으면서 울림의 진폭이 컸습니다. 첫 장이 중학교 입학하던 날에서 시작되는데요, 작은 교회 목사인 아버지의 대쪽 같은 성품과 흔들리는 세상 사이에서 원망이 뒤섞인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학교 생활에 재미를 붙이지 못한 저는 공부와 거리가 멀었고, 교회에서 목사 아들답다는 소릴 들어본 적도 없었어요. 나이가 두 자리 숫자가 되고부터 담배와 술을 가까이 하면서 게임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학교 급식비 낼 돈으로 게임을 했으니 굶고 지내기 일쑤였죠. 고통스런 현실을 벗어나보려고 가출도 수없이 했는데 별거 없더라고요. 그런데 게임할 때만큼은 즐거웠어요. 게임 안에서는 내가 펄펄 살아 있었고 쑥쑥 성장하는 것 같았어요. 게임은 나를 즐겁게 해주는 유일한 존재였고, 그 즐거움이 계속되려면 돈이 더 필요했죠. 돈 벌 생각에 졸업 후 대학에 가지 않고 취직을 했어요. 한 달 열심히 일해 난생처음 150만 원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뿌듯했겠어요. 손에 쥔 첫 월급을 저는 친구들과 술집에서 하룻밤에 다 날려버렸어요.

몇 달간 죽어라 일해도 내 주머니에는 만 원짜리 한 장 남지 않더라고요. 월급 타면 빚 갚기에 바빴고 금세 빈털터리가 됐어요. 내가 원하던 삶은 보란 듯이 성공해서 아버지 앞에 당당히 서는 것이었는데, 폐인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목사 될 생각이 있으셨나요?

꿈에도 없었죠.(웃음) 가난이 두려웠던 건 절대로 아니고요. 가난한 목사의 삶은 우리 집이 그랬기에 오히려 괜찮았습니다. 목사 될 생각이 없던 진짜 이유는 아버지 때문이에요. 하나님밖에 모르는 삶이 가장 행복하다고요? 전 아버지처럼 살 자신이 없었어요. 그런데 친한 친구들이(그에겐 교회에서 사귄 친구들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신학교로 진로를 바꾸는 거예요. 저도 엉겁결에 친구들을 따라 원서를 냈어요.

그렇게 굿뉴스신학교에 입학했는데, 막상 학교에 들어와 단체 생활을 하려니 많이 힘들었어요. 새벽에 일어나 예배에 참석하고 성경 읽고 수업 듣는 것도 어려웠지만, 흰 백로 같아 보이는 학생들 틈에서 까마귀 같은 제 모습이 들통날까봐 항상 조마조마했어요. 시간이 흘렀고, 입학 동기들이 졸업해서 갈 길을 찾아가는데 나는 학교 구석진 곳에서 몰래 담배 피울 생각이나 하고 게임할 궁리만 하는 그런 사람이었죠.

아무리 걸어도 제자리걸음 같았던 시기였겠네요.

그래서 절망감이 더 컸어요. 당시 우리 학교에는 나 말고도 상태가 심각한 학생이 두 명 있었어요. 그들에 비하면 저는 ‘착한 문제아’였어요. 제가 봐도 그 애들은 ‘언제 사람이 되겠냐?’ 싶은 수준이었어요. 문제는, 그런 애들이 언제부턴가 마음이 달라지기 시작하더니 졸업도 하고 전도사가 되었어요. 앉은 자리에서 물벼락 맞은 기분이랄까요? 이제 나만 남았다는 절망감이 들더라고요. 동기들처럼 되고 싶어서 노력도 했거든요. 제가 달라질 수만 있다면 목사의 길을 가겠다는 마음을 먹은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저에겐 어떤 변화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고 늘 원점이었어요. 이쯤 되면 ‘나는 뭘 해도 안 되는 놈이구나.’ 하면서 스스로에게 포기가 왔어요. 무엇보다도 못난 아들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하신 아버지께 너무나 죄송했어요.

나비로 변해 훨훨 날아가는 친구들을 보는 심경이 어땠을까요?

친구들이 졸업 후 각지로 파송되고, 신입생들이 속속 들어오는데 나는 몇 년째 유급생으로 있으려니 갑갑했어요. 학교를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내 발로 걸어나갈 수도 있겠지만 쫓겨나는 게 낫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야 미련이 남지 않으니까요. 어릴 때 제가 말썽을 많이 부려봐서 알아요. 계속 사고를 치면 나중엔 모든 사람들이 손을 들거든요. 부모님도, 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처음엔 다들 긍정적으로 말해요. “너는 나의 유일한 희망이야.”, “하늘의 별이야.” 하다가, 탈선 수위가 높아지고 제가 상대방의 호의를 되레 악용하는 걸 보면 “나는 너랑 더 못살겠다.”,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냐?”, “너는 재활용도 안되는 쓰레기 같아!” 하면서 날 선 말들을 쏟아 놓아요. 그때 제가 결정적인 말이나 행동을 하면 사람들은 저를 다 포기해요. 그 시점부터 저는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되고요.

