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찌도 행복한 학교가 있다

나는 예술성이 풍부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친할아버지는 연극에 조예가 깊었고, 내 어린 시절 기억에도 노년에 꽹과리를 하나 들고 취미로 지역의 풍물패를 이끄셨다. 그래선지 친가 쪽 사람들은 풍류가 넘치는 편이다. 나 또한 음감이 좋아서 관련 전공자는 아니지만, 가요나 영화 ost를 들으면 청음만으로도 피아노로 곧잘 치고 편곡도 한다.

반면에 나의 엄마는 살림을 억척스럽게 일구고, 자식을 성공시켜서 집안을 일으키는 강인한 어머니상이다. 덕분에 고향인 대전에서 학구열이 가장 높은 동네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장영란 같은 개그우먼이 되고 싶어 했지만, 카이스트와 맞닿아 있는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그곳은 정재계 인사의 자녀들이 많았고, 형편이 넉넉지 않은 나는 일주일에 과목별로 여섯 개씩 고액과외를 받는 친구들과 경쟁해야 했다. 엄마는 나 때문에 산다고 하는데,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해도 우리 학교는 모범생들만 모이는 곳이어서 성적이 잘 오르지 않았다. 그 즈음에 나는 많이 예민해서 신경성 위궤양과 위염을 달고 살았고, 체중이 10킬로그램 이상 줄었다. 시험 기간에는 자주 급체를 했다.

그러다가 내가 ‘독일’을 만났다. 수능 성적대로 대학에 진학한 후, 별 의미 없이 다니던 학과 2학년 말에 교환학생을 신청해 독일에서 몇 년간 지냈다. 내가 살았던 괴팅겐은 옥스퍼드나 에든버러처럼 유명한 대학도시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대학교이고, 50여 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해 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학자인 가우스와 그림형제 등이 바로 이곳 출신. 전 세계에서 온 학생들이 평화롭게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자연스럽게 독일의 교육시스템을 유심히 보았다.

가족들과 재작년에 독일로 가서 한 달을 보냈다. 괴팅겐의 상징인 겐젤리젤 동상 앞에서 함께 사진을 찍은 야니차(30)는 한국에 오면 우리집에서 지내고, 매달 엽서를 주고받을 만큼 친하다. 사진제공 이나경
가족들과 재작년에 독일로 가서 한 달을 보냈다. 괴팅겐의 상징인 겐젤리젤 동상 앞에서 함께 사진을 찍은 야니차(30)는 한국에 오면 우리집에서 지내고, 매달 엽서를 주고받을 만큼 친하다. 사진제공 이나경

가진 게 사람밖에 없었던 나라 대한민국은 이제 출산 저조로 영국의 BBC에서도 ‘인구감소 추세로 볼 때 세계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보도된다. 장차 수도권 빼고는 젊은이들을 보기가 힘들어질 것이고, 더 많은 대학이 학생들이 없어서 통·폐합될 것이다. AI와 챗GPT로 노동시장에서 인력이 줄면서 일을 잘 하는 사람보다는, 독창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로 질문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리라 예상된다. 입시 위주의 한국 공교육이 위와 같은 미래의 인재상을 받쳐 줄 수 있을까? 현재 결혼 후 아들딸 둘을 낳아 기르고 있지만, 내 아이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하기보다 세상살이에서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빈다. 지금 우리에게는 지식보다 토론과 경험 축적을 중시하는 독일 교육에서 벤치마킹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침, 독일로 이민 가서 두 자녀를 교육시키고 있는 전 YTN 앵커 정병진 씨와 화상으로 만나 독일 교육의 강점에 대해 들어본다.

정병진(독일 4년 차 교민, 전 YTN 앵커)

지식 축적보다 생각의 힘 기르기

그의 앵커 재직시절 모습. ‘어떻게하면 시청자들이 좀 더 편안하면서도 직관적으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저널리즘적으로 하루하루 치열하게 고민했다. 사진제공 정병진
그의 앵커 재직시절 모습. ‘어떻게하면 시청자들이 좀 더 편안하면서도 직관적으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저널리즘적으로 하루하루 치열하게 고민했다. 사진제공 정병진

언론학을 전공하셨는데, 멀리 독일로 이민을 가셨네요.

한국에 있을 때 저는 주로 8시나 10시 뉴스를 진행했어요. 요즈음은 리포터든 아나운서든 구분이 없어진 시대잖아요. 직업의 미래에 대한 고민이 깊었어요. 교육이 주된 니즈는 아니었지만, 독일은 교육체계가 좋다고 들은 적이 있었어요. 이민이 쉽지는 않지만, ‘내가 방송국 앵커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했던 노력이면 어디를 가든지 먹고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어느덧 독일 4년 차인데 현재 스태티스타라는 회사에서 한국 기업에게 컨설팅해 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생활이 많이 여유로워졌어요.

