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_신뢰를 지킨 스위스 용병

세계지도에서 스위스는 정말 작다. 땅의 형세나 위치로도 눈에 현저히 들어오지 않는다. 좁은 땅은 온통 척박한 산지라서 사람이 살기 힘들고, 주변엔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같은 강대국이 둘러서 있어 기세를 펴기 어려운 지정학적 조건이다. 선천적으로 작고 불리한 환경을 가진 나라,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스위스를 그렇게 인식하지 않는다. 작아도 내실이 탄탄한 ‘강소국’으로 알고 있으며, ‘믿을 만한’, ‘약속을 지키는’, ‘정확한’ 등의 수식어가 쌍둥이 형제처럼 나라 이름 앞에 따라붙는다.

국가 이미지는 어느 날 단번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어떤 이미지와 관련된 유사 사건이 반복, 지속되면서 겹겹이 쌓인 지층처럼 형성되어간다. 빨간 바탕에 하얀 십자가가 선명한 스위스 국기를 보면서, 루체른으로 가던 길에서 만난 ‘빈사의 사자상’이 떠올랐다.

1821년에 완성된 사자상.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은 루체른의 사자가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감동적이라고 말했다. 사진 프리픽
1821년에 완성된 사자상.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은 루체른의 사자가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감동적이라고 말했다. 사진 프리픽

루체른 암벽 안에 자리한 ‘빈사의 사자상’

산세와 지형에 따라 26개 주로 분할되어 있는 스위스에서 루체른은 일곱 번째로 큰 도시이다. 아름다운 로이스 강이 흐르고 그 위에 14세기의 목조 다리 ‘카펠교’가 놓여 있다. 여기에서 10분 정도 더 걸으면 거대한 암벽을 배경으로 한 커다란 사자상이 시야에 들어온다. 가로 10미터에 높이가 6미터나 되는 크기라서 멀리서도 잘 보이는 이 조각은 스위스 사람들에게는 예술품 이상의 의미를 지닌 역사적 상징물이다. 루체른이란 도시에 왜 이런 사자 조각상이 만들어졌는지 사연을 살펴 보면 스위스 용병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무슨 마음가짐으로 전쟁에 임했는지 알게 된다.

중세에서 근대로 이어지는 15세기에서 18세기까지 약 3백 년 간, 스위스의 건장한 청년들은 유럽 각지에 흩어져서 나의 조국이 아닌 다른 나라를 위해, 보수를 받으며 용병傭兵으로 복무했다. 그 숫자가 50여만 명에 이르렀는데 이중에 60%는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만큼 스위스 용병은 고용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는 최강의 군사로 정평이 나 있었다. 용병이 지녀야 할 가치는 세월이 흐른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절대 충성과 필승의 신념, 임전무퇴臨戰無退 정신이 바로 그것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고용주를 보호하겠다는 약속에서 용병의 삶이 시작된다.

1792년 8월 10일 프랑스 대혁명 시, 시민군에 맞서 끝까지 싸운 스위스 용병들. 오토 로치와 루드비히 방이 1889년 경 함께 그렸다.
1792년 8월 10일 프랑스 대혁명 시, 시민군에 맞서 끝까지 싸운 스위스 용병들. 오토 로치와 루드비히 방이 1889년 경 함께 그렸다.

세월을 되짚어 프랑스 대혁명 시기로 올라가 보자. 수도 파리가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던 1792년 8월 10일, 혁명에 가담한 정규군과 시민군은 왕의 폐위를 외치며 튈르리 궁전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소총으로 무장한 스위스 용병 근위대는 프랑스 루이 16세 왕과 마리 앙뚜와네트 왕비를 지키기 위해 시민군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루이 16세는 가족을 데리고 급히 궁전을 탈출하면서 용병 근위대장에게 불필요한 교전을 벌이지 말고 항복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이들은 국왕이 떠난 궁전의 정문을 봉쇄한 채 진입을 저지했다. 결국 성난 파도 같은 시민군이 정문을 밀치고 들어와 궁전으로 향했다. 그때 빨간색 스위스 군복 차림의 근위대를 본 시민군 대장이 말했다.

“여긴 네 나라가 아니니 어서 고향으로 돌아가라.”

고향으로 가라는 말은 항복하면 살려주겠다는 뜻일 텐데, 이 말에 근위대장은 어떤 심경이 되었을까? 휘하에 786명 부하를 거느린 그는 책임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이미 왕을 지키던 프랑스 군인들도 다 도망간 상태였고 왕과 왕비도 무사히 피신을 했으니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을지 모른다. 잠시 후 그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가 살겠다고 여기서 도망친다면, 훗날 어느 나라가 우리에게 용병 일을 맡기겠는가?”

죽음의 길을 선택한 786명의 용병들은 시민군을 향한 대열을 흩트리지 않았다. 이렇게 싸우다 전멸한 스위스 용병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빈사의 사자상’이다.

