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룬디 전 대통령 영부인, 데니스 은쿠룬지자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갑작스레 소낙비가 내렸다. 커다란 박쥐우산으로도 가려지지 않을 만치 빗줄기가 굵었다. 조금 전, 마주앉아 인터뷰했던 데니스 은쿠룬지자 전 영부인은 살면서 돌연히 만난 소낙비가 많았다고 했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큰 목소리로 희망을 외쳤다. 우산 쓴 채로 비에 젖은 그날, 신기하게도 마음은 쾌청했다.

데니스 부쿠미 은쿠룬지자 Denise Bucumi-Nkurunziza 1969년 생. 부룬디 5대 대통령을 지낸 피에르은쿠룬지자가 남편이다. 2005년부터 2020년까지 영부인으로 있었고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현재 교인 수가 5만 명인 반석교회 대표 목사이다. 고아와 과부, 노인, 장애자 등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해 2005년 분투재단BUNTU FOUNDATION을 만들었다. 2013년에는 프랑스어로《희망의 힘:THE POWER OF HOPE》자서전을 출간했다.인물사진 손은석  사진제공 분투재단

‘희망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시작된다.

빛이라곤 한 올도 없는 어둠이 진저리 칠 때 고집스런 희망이 솟아난다.

그때 희망은 우리 마음에서 ‘포기’라는 글자를 지워버린다.

어둠의 터널에서 헤맨 사람은, 거기서 뜻밖의 희망을 발견한 사람은,

그래서 포기라는 말을 할 줄 모른다.’

스물여섯 살의 젊은 주부 데니스 은쿠룬지자가 남편과 생이별하고 살아야 했던 세월 동안 깨달은 것이 희망이었다. 당시 둘째를 임신 중이었던 그는 어느 날 남편이 정치 투사로 돌변하면서 단란한 가정의 꿈을 접어야 했다. 부룬디대학교 체육과 강사였던 남편은 캠퍼스에 침입한 투치군이 후투족을 공격해 대학생 200명을 살해한 1995년 사건 현장을 우연찮게 목격했다. 이후 남편은 반정부 투쟁에 참가해 후 투족 민주방위국민평의회CNDD-FDD의 일원이 되었다. 남편은 아내와 아이들을 남겨둔 채 집을 떠나야 했고, 아내는 주변으로부터 감시의 눈총을 받으며 홀로 두 아들의 생계를 책임졌다. 가장 침울했고 가장 절망스러웠기에, 때때로 그도 희망을 잃었다 되찾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길을 선택했고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다.(참고로, 1962년 벨기에로부터 독립한 부룬디는 기독교가 대표 종교다. 이 나라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언제 어디서든 자주, 자연스럽게 대화에 언급한다.)

9년 후, 교육계에 있던 남편이 정치 지도자가 되어 돌아왔다. 얼마 뒤 남편이 이끄는 정당이 총선에서 승리해 상원과 하원 의석을 압도적으로 차지했고, 남편은 2005년 대선을 거쳐 부룬디 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반군의 아내로 얕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책 읽기가 취미였던 문학소녀는 꿈에도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퍼스트 레이디’가 된 것이다.

영부인이라는 공인公人으로 15년을 보낸 그는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남편과 다시 이별해야 했다. 어느 날 집을 떠났었던 남편은 아내가 집을 비운 어느 날 다시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코로나에 걸려 케냐 나이로비에 와 있던 그는 영면에 들었다는 남편의 소식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영부인의 자리에서 물러나 3년이 흐른 지금, 목사로서 제 2의 인생을 펼치고 있는 그가 비행기를 타고 멀리 한국땅을 밟았다.

IYF 설립자 박옥수 목사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그는 11년 만에 만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사진 IYF

반갑습니다. 어떻게 한국을 방문하셨나요?

벌써 11년 전 일이네요. IYF 설립자 박옥수 목사님이 부룬디를 방문하셨을 때 대통령궁에 오셔서 저희 부부를 만나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뵙고 좋아서 꼭 다시 만나고 싶었어요. 이번 여름 월드캠프에 저를 초대해 주셔서 한국에 처음 왔습니다. 목사님이 여전히 건강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해주셔서 놀랍고 감사했습니다. 청소년에 초점을 두고 교육을 하는 목사님이 이 시대에 진정한 리더라고 봅니다. 청소년은 그 나라의 미래 아닙니까? 청소년들이 멍들어 있는 나라는 비전이 없는 나라입니다. 젊은 리더들을 제대로 양성하려면 청소년을 어려서부터 마인드교육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영부인께서는 청소년 시절을 어떻게 보내셨는지 궁금하네요.

저는 미안하게도 제 또래들보다 운이 좋았어요. 부유한 집안의 열 번째 자녀로 태어났고, 아버지가 학비를 대주셔서 고등학교까지 걱정 없이 다닐 수 있었어요.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 아이들에게 꿈과 미래를 생각하라고 하지만, 우리 어린 시절엔 오늘 먹고사는 게 어려워서 먼 미래를 고민할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오늘이 있기까지 성장 과정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이나 책이 있으신가요?

그럼요.(눈이 밝게 빛나면서 단호하게 답했다.) 성경이에요. 특히 구약에 나오는 세 여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첫 번째, 민족을 구한 에스더에게서 기도와 금식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 저는 어려움이 있을 때면 먼저 기도합니다. 두 번째 여인은 다윗의 아내가 된 아비가일입니다. 남편의 무지한 판단으로 자신과 온 집안이 죽음에 내몰리게 되자 은혜를 구한 겸손하고 지혜로운 여인입니다. 세 번째는 이세벨입니다. 아합의 아내로 성경에는 악하고 잔인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세벨은 제게 이렇게 살면 안된다는 경계의 교훈을 준 여인이죠. 이세벨의 최후를 생각하며 저는 남편에게 조언할 때 그냥 떠오르는 말을 옮기지 않았어요. 생각하고 또 생각을 거듭해서 입을 열었습니다.