 ‘Newsdaddy’의 유럽 라이프. 정병진 전YTN 앵커의 이민 이야기와 이에 대한 정보, 독일 이야기 등을 볼 수 있다. 사진 정병진의 유튜브와 인스타 계정
 ‘Newsdaddy’의 유럽 라이프. 정병진 전YTN 앵커의 이민 이야기와 이에 대한 정보, 독일 이야기 등을 볼 수 있다. 사진 정병진의 유튜브와 인스타 계정

그렇게 보이세요(웃음). 말씀에서부터 왠지 편안함이 느껴져요.

저는 저희 가족이 이곳으로 잘 왔다는 생각을 해요. 물론 독일에서도 학부모들이 자녀가 블루칼라 직종이 아닌 화이트칼라의 고소득 직업을 갖길 바라요. 의대나 법대 등은 특별히 학생들이 몰리고 커트라인도 높고요. 하지만 다민족 국가이기 때문에 공교육에서도 획일적인 관점이 아닌 학생 개인의 성장하는 속도를 존중하고, 이런 환경을 마련하는 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요. 각 주州마다 차이가 있지만 유치원에서도 아이의 성장 속도에 따라서 교사와 상담 후 바로 학교에 입학시키지 않고 한 학년을 더 다니는 경우도 많고요. 각 학교나 유치원에 미국의 프리스쿨처럼 포어슐레VorSchule 과정이 개설되어 있어서 다닐 수 있어요.

저희 큰딸만 하더라도 작년에 와서 입학하고, 올해 1학년을 다시 다녀요. 한국에서라면 주변에서 학교생활에 적응을 못 하는 학생이라는 걱정을 받았겠지만, 독일에서는 보편적으로 한두 살 터울인 아이들이 한반에서 친구가 됩니다. 담임선생님께서도 학부모 상담 시간에 딸아이를 두고 “지금은 놀아야 될 때”라며 “놀면서 독일의 정서와 문화를 체득하고 친구들과 교류해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또 “그게 바로 독일의 초등교육”이라는 말도요.

여기서 보니 독일의 초등교육은 따라오지 못하는 학생이 없을 만큼 진도가 굉장히 느리고, 학습량이 적고 수준도 심화하지 않아요. 2, 3학년이 되어도 글을 쓰지 못하는 아이도 많고요. 학교에서는 ‘글자를 빨리 배우면 생각이 문자에 갇힌다.’며 어린 시절에 자유롭게 상상하는 걸 중요시해요. 아베체데(독일의 알파벳)는 오디오북이나 부모님이 책을 읽어주는 걸 들으며 자주 접하는 문자를 중심으로 스스로 깨치도록 합니다. 여섯 살짜리 저희 둘째도 문자를 전혀 배우지 않고 있어요. 확실히 어떤 상황을 이해하거나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방식이 첫째보다 자유롭고 기발한 게 느껴져요.

정병진 씨의 딸이 친구들과 뛰노는 모습. 독일에서는 초등학생을 모래밭을 뒹굴고 나무에 오르는 등 자유롭게 놀게 한다. 사진 정병진
정병진 씨의 딸이 친구들과 뛰노는 모습. 독일에서는 초등학생을 모래밭을 뒹굴고 나무에 오르는 등 자유롭게 놀게 한다. 사진 정병진

그런 독일의 교육 문화에 적잖이 놀라셨을 거 같아요.

맞아요. 우선 선생님들이 집에서 선행학습을 하는 것에 대해서 경계하세요. 저희 아이들이 지금은 독일어를 모국어처럼 능통하게 쓰는데요. 이민 초기에는 코로나 사태로 등교하지 못한 채 1년간 유튜브로 수업을 듣고 프린트물로 문제를 풀었거든요. 하루는 아이가 독일어에 익숙지 못해서 진도를 따라가지 못할까 봐 집에서 먼저 문제를 함께 풀었어요. 선행학습을 시키려는 의도가 아니었지만, 선생님께 공식적으로 이런 메일을 받았습니다(웃음).

“문제를 잘 풀고 못 푸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함께 정규과목을 익히고 원리를 깨우치는데 시간이 필요한데, 따님이 혼자서 먼저 문제를 풀어버리면 다른 아이들은 그 문제에 대해서 고민할 기회가 박탈됩니다.”라며 “또 자칫 누가 문제를 잘 푸는지 경쟁하는 분위기로 이어질 수 있기에 절대로 집에서 선행학습을 시키시면 안 됩니다.”라고 주의를 받았어요.