튈르리 궁전의 최후 150주년을 기리기 위해 1942년에 스위스 군인들이 ‘빈사의 사자상’을 단체 방문했다.사진 루체른 공식 홈페이지
튈르리 궁전의 최후 150주년을 기리기 위해 1942년에 스위스 군인들이 ‘빈사의 사자상’을 단체 방문했다.사진 루체른 공식 홈페이지

이 사자상은 당시 튈르리 궁전의 근위대장이었던 카를 키퍼의 주도로 1821년에 완공되었다. 사건이 있던 당시, 그는 공교롭게도 집안일로 고향 루체른에 가느라 참화를 피했다. 하지만 동료와 부하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처참했다. 그들의 넋이라도 기리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의 평생 숙원사업으로 삼고 기념비 제작에 들어갔다. 그는 먼저 유럽의 여러 조각가들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그 중에서 죽어가는 사자의 처절한 모습으로 용병의 최후를 표현한 덴마크 조각가 베르텔 도르발센의 드로잉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 후 2년 간의 작업을 거쳐 암벽을 파낸 자리에 거대한 사자가 완성되었다.

작품을 들여다 보면, 창에 맞아 쓰러진 사자의 머리 앞에 스위스 십자가가 새겨진 방패가 놓여 있다. 창상으로 인해 죽어가면서도 사자는 프랑스 왕실을 상징하는 백합 문양의 방패를 앞발로 품고 있다. 루이 16세 국왕을 끝까지 지킨 충절을 상징한다. 사자가 엎드린 자리 위에는 ‘스위스인의 충절과 미덕’이라는 라틴어 비문碑文이 암벽에 새겨져 있다.

스위스 용병들은 왜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을까?

지금은 스위스가 선진국 중의 선진국이지만, 중세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험준한 알프스산맥과 쥐라산맥 그리고 호수로 이루어진 내륙국이라서 무역과 산업이 발달할 기반이 없었고, 토지는 농사짓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게다가 척박한 토지조차도 모두 맏아들에게 물려주는 전통이 이어져, 장남이 아닌 아들과 딸들은 알아서 제 살 길을 찾아야 했다. 부족한 식량을 구하려고, 극심한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스위스 사람들은 다른 나라로 이민을 떠났다. 건장한 남자들의 경우는 용병에 지원했다. 프랑스 국왕이나 바티칸 교황의 호위병이 되어 생계를 유지해간 것이다.

그래서 스위스에서는 용병을 라이슬로이퍼(Reisläufer, ‘전쟁에 나서는 자’라는 뜻)라고 부른다. 이들은 장창(pike)과 핼버드(halberd:도끼 달린 검)를 이용해 집단 공격을 해서 중세 후기에 가장 뛰어난 전력으로 인정을 받았다. 스위스 각 주의 지방정부는 미리 병사들을 선발해 언제든지 전쟁에 나갈 수 있도록 훈련시켰고, 이로 인해 용병산업이 일찍이 발달했다. 보장된 수입과 동시에 전사로서 이름도 날릴 수 있는 용병은 장래가 불투명하고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전쟁에 나가 부상을 당하고 심지어 전사하더라도 그것을 영예로운 삶으로 생각했다.

16세기에 용병을 모집하는 포스터.사진 스위스 국립 박물관
16세기에 용병을 모집하는 포스터.사진 스위스 국립 박물관

중세 시대에는 용병이 스위스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른 나라들에도 용병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필요에 따라 수시로 모였다 흩어지는 떠돌이였고 군기도 약하고 민폐도 컸다. 그들에게 고용주와의 계약을 죽음으로 지키는 스위스 용병의 충성심을 기대하는 것을 불가했다. 반면에 고향에 부양할 가족과 집을 둔 스위스 용병들은 신뢰의 하락이 곧 가족의 몰락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스스로 개인적인 일탈을 허용하지 않았다. 실제로, 타지에 파견된 용병이 탈주하거나 고용주를 배신한 후 고국으로 돌아오면 스위스는 법으로 엄격히 처벌했다고 한다.

그러나 총이 발명되면서 용병의 판세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총을 가진 스페인의 ‘테르시오’와 독일 ‘란츠크네히트’ 용병이 급부상한 것이다. 이로 인해 최강으로 손꼽힌 스위스 용병은 냉병기 시대(창과 칼처럼 사람의 힘으로만 다루는 무기의 총칭. 이에 비해 후대에 화약을 바탕으로 발명된 총, 수류탄, 대포를 열병기라고 한다.)를 마감하는 최후의 병사가 되었고 전력 면에서는 부족했다.

스위스인으로만 구성되는 ‘바티칸 근위병’ 입대식. 사진 위키커먼스
스위스인으로만 구성되는 ‘바티칸 근위병’ 입대식. 사진 위키커먼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용병대 ‘바티칸 근위병’

하지만 스위스 용병들은 명예를 지켰고 고용주에 대한 충성을 배반하지 않았다. 그 결과 스위스 용병은 ‘패배했어도 늘 빛났던’ 군대였다. 전쟁에 지고도 빛을 발했던 대표적 사례가 1527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샤를 5세가 로마 교황청을 공격하였을 때였다.