그의 남편 피에르 은쿠룬지자 대통령이 2012년에 대통령궁으로 박옥수 목사를 초청해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 IYF

정말 지혜로우시네요. 남편 분과의 만남과 헤어짐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대학교 섬머캠프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남편은 대학생이었죠. 거기서 책을 열심히 읽고 있는 모습이 무척 좋아보였어요. 남편은 스포츠도 잘하고 뭐든 만능이었죠. 우리는 자연스레 친구가 되었고, 학교 공부를 계속했어요. 알고 지낸 지 6년 가까이 되면서 서로 사랑한다는 걸 확신했고 1994년에 결혼을 했죠. 하지만 정치적 이유로 떨어져 지내야 했을 때 제가 많이 힘들었어요. 그땐 어렸거든요. 오래 기다린 남편이 돌아왔고 우리는 다시 한가족이 되었죠. 자녀를 셋이나 더 낳았고, 남편의 지지로 뒤늦은 나이에 대학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했어요. 하이라이트 같던 시절이었죠.

인생이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 아니겠어요? 이 세상에서 마지막 헤어짐이 사별일 테고요. 대통령 직에 있던 남편에게 갑작스레 심장마비가 왔고, 그때 저는 멀리 케냐에 가 있었어요. 사람이 죽고 사는 건 하나님의 영역이기에 저는 남편을 데려가신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곁에서 임종을 지키진 못했지만, 남편 소식을 듣고부터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하나님, 저에게 힘을 주셔서 이겨내게 해주세요. 아이들이 아직 어린데 하나님이 잘 키워주세요.” 이렇게 기도했어요. 저는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았고 목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전쟁 과부와 생계가 어려운 노인들에게 후원 받은 생활필수품을 나눠주고 있다.
그의 자서전 표지. 제목처럼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을 믿는 힘이 곧 희망이다. 책의 서문은 엘런 존슨 설리프 라이베리아 전 대통령이 써주었다.

한 나라의 영부인으로 지낸 15년을 짧게 회고해본다면요?

영부인이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지 않냐고 말해요. 하지만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책임감만 큽니다. 영부인이 되고서 제 생활방식도 이전과 많이 달라졌어요. 우선 아무 데나 갈 수 없고 아무나 만날 수도 없어요. 일정한 네트워크 안에서 움직여야 하니까요. 한마디로 자유가 굉장히 축소됩니다. 시장도 못 가고 처음엔 제약이 많아서 갑갑하기도 했어요.

다행히도, 교회에 예배 드리러 가는 것은 막지 않아서 고마웠어요. 제한된 환경안에 있다 보니 제가 기도를 많이 하고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게 됐어요. 금식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으로 먹으며 절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유엔인구기금과의 협력을 통해 그는 산모와 아이의 건강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유엔인구기금과의 협력을 통해 그는 산모와 아이의 건강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영부인이 설립한 분투재단 산하의 고아원에서는 아이들이 스스로 먹고 행동할 수 있는 5~6세가 될 때까지 단체생활을 통해 훈육한다.  
영부인이 설립한 분투재단 산하의 고아원에서는 아이들이 스스로 먹고 행동할 수 있는 5~6세가 될 때까지 단체생활을 통해 훈육한다.  

목사로서 분투재단을 이끌며 더 많은 가족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제가 영부인이 되고 가장 먼저 설립한 자선 단체가 분투재단입니다. ‘분투’는 키룬디어로 ‘자비와 은혜’를 뜻합니다. 우리 단체는 에이즈와 HIV(후천성면역결핍증)으로 생긴 고아와 과부, 취약 계층에 속하는 노인, 장애인, 빈민이 사회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아프리카는 청소년 인구가 주류지만 태어나면서 엄마를 잃은 아이들도 많습니다. 이들이 스스로 생존할 수 있을 때까지 누군가 보살펴야 하는데, 우리가 그런 일을 합니다.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와 살아도 될 5~6세가 될 때까지 돌봐줍니다. 또한 전문 기술교육을 받을 고아들을 선발해 인도의 대학으로 유학을 보내고, 분투 전문훈련 센터에서는 고아들이 앞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양재 기술을 가르칩니다. 또 우리는 아이들이 먹을 옥수수, 고구마, 야채도 직접 농사짓습니다.

한창 자랄 아이들에게 고기를 좀 먹이려고 양계장에서 닭도 키워요. 아이들이 쑥쑥 자라면 기쁘잖아요. 이런 작은 일들이 강대한 부룬디를 만드는 데 필요한 나사가 되리라고 봅니다. 제가 말씀드렸지만 청소년들은 나라의 자산, 부입니다. 제가 목사로서 있는 지금, 교회의 미래 또한 청소년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청소년의 몸과 마음을 살리는 일, 그게 제가 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와 함께 한국을 방문한 수행원이 “지금도 영부인이 부룬디에서 국모國母로 존경을 받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이유를 물으니 세 가지로 답한다. 첫째, 역대 영부인 중에 가난한 국민을 마음으로 생각해 준 첫 영부인이고, 둘째는 가난한 국민들과 실제 연결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셋째로 개인적 배후가 좋든 나쁘든 모든 사람을 품어 안는 영부인이라서 그렇단다.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목사가 된 영부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담았기에 사랑을 숨길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의 곁에 서면 누구나 따스하고 푸근하고 편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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