그래서 신학교에서 쫓겨날 방법을 강구했나요?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학교를 설립하신 박옥수 목사님과 학생들이 면담하는 날이 있어요. 그날을 D-데이로 잡았어요. 저는 학교 뒷산에 올라가서 먼저 담배 세 개비를 연달아 피우고 면담실로 갔어요. 제가 마음에서 정말 존경하는 목사님이라서 솔직히 이런 모습까지 보이는 게 좋진 않았지만, 여기서 나가려면 별 수가 없었어요. 담배 냄새에 찌든 저를 보시면 “신학생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고 호통을 치며 당장 나가라고 하실 줄 알았어요.

최근에 발간된 이한솔 선교사의 논픽션 스토리북. 일기 쓰듯 페이스북에 꾸준히 올린 글을 바탕으로 책을 만들었다. 처음 도착해서 떠나던 날까지 아이티의 모든 것이 담겨 있어서 제목의 ‘안녕’엔 ‘헬로우’도, ‘굿바이’도 들어 있다. 그의 아내는 “책을 읽으며 그날의 행복했던 조각들이 떠올랐다.”고 했다. 도서출판 기쁜소식 발행, 270쪽, 1만 7천 원
최근에 발간된 이한솔 선교사의 논픽션 스토리북. 일기 쓰듯 페이스북에 꾸준히 올린 글을 바탕으로 책을 만들었다. 처음 도착해서 떠나던 날까지 아이티의 모든 것이 담겨 있어서 제목의 ‘안녕’엔 ‘헬로우’도, ‘굿바이’도 들어 있다. 그의 아내는 “책을 읽으며 그날의 행복했던 조각들이 떠올랐다.”고 했다. 도서출판 기쁜소식 발행, 270쪽, 1만 7천 원
인터뷰 내내 맑고 밝은 그의 표정에서 책 속 청소년 시절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힘들었던 그 시간들이 그를 선교사로 이끌어주는 길이 되었다. 사진 박가원
인터뷰 내내 맑고 밝은 그의 표정에서 책 속 청소년 시절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힘들었던 그 시간들이 그를 선교사로 이끌어주는 길이 되었다. 사진 박가원

뭔가 반전이 있었을 듯하네요. 사고뭉치 학생에게 뭐라고 하셨을까요?

생각지 못한 질문을 제게 하셨어요. “한솔아, 너 구원은 받았어?” 제가 우물쭈물하자 “예수님이 어떤 사람을 위해 돌아가신 줄 아니? 믿음 좋고 착한 사람들을 위해서만 돌아가신 게 아니야.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어. 그 모든 사람 안에는 신실하고 믿음 좋은 사람들도 있지만, 거짓되고 배신하고 엉망인 사람들도 있어.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대신해 돌아가셨다는 건, 너처럼 엉망인 사람을 위해서도 돌아가셨다는 거야.”

깜짝 놀랐어요. 어려서부터 많이 들은 이야기인데,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예수님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저는 믿지 않고 있었던 거죠. 내가 좀 성실하게 살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고, 엉망으로 행동하면 구원받지 않은 것 같았거든요. 그날은, 예수님이 이런 나를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그대로 믿어졌어요.

그후에 어떤 내면의 변화가 생겼는지 독자들에게 설명이 가능할까요?

목사님한테 그 이야기를 듣고 나오는데 ‘내 안에도 예수님이 계시다’는 말이 계속 맴도는 게 느껴졌어요. 그 말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는 거예요. 나의 잘못된 관념, 나쁜 행동들을 뽑아버리는 것이 변화라고 알던 제가 예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셨고 형편없는 내 안에 영원히 살아 계신다는 걸 그대로 믿는 거예요.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그 믿음이 담배 피우고 싶은 욕구를 밀어냈고, 늦잠과 게임과 핑계와 거짓말 같은 것들로 차 있던 자리에 예수님과 관련된 생각들로 채워가는 거예요. 그날부터 제 관심의 영역이 바뀌었고, 마음에 소망과 기쁨이 조금씩 솟아나기 시작했어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분들에 둘러싸여 찍은 사진이다. 그의 영원한 멘토 박옥수 목사(가운데), 늘 듬직한 울타리가 되어 준 어머니와 아버지(사진 양쪽 끝), 그리고 그와 동고동락을 함께하는 아내. 무슨 말로 이분들께 그가 느끼는 감사를 전할 수 있을까 싶다. 사진제공 이한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분들에 둘러싸여 찍은 사진이다. 그의 영원한 멘토 박옥수 목사(가운데), 늘 듬직한 울타리가 되어 준 어머니와 아버지(사진 양쪽 끝), 그리고 그와 동고동락을 함께하는 아내. 무슨 말로 이분들께 그가 느끼는 감사를 전할 수 있을까 싶다. 사진제공 이한솔

매우 신기한 일이군요. 이후의 바뀐 삶이 궁금합니다.