2만 명이 넘는 군사가 로마 성벽을 넘었고 교황청 외곽의 수비대가 뚫렸다. 당시 교황청에는 수많은 동맹이 있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지원군이 오지 못해, 오직 스위스 용병대와 민간인으로 구성된 시민군 4,500여 명이 로마의 성벽을 지키고 있었다. 황제 샤를 5세의 군대는 가는 곳마다 이겼으나 189명의 스위스 용병은 교황청을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당시의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스위스로 돌아가라고 권고했지만, 그들은 교황 곁을 지켰다. 성 베드로 광장 진입로에 147명의 용병이 버티면서 시간을 끌었고 그 사이에 나머지 용병 42명이 교황을 호위하며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시켰다. 성 베드로 광장에서 2만 명의 군사와 맞선 147명은 모두 전사했지만 스위스 용병의 장렬한 최후는 유럽인들 마음에 신뢰라는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다.

16세기에 교황을 지킨 스위스 용병의 투철한 정신이 18세기 프랑스 대혁명 때 루이 16세를 지킨 일로 이어진 것이었다. 이후에 교황청은 스위스인으로만 근위대를 뽑으라고 못을 박았다. 그 전통이 계속 되면서 현재까지 스위스 용병들이 바티칸 국의 교황청을 지키고 있다. 스위스가 1848년에 연방국가가 되면서 용병수출 금지를 헌법에 명시했으나, 로마 교황의 호위를 맡는 스위스 용병만큼은 예외로 두었다. 그래서 지금도 스위스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바티칸 근위병 Vatican’s Swiss Guard’을 운용하고 있다.

국가 이미지의 초석이 된 용병 정신

오늘날 스위스는 알프스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정치적 중립성, 높은 국민소득, 낮은 실업률 등으로 가장 안정된 선진국이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과거의 스위스는 먹고 살기도 어려웠던 나라였다. 그래서 용병을 자처해 해외로 간 스위스 남자들은 목숨이 위태로웠을 때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는 조상 때부터 먹고 살기가 힘들었어. 지금도 고향의 가족과 친척들은 어렵게 살고 있잖아. 다행히 이런 기회가 와서 내가 받는 돈으로 가족이 먹고 살 수 있으니 너무 고마운 일이지. 그런데 지금 내가 죽는 게 두려워서 도망간다면 어떻게 될까? 생명을 건질 수는 있겠지.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나면 유럽의 왕들이 우리나라를 뭐라고 생각할까? “스위스 사람들은 믿을 만하지 못해. 계약을 해놓고 급하면 줄행랑을 치는 아주 치졸한 국민이야.”라고 한다면 앞으로 누가 우리에게 일거리를 다시 주겠어? 가족과 자녀들이 앞으로 계속 먹고 살 길을 마련해둬야 해. 그러려면 지금 내가 가족들을 위해 희생하는 건 당연한 것이야. 사람들 마음에 ‘스위스 용병은 정말 믿을 만해.’라는 신뢰가 깨지지 않도록 꼭 지켜야 해.’

당장 가족의 생계와 멀리 후손의 먹거리까지 생각하면서 자신의 희생을 선택한 스위스 용병들은 신뢰의 가치를 아는 지혜로운 사람들이었다. 목숨을 담보 삼아 지킨 그 정신이 금융업과 제약, 시계제조업에 그대로 계승되어 오늘날 국가 이미지의 바탕을 만들었다.

사진 프리픽
사진 프리픽

목숨을 다해 지키고 싶은 대상이 있는가?

전쟁은 인류가 생겨나면서 시작된 아주 오래된 ‘자연 현상’이다. ‘승리’라는 불변의 목표를 가진 전쟁은 일단 시작되면 싸워 이겨야 한다. 이기면 대가가 있지만, 패배하면 좌절과 공포 속에 살거나 아니면 죽는다. 그래서 군인 정신은 전세가 밀릴 때 그 진위가 드러난다. 양쪽 어깨에 가족의 생계와 후손의 미래를 각각 짊어진 스위스 용병들은 다른 나라 용병들처럼 무자비하게 굴지 않았다. 지켜야 할 대상이 분명했기에 전쟁터에서 뒷걸음질도 할 줄 몰랐다. 자신이 서약한 고용주에 대한 충성과 신용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도 예기치 않은 모퉁이에서 수세에 몰릴 때가 있다. 그럴 때 목숨을 바칠 만큼 간절한 무엇이 내 안에 있는가? 죽으라는 말이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목숨만큼 중요한 대상이 있는지, 그 대상을 지키고 싶은 열정이 있는지, 자문해보자는 것이다. 죽음을 불사할 무엇이 내면에 있을 때 사람은 고결해진다. 그때가 사람은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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