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바수니스트의 기쁨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졸업 후 클래식의 본고장인 유럽이나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기량을 높이길 원한다.
그런데 바순을 전공하고 있는 조승연 학생이 본지에 보내온 소개 글을 읽고 좀 의아했다. ‘바순 전공자가 유럽이 아닌 아프리카로 해외봉사를 간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에티오피아에 가서 바순 연주를 하고 있을까?’ 그런 점들이 궁금해 화상 앱을 통해 아디스아바바에 있는 그와 만났다.

조승연올해 스물두 살. 가천대학교에서 관현악을 전공 중이다. 졸업 후에는 음악 선생님이 되어 어린 학생들에게 음악의 기쁨을 심어 주고 싶어 한다. 현재 에티오피아에서 해외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조승연
올해 스물두 살. 가천대학교에서 관현악을 전공 중이다. 졸업 후에는 음악 선생님이 되어 어린 학생들에게 음악의 기쁨을 심어 주고 싶어 한다. 현재 에티오피아에서 해외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바순이라는 흔치 않은 악기를 전공하고 있네요.

네, 저는 어렸을 때 먼저 비올라를 배웠어요. 중학생이 되면서 현악기가 저와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어 고민하던 중에 음악선생님께서 바순에 대해 설명하시는 것을 들었어요. 바순은 비올라처럼 모양이 예쁜 것도 아니고, 통나무처럼 크고 기다란 형태여서 매력적으로 보이진 않았어요. 그후에 학교 선배가 우연히 바순 연주를 하는 걸 보고 그 부드러운 음색에 마음이 끌렸어요. ‘나와 잘 맞는 악기’가 되겠다는 확신이 생기더라고요.

바순이 어떤 악기인지 잘 모르는 분들이 많으실 거예요. 목관 악기 중에서 가장 낮은 음을 내는 악기라서 바순은 독주 악기보다는 통주저음의 일부를 담당하는 반주 악기의 역할을 많이 해왔어요. 17세기 후반부터 개인기를 풍부하게 살릴 수 있는 독주 악기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플룻이나 클라리넷보다 소리가 낮고 감미로워서 오케스트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해요. 크기도 크지만, 나무 재질도 보통 악기보다 훨씬 단단하고 무거워요. 연습용 악기가 천만 원을 웃돌 만큼 가격이 고가인 악기여서 저도 처음 시작할 때는 좀 부담스러웠어요. 이제는 없으면 안 될 제 분신이 됐지만요.

바순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시네요. 어떻게 해외봉사를 가게 됐는지 궁금해요.

제가 중고등학교를 음악 전문 기숙학교에 다녔거든요. 늘 학업과 연습, 공연으로 빡빡하게 이어지던 중고생 시절을 마치고 대학에 입학하니 요즘의 캠퍼스 문화에 위화감이 느껴졌어요. 연주를 하면서 용돈을 벌어도 마음은 이유 없이 공허했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친한 분들과 캄보디아로 여행을 갔어요. 마침 그곳의 한인교회에서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개최한 코리아 캠프에 참석하게 되었고요. 저와 같이 있던 지인의 요청으로, 제가 그 자리에서 계획에 없던 바순 연주를 하게 되었어요. 저는 아직도 그때 연주를 듣던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이 잊히지 않아요. 바순 소리를 너무 좋아해 주시더라고요. 연주 후에는 캄보디아 학생들에게 바순이 어떤 악기인지 무슨 특징이 있는지 소개하는 의미 있는 시간을 가졌어요. 그때 ‘아, 이 맛에 다들 해외로 자원봉사를 가는구나!’를 알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내가 해외로 봉사를 간다면 스펙쌓기에 도움이 될 만한 유럽 국가들이 어떨지 생각해 봤어요. 그런데 점점 제 마음이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음악 연주로 행복을 전해주고 싶다!’, ‘이런 악기도 있다고 보여주면서 바순의 아름다운 소리를 들려주고 싶다!’는 쪽으로 자꾸 커져갔어요. 해외봉사를 먼저 다녀온 경험자들로부터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너무 순수해서 나의 어떤 모습이라도 그대로 좋아해 준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 말에 용기를 내서 저도 에티오피아로 해외봉사를 신청했어요. 1년간 음악을 쉬더라도 별로 두렵지 않겠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어쩌면 제 음악적 소양이 더 깊어지리라는 기대감까지 들었죠.