목사님과의 면담이 있고 단 뒤, 저는 신학교를 드디어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그 해 늦가을에 결혼해서 이듬해 2월에 바로 선교사로 파송되었죠. 제 동기들처럼요.(웃음) 아이티에 와서 11년을 보내는 동안 제게 사건과 사고는 끊이지 않았어요. 가족이 생기고 교회에 같이 사는 아이들이 늘어나자 돌아볼 일도 많아졌고요. 먹을 게 없어 막막할 때가 자주 있었고, 억울하게 감옥에도 갔어요. 무장강도의 총격으로 죽을 뻔했고, 갱단에게 납치되어 14일간 억류되는 숨막히는 일도 있었죠. 나와 죽음 사이는 한 걸음 같았던 때도 있었지만, 하나님이 항상 우리를 도우시고 지키시는 걸 보았어요. 그래서 처한 상황은 두렵지만 제 마음은 두렵지 않았어요. 일의 과정은 때로 예측이 불가했으나 끝엔 항상 해피 엔딩이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아이티에서 태어난 세 자녀는 세계에서 한국 다음으로 잘사는 나라가 아이티인 줄로 안다. 사진제공 이한솔
아이티에서 태어난 세 자녀는 세계에서 한국 다음으로 잘사는 나라가 아이티인 줄로 안다. 사진제공 이한솔

영화의 한 장면 같네요. 처음 아이티에 갔을 때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시겠죠.

길을 가다가 우연히 한 아이를 봤어요. 자기 몸보다 큰 수레를 끌고 가는 것이 기특해 보여 꿈이 뭐냐고 물었어요. 아이티에는 수십만 명이 지진으로 목숨을 잃은 상처가 커서, 저는 그 아이가 ‘훌륭한 의사가 되어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고 싶어요.’라고 말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교복 입고 학교에 다니는 게 꿈이라는 겁니다. 나는 한번도 학교에 가고 싶은 적이 없었고, 교복은 빨리 벗어버리고 싶었던 옷인데 말이죠.

나중에 갱단에 잡혀 억류되어 있을 때, 저를 감시하는 어린 경비병들에게 학창 시절 얘기를 해줬더니 ‘당신은 부유한 나라에 태어났으면서 무슨 불만이 있어 공부를 안했냐? 내가 당신이 가진 많은 것 중에서 부모님만 있었더라도 이렇게 살지 않을 거다.’ 그러는 거예요. 제가 당연하게 알던 것들을 평생의 꿈으로 열망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정말 미안했습니다.

대지진이 남긴 상흔과 불안한 정치 상황으로 편할 날이 없는 곳이지만,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박옥수 목사와 영상 전화로 의논하고 지혜를 얻는다. 사진제공 이한솔
대지진이 남긴 상흔과 불안한 정치 상황으로 편할 날이 없는 곳이지만,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박옥수 목사와 영상 전화로 의논하고 지혜를 얻는다. 사진제공 이한솔
아이티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 오까이에서 2017년에 처음 교회를 시작했다. 오까이 성도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제공 이한솔
아이티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 오까이에서 2017년에 처음 교회를 시작했다. 오까이 성도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제공 이한솔

그래서 청소년들을 위한 여러 활동을 시작하셨나 봅니다.

우선 학교에 못 다니는 아이들을 위해 토요일마다 무료 아카데미를 열었습니다. 학생들에게 영어와 스페인어, 태권도와 음악을 가르쳤고, 저는 바이블 스터디 클래스를 맡았습니다. 수백 명의 청소년들이 모였고, 이 아이들이 성경 공부를 하면서 표정이 밝아지면서 점점 달라졌어요. 하나님이 나를 멀리 아이티까지 왜 보내셨고, 그전에 한국 땅에서는 왜 되는 게 없었는지 그제서야 알 수 있었어요. 아이티에는 예전의 나 같은 사람들이 많아요. 하나님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저주 받은 아이티를 떠나 다른 나라로 가려고 하지요. 아이티에 희망이 없다는 그들의 말에 저는 수긍할 수 없었어요. 누구보다 엉망이었던 나 같은 사람도 바뀌었는데 그들이 바뀌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요? 나는 아이티가 변한다고 외치기 시작했어요.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조그만 우리 집에서 수십 명이 같이 살게 되었고 우리 부부를 부모처럼 알았어요.