한국식 입시용 수학이나 영어를 위한 고액의 사교육은 이곳에 없습니다. 대신에 방과 후 활동으로 펜싱, 하키 등 다양한 예체능을 경험하지요. 그러다가 학생들이 적성에 따라서 실업계인 레알슐레Realschule나 직업교육을 받는 하우프트 슐레Hauptschule, 인문계 고등학교인 김나지움Gymnasium으로 나뉘어요. 이때 김나지움에 가는 학생들은 학습량이 늘어나면서 한국의 과외 같은 나크힐페Nachhilfe를 받기도 해요.

김나지움에서도 졸업 전 직업체험으로 학교에서 추천하거나 본인이 선택한 곳에서 단기 아르바이트를 해야 합니다. 제가 이곳 교육 문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 중 하나에요. 보통은 식당이나 미용실 등에서 많이 하는데 제가 아는 지인은 음악을 하고 싶어서 스튜디오에서 녹음 작업을 하고 있어요.

방학에도 선행학습과 보충학습 없이 이웃나라로 여행을 떠나요. 가까운 프랑스나 오스트리아부터 독일 남쪽의 이탈리아, 북유럽인 핀란드까지 한 반에 90% 이상의 학생들이 여행을 다녀온 후 개학 후 자신이 경험한 나라를 서로 공유하지요. 제가 아는 교민 가족도 얼마 전에 아들을 데리고 스페인 마요르카에서 여름방학을 보냈다고 들었어요.

생일파티 문화가 발달되어서 친구 집으로 가서 노래를 불러주고, 하룻밤 자고 오기도 한다. 사진 정병진
생일파티 문화가 발달되어서 친구 집으로 가서 노래를 불러주고, 하룻밤 자고 오기도 한다. 사진 정병진

그 중에서도 어떤 점을 가장 강점으로 보시나요?

제가 좋아하는 말 중 하나가 발하이마트Wahlheimat에요. 독일어로 ‘자신이 선택한 고향’이라는 뜻으로, 저에게는 지금 사는 함부르크가 바로 발하이마트이지요. 이처럼 독일은 개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요. 교육과정뿐 아니라 사회 시스템 전체가 전반적으로 느리고 신중하면서 견고해요. 이런 점이 바로 ‘속도보다는 방향’이라는 말을 항상 아이들에게 해주는 제 가치관과도 잘 맞고요.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개개인이 각자 자신의 인생의 속도에 맞게 스스로 선택을 하고,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요. 설사 선택에 있어서 실패를 하더라도 학생과 학부모가 토론을 해서 다시 재기할 수 있는 여건들이 얼마든지 있고요. 선택을 하려면 어려서부터 사고력과 판단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에 토론과 글쓰기를 많이 하는 거지요. 큰아이의 숙제를 한 번씩 들여다보면 내 생각은 어떻고, 이유는 무엇이고, 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책 속의 사례를 들고 결론을 마무리하는 글쓰기 숙제가 많아요. 어려서부터 긴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거지요.

공부의 목적이 입시나 취업이 아니기 때문에 김나지움을 졸업하더라도 바로 대학을 가지 않는 경우도 있어요. 1년이든 2년이든 여행을 하고, 단기 아르바이트로 직업을 체험하면서 자신을 찾는 시간을 갖기도 해요. 그럼에도 이곳에서는 각자의 선택을 존중해 주지, 전혀 의아하게 보거나 눈치를 주지 않아요. 독일 내에서 대학을 가지 않더라도 에라스무스라는 제도로 다른 유럽 국가로 대학을 갈 수도 있고요.

지난해 한국에서 부모님이 오셔서 가족과 다 같이 함부르크 근교의 슈베린 성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사진제공 정병진
지난해 한국에서 부모님이 오셔서 가족과 다 같이 함부르크 근교의 슈베린 성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사진제공 정병진

요즘 자녀교육 때문에 독일로 이민을 가는 가족이 많습니다. 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으시다면요?

요즘 한국에서는 엄마들 사이에서 10단위로 더하기 빼기를 연습하는 ‘독일식 계산법’이 유행한다고 들었어요. 교육적인 면에서 독일 이민이나 유학을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이분법적으로 한국식 교육은 나쁘고, 독일식 교육이 좋다는 생각은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학업능력으로 보면 한국의 제 딸아이 또래는 고차방정식도 풀고 이에 대한 심화 학습도 하지만, 제 딸은 이제 고작 사칙연산을 하거든요. 학생이나 학부모님들 중에서는 이런 점을 답답해하시며 못 견뎌하시는 분들도 있을 수 있으니까요.

요즘 산업 전반에 AI와 챗GPT가 출하하면서 변화하는 직업 형태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이곳에서도 답답한 건 마찬가지거든요. 다만 사회 분위기가 한국에 비해서 변화가 느리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런 시스템에 대해서 한국보다 서서히 적응할 수 있고, 깊게 사고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이 있다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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