아디스아바바에 있는 대학교에서 IYF 부스를 차리고 홍보를 했다.
아디스아바바에 있는 대학교에서 IYF 부스를 차리고 홍보를 했다.

아프리카에는 서양 음악이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선 에티오피아 음악은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과 많이 다른 것 같아요. 한국의 트로트와 아주 흡사한 멜로디라고 할까요? 사람들이 노래를 부를 때 박자도 맞추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부를 때마다 음도 바뀌어요. 그런 에티오피아 음악의 정서와 비교해볼 때 서양 클래식은 대중화되기 어려운 부분이 있죠. 실제로 이 나라에서 서양 음악의 악보를 구하기란 정말 쉽지 않아요.

제가 이곳에 온 지 어느덧 6개월이 다 되어가네요. 처음 3개월이 지났을 때 굿뉴스코 아디스아바바 센터에 새로운 지부장님이 오셨는데, 정말 음악을 사랑하는 분들이었어요. 지부장님은 음향감독으로 지금도 일하시고 사모님은 소프라노 출신의 성악가로, 두 분의 귀가 보통 수준이 아니셨어요. 당시에 저는 한국을 홍보하는 행사 때마다 공연을 담당하고 있었어요. 제가 바순 연주를 직접 하기도 했지요. 그럴 때마다 소프라노 사모님은 “승연아, 호흡이 너무 짧다. 숨을 이렇게 쉬면서 연습해 보렴! 네 연주에서 마음이 우러나오도록 해야 해.”, “연주자가 억지로 하는 것 같으면 듣는 사람이 그 음악을 좋아하기가 어렵겠지?”라고 하셨어요.

제가 음악 전문학교에 다닐 때에는 공연 전에 리허설도 하고, 전문가와 함께 마이크와 반주의 조합을 체크도 했거든요. 이곳엔 그런 장비가 당연히 없죠. 제대로 된 공연을 할 환경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니까 도저히 연주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어요. 그래서 공연을 앞둔 어느 날, “이렇게는 연주를 못하겠어요.”라며 제가 버럭 화를 냈죠. 그날 처음으로 사모님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게 되었어요.

아디스아바바 근교의 한 초등학교를 방문해서 마인드캠프를 열었다.
아디스아바바 근교의 한 초등학교를 방문해서 마인드캠프를 열었다.

봉사하는 마음으로 연주를 하려고 했는데 심각한 국면에 이르렀네요.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사모님과 대화를 하면서 알게 되었어요. 어려서부터 음악을 해온 제 머릿속에 많은 ‘프레임’이 있다는 걸요. 그 프레임을 고수하려는 자부심과 고집도 세고요. 하지만 제가 이곳에 온 이유가 연주를 하기보다는 음악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서잖아요. 제가 에티오피아에 마음을 열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악기로 표현을 할 때 소리가 커지고 줄어드는 것은 마음의 흐름과 관련이 깊다’며 요즘도 사모님이 많이 가르쳐주세요. 마음을 넓혀서 여러 방향을 다 수용하자는 조언도 해주시고요. 그 말씀들을 자꾸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제 마음이 밝아지는 걸 느껴요.

매주 지부에서 음악 아카데미를 열어서 수업을 진행한다.
매주 지부에서 음악 아카데미를 열어서 수업을 진행한다.

에티오피아에서 즐거운 추억도 많이 있을 것 같아요.

