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작가는 2017년 6월 9일 tvN에서 방송된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알쓸신잡)’ 프로그램에서 옥중에서 쓴 《항소이유서》에 얽힌 뒷이야기를 밝혀 시청자들을 놀라게 했다. 14시간에 걸쳐 썼으며 퇴고*(推敲 : 글을 다시 다듬고 여러 번 고치는 것을 의미한다.)는 하지 않았다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200자 원고지 100장 분량의 글을 첫 문장부터 끝 문장까지 미리 생각하고 수정 없이 완성했다고 털어놓았다. 당시 그는 26살이었다.《항소이유서》는 명문장으로, 유시민 작가가 대중적 명성을 얻는 데 큰 몫을 하였다. 유 작가가 1984년 ‘서울대 프락치 사건’에 연루돼 1심에서 1년 6개월을 선고받은 뒤 항소하며 쓴 글이다. (배효주, 뉴스엔, [어제TV] 청년 유시민, 일필휘지 써내려간 항소이유서 뒷얘기, 2017년 6월 10일)

초고와 퇴고 없이 썼다는 점이 놀랍다. 유시민 작가는 당시 복역 중인데다, 먹지를 대고 복사본을 만들어야 해서 마음껏 고쳐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수정하려면 그 페이지를 처음부터 다시 써야 했다. 그 수고를 피하려고 구상을 완벽히 하고, 한자漢字도 실수 없이 쓸 수 있게 미리 익혀두는 등 준비를 철저히 했다. 그런 과정 후 일필휘지一筆揮之해서 탄생한 게《항소이유서》였다.

‘일필휘지’는 글 좀 쓴다는 사람들, 심지어 전문작가들마저 기죽게 만드는 말이다. 문단에서도 단숨에 써 내려갔다는 몇몇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소설가 최인호는 과거 언론 인터뷰에서 일필휘지했던 경험을 직접 털어놓은 적이 있다.

“초창기 단편 중에 《술꾼》이라는 거 있잖아. 1966년이니까 내가 스물한 살 때죠. 누나네 집에서 누나를 기다리다가 심심해서, ‘쓸까?’ 혼자 중얼거리며 누나 노트를 펴서 그걸 썼어요. 두 시간 만에 작품을 썼어요. 또 문학과지성사에서 ‘내일 넘겨줄 작품 있소?’라고 묻길래, ‘예’라고 답변했는데 집에 와보니까 완성된 작품이 없어요. 그래서 《타인의 방房》이라는 작품을 그날 밤새 썼어요.” (최보식, [Why] “별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2007년 9월 14일)

최인호 작가는 그냥 추억을 이야기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그 말에 주눅 들고 질투를 느끼지 않았을까?

유시민, 최인호 작가의 사례는 아주 특별하고, 예외적인 경우다. 그런 일필휘지는 전문작가들조차도 힘든 일이다. 보통 사람은 꿈도 꿀 수 없다. 대부분 글은 고치고, 고치고 또 고쳐서 완성한다. 글을 쓰는 과정을 표현하는 사자성어는 일필휘지보다 절차탁마切磋琢磨가 더 어울린다. 단어의 뜻처럼, 작가들은 글을 자르고 갈고 쪼며 다듬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초고를 고치고 또 고치고 다시 고친다.

실제로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무기여 잘 있거라》 마지막 부분을 39번이나 고쳐 쓰고야 만족했으며,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의 인쇄 교정쇄가 나올 때까지도 고쳐 썼다고 한다. 유명 작가들의 이런 일화는 너무나 많다. 우리나라 출판계에선 한비야 작가의 고치기 에피소드가 유명하다. 그가 붉은 펜으로 고친 교정지는 ‘피바다’로 불렸다. 책이 출간되고 나서도 인쇄할 때마다 고쳤다. 20쇄 넘게 인쇄한 책도 고쳤다. 마침내 편집자에게 사실이 틀렸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손대지 않겠다고 각서를 써야 했다. 그는 이 이야기를 《그건, 사랑이었네》에 털어놓았다.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 이후 그가 내는 책마다 베스트셀러가 된 비결은 ‘고치고 또 고치기’였다. (한비야, 《그건, 사랑이었네》, 푸른숲, 2009년 8월, 115, 116쪽)

글 쓰는 사람은 대부분 자기가 쓴 글을 못살게 군다. 쓸 때 만족했더라도 돌아서면 고치고 싶어 한다. 고치면 원문이 나은 듯해서 수정을 망설인다. 마침표를 찍고도 미련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한다. 더 나은 글을 쓰려는 글쟁이들의 집착은 말릴 수가 없다.

2020년 조정래, 황석영, 이문열 작가는 모두 개정판을 냈다. 조정래 작가는 대하소설 3부작 《태백산맥》,《아리랑》,《한강》을 고쳐 썼다. 황석영 작가는 《삼국지》를 수정했다. 이문열 작가는 《사람의 아들》을 다섯 번째 손봤다. 《사람의 아들》은 1979년 중편소설로 발표됐다가 1987년 장편으로 개작됐다. 이들 이외에도 개작하는 작가들은 많다. 개작에는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려는 열의, 제대로 된 작품을 내놓으려는 작가의 책임 의식이 담겨 있다.