아이티에 구석구석까지 그는 전도 여행을 수없이 다녔다. 어디를 가든 사람이 모여 있으면 큰 소리로 성경 말씀을 전한다. 사진제공 이한솔
아이티에 구석구석까지 그는 전도 여행을 수없이 다녔다. 어디를 가든 사람이 모여 있으면 큰 소리로 성경 말씀을 전한다. 사진제공 이한솔
꿈이 없던 그가, 학교가 싫었던 그가, 아이티에 가서 드림대안학교를 열었다. 이런 변화의 물꼬는 그가 존경하는 분에게 받은 ‘영원한 지지’ 덕분이었다. 사진제공 이한솔
꿈이 없던 그가, 학교가 싫었던 그가, 아이티에 가서 드림대안학교를 열었다. 이런 변화의 물꼬는 그가 존경하는 분에게 받은 ‘영원한 지지’ 덕분이었다. 사진제공 이한솔

그 아이들에게 언제나 희망만 말씀해주셨나요?

사실, 제 눈에 보이는 아이들 문제는 심각했어요. 도둑질과 싸움질만 일삼고 마음에 상처가 가득한 아이들을 보면서 “너는 안 되겠다.”는 소리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왔지만, 제가 본 것이 옳다고 할 수 없었고 제 생각을 말로 옮길 수도 없었어요. 왜냐고요? 박 목사님은 ‘재활용 불가’인 나를 보면서 한번도 안되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하나님은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지지해주신다고, 목사님은 굳게 믿으셨어요.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제가 달라진 걸 제 스스로도 경험했고요. 만약에 제가 발견한 이 사랑을 이곳의 아이들도 똑같이 알 수 있다면, 아이들도 나처럼 행복해지겠죠? 그래서 소망만 말할 수밖에 없었어요. 언젠가 같이 살고 있는 한 아이가 저한테 물었어요.

“도둑질하는 나를 사람들이 비난하고, 가족도 나를 감당하지 못해 버렸는데 선교사님은 나를 왜 받아주셨어요? 선교사님 집도 먹을 게 별로 없고 비좁잖아요. 나를 왜 내보내지 않고 계속 먹여주고 재워주세요?”

“나도 너처럼 그런 아이였거든.”

“그래요? 그러면 나도 커서 선교사님처럼 될 수 있어요?”

“그럼, 되고 말고. 너는 나보다 훨씬 더 멋진 사람이 될 거야.”

이런 대화를 나눌 때 제가 가장 행복했어요. 예전에 삶의 고비에서 넘어졌을 때 제게 손 내미는 분들이 있으면 애써 외면했어요. 부끄러웠거든요. 이랬던 제가 박 목사님의 손을 잡고 처음 일어났던 거죠. 그런데 더 깜짝 놀랄 일은, 나 같이 엉망인 사람이 내민 손이라도 잡고 일어나 달라지는 아이들이 아이티에 많다는 사실이죠. 제가 절망 속에 있을 때 저를 붙들어준 참된 사랑 덕분에 제가 아이티에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감사하며 11년 동안 지낼 수 있었고요.

아무리 막막한 순간도 성도들의 빛나는 미소를 떠올리면 힘이 난다. 사진제공 이한솔
아무리 막막한 순간도 성도들의 빛나는 미소를 떠올리면 힘이 난다. 사진제공 이한솔
정든 오까이를 떠나 2022년에 따바라는 새로운 곳으로 갔다. 그곳 창립 예배 때 새로 결성된 합창단이 공연도 했다. 사진제공 이한솔
정든 오까이를 떠나 2022년에 따바라는 새로운 곳으로 갔다. 그곳 창립 예배 때 새로 결성된 합창단이 공연도 했다. 사진제공 이한솔

뭘 해도 풀리지 않던 한국 땅을 뒤로하고 떠난 그는 지진의 상처가 만연한 아이티에서 뭘 해도 행복해지는 경험을 했다. 지난 5월엔 도미니카공화국으로 선교지를 옮겨가 적응하는 중이라고 하는데, 그곳에서도 그는 자신이 받은 참된 사랑을 마구 외치며 자랑할 것이다. 그리고 그 나라에 넘어져 있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내밀 것이고, 그의 손을 잡고 많은 이들이 다시 일어날 것이다. 아마도 나라를 옮겨갈 때마다 그는 체험과 추억을 글로 쓸 것이고, 그런 책들이 늘어나면 언젠가 ‘이한솔 논픽션 시리즈’도 나올 것이다. 인터뷰를 하면서 그가 들려준 에피소드가 많았다. 하지만 글로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해 남겨두었다. 여기에 옮기지 못한 감동의 스토리는 그가 쓴 책을 읽으라고 권할 밖에 더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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