얼마 전 남부의 아르바민치 지역을 여행했어요. 그곳은 아직도 부족장이 다스리는 전통적인 마을이에요. 저희는 차를 타고 가다가 마을이 나오면 어린이 캠프를 열었고, 또 다른 장소로 이동하며 다녔죠. 그러면 예닐곱 살 정도의 아이들이 행사에 참석하려고 막 산을 달려서 내려와요. 저는 행사 준비를 도우면서 바순 연주도 했는데, 공연을 마치고 아이들이 다가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면서 ‘좋았다!’고 해주는 거예요. 음악을 전공하는 평범한 학생에 지나지 않는 내가 사람들에게 이런 기쁨을 준다는 것에 가슴이 뭉클했어요.

봉사하는 보람을 제대로 느껴셨네요. 그곳에서 한국전쟁 참전용사들도 만났다고요.

네, 참전용사들 이야기를 꼭 하고 싶어요. 한국전쟁 때 에티오피아가 참전했어요. 이 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하일레 셀라시에께서 자신의 친위대인 ‘강뉴 부대’를 우리나라에 보내주신 거죠. 황제의 명을 받은 용사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스물일곱 번의 전투에서 한 번도 지지 않고 싸우셨대요. 전쟁 후에도 이분들은 한국의 전쟁 고아를 위한 고아원과 학교를 세우셨고요. 하지만 귀국 후에는 남한을 도왔다는 이유로 50여 년간 많은 고초를 받으셨어요. 당시 에티오피아가 공산주의로 바뀌었거든요. 다행히 1992년에 다시 민주주의로 회복되었죠. 이분들은 모진 세월을 사시면서도, 목숨을 걸고 자유를 지킨 한국이 놀랍게 발전한 모습에 긍지를 느끼며 기뻐하세요. 그날 저희가 찾아가서 아리랑 노래도 불러드리고, 바순 연주를 해드렸는데 제 생애 최고의 날이었어요.

세월이 한참 흘러서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이 나이가 많이 드셨다. 목숨을 걸고 싸웠던 나라의 청년들이 자신들을 방문해준 것에 한없이 고마워하셨다.
세월이 한참 흘러서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이 나이가 많이 드셨다. 목숨을 걸고 싸웠던 나라의 청년들이 자신들을 방문해준 것에 한없이 고마워하셨다.

감동적인 이야기가 가득하네요. 표지 사진에 대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어요.

‘투머로우’에서 사진 콘테스트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듣고, 전통의상인 야베스 까이스를 입고 단원들과 함께 시내 거리로 나가 사진 촬영을 했어요. 함께 사진을 찍은 로만은 저와 동갑내기로, 아디스아바바 근교의 르피트 밸리 전문대학에 다니는 대학생이에요. 이 나라 풍습으로, 부모님들은 딸을 스무 살을 넘기 전에 십대 후반이 되면 일찍 시집을 보내요. 로만도 이 무렵 집안의 소개로 선을 본 남자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학교를 중도에 그만둬야 할지 계속할지 고민이 많았는데, 지금은 결혼해서 얼마나 행복하게 잘 지내는지 몰라요.(웃음) 로만은 제가 이곳에 와서 사귄 베스트 프렌드이고요. 우리 둘이 들어간 사진이 표지로 선정되어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로만이 결혼하던 날, 에티오피아 사람뿐 아니라 한국 봉사 단원들도 축하 인사를 보내왔다.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 보기 좋다.
로만이 결혼하던 날, 에티오피아 사람뿐 아니라 한국 봉사 단원들도 축하 인사를 보내왔다.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 보기 좋다.

조승연 학생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전국의 대학교와 관공서에서 마인드교육과 한류문화행사를 진행하려고 해요.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의 뜻이 ‘새롭게 피어난 꽃’이라고 합니다. 이 뜻처럼 사람들의 마음에 꽃피울 날을 그리면서요.”라며 활짝 웃었다. 그런 모습으로 보며 기자는 10년 후 그가 바수니스트로 모든 사람을 위해 연주하며 멋지게 살아갈 모습이 기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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