프랑스 작가인데 한국서 더 유명하고 인기 있는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는 출세작 《개미Les Fourmis》를 120번 고쳐 썼다고 다양한 매체에 소개돼 있다. 베르베르는 12살 무렵부터 개미를 관찰하기 시작해 30살이었던 1991년에 《개미》를 발표했다. 쓰기 시작한 지 12년 만이었다. 고쳐쓰기는 작가들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베스트셀러 《불편한 편의점》,《망원동 브라더스》를 쓴 김호연 작가는 두 번째 장편소설 《연적》의 작업 과정을 《매일 쓰고 다시 쓰고 끝까지 씁니다》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초고를 지지고 볶고 두루치기하고 꼬고 비틀고 담그고 숙성시켰다.” 그는 또 “모든 초고는 쓰레기였고, 쓰기는 고쳐쓰기였으며, 작품의 완성이란 불가능하고 마감에 맞춰 작업을 멈출 뿐이었다.”라고 덧붙였다. (김호연, 《매일 쓰고 다시 쓰고 끝까지 씁니다》, 행성B, 2020년 11월, 12, 213쪽)

무라카미 하루키는 《기사단장 죽이기》를 내고 가와카미 미에코川上未映子와 가진 대담에서 결국 ‘고쳐쓰기’를 통해 독자의 호응을 얻는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대담을 모은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처음에 일단 완성해놓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고치고, 갈고 닦고. 이대로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손대는 과정에서 점점 나 자신의 리듬, 잘 울리는 보이스를 찾아가죠. 눈보다는 주로 귀를 사용하며 고칩니다.”라고 설명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기사단장 죽이기》도 처음엔 그냥 닥치는 대로 써서 10개월 만에 초고를 완성했다. 이후 컴퓨터 화면에서 4개월에 걸쳐 4번 고쳐쓰기를 했다. 그리고 프린트해서 2번 더 고쳐 원고를 마무리했다. 이후에도 4차례나 교정하고 ‘OK’라고 했다. 원고 완성까지 6번 고쳐 쓰고, 4번 교정한 것이다. 모두 합쳐 10번 그의 손을 거쳐 《기사단장 죽이기》가 세상에 나왔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것도 적은 편이었다고 말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와카미 미에코 지음, 홍은주 옮김,《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문학동네, 2018년 8월, 47쪽)

베스트셀러 《대통령의 글쓰기》,《나는 말하듯이 쓴다》를 낸 강원국 작가는 “나는 글을 두 단계로 나눠 쓴다. 1단계로 쓰고, 2단계로 고친다.”고 말했다. 그는 잘 쓰는 사람은 잠깐 쓰고 오래 고친다고 덧붙였다. 글을 못 쓰는 사람들은 고통스럽게 오래 쓰는 경향이 있다. 이런 스타일은 머릿속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이다. 허공에 썼다 지우고 고치기까지 해야 한다. 어지간해서는 따라 하기 힘든 글쓰기다. 쓰다가 지치기 마련이고, 쓰고 나선 고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강원국, 우리가 헤밍웨이나 톨스토이와 같은 점이 있다면, 오마이뉴스, 2018년 5월 9일)

글 고치기와 관련해서 유명한 분은 생태학자이자 동물행동학자인 이화여대 최재천 석좌교수가 꼽힌다. 다음은 유튜브 강연에서 자신의 글쓰기와 관련해서 한 표현이다.

“소리 내서 읽으면서 제가 들을 때 약간 불편하면 가차 없이 집어 던지고 다시 씁니다. 읽으면서 숨이 차면 그건 좋은 글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읽으면서 아무 어려움 없이 그렇게 흘러갈 때까지 고치고, 고치고, 고칩니다. 지금 제 신문 고정 칼럼이 천 자도 안 됩니다. 근데 그거 쓰기 위해서 거짓말 요만큼 보태면 한 50번 고쳐 씁니다. 다시 쓰고, 다시 쓰고, 고치고, 고치고, 저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고요. 글을 치열하게 쓰는 사람입니다.” (최재천, 독서는 ‘일’이어야만 한다(최재천 교수 레전드 강연), 유튜브(체인지그라운드), 2020년 9월 12일)

‘저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고요. 글을 치열하게 쓰는 사람’이라는 대목이 찌릿하게 와닿는다. 세상은 재능보다 정성에 무릎 꿇는다. ‘한 50번 고쳐 씁니다’, 이 대목에서 고개를 떨구지 않을 글쟁이가 몇이나 될까. 최 교수는 그렇게 글을 갈고 다듬어 공저와 번역서까지 포함해 90권이 넘는 책을 썼다.

뭘 고쳐야 할까? 문장은 간결하게 정리해야 한다. 주어와 술어가 호응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부사나 형용사 등 꾸밈말이 과하지 않게 줄여야 한다. 문장이 물 흐르듯 이어지게 해야 한다. 같은 서술어가 연이어 나오지 않게 해야 한다. 피동형 문장은 능동형 문장으로 바꿔주는 게 좋다. 적확的確한 단어가 쓰였는지 확인해야 한다. 글이 논리적으로 또 구조적으로 잘못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

글은 다듬고, 다듬고, 그리고 또 다듬어도 부족하다. 뒀다가, 묵혔다가 꺼내서 다시 다듬어야 하는 게 글이다.

글쓴이 이건우

책 쓰는 법을 연구하고 강연한다. 현재 일리출판사 대표이다. 조선일보 편집국 스포츠레저부, 수도권부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스포츠투데이 창간에 참여했으며, 편집국장으로서 신문을 만들었다. 서울 보성고, 고려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다. 저서로는《엄마는 오늘도 책 쓰기를 꿈꾼다》,《직장인 최종병기 책 쓰기》,《누구나 책 쓰기》가 있고,《모리의 마지막 수업》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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