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꼼하고 집요한 성품을 타고난 나는 학교생활은 물론 사회생활 초반에도 내게 주어진 과제들을 빈틈없이 마무리해야 직성이 풀렸다. 이렇게 하나를 파고드는 ‘나무 지향적’ 성향은 신입 시절엔 제법 강점이 되었다. 업무에 서툴러도 문제를 만들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니, 회사에서 믿고 맡겨주는 일들이 더 늘어갔다.

어느덧 평사원 시절을 거쳐 두 번 이직한 나는 현재 직급이 대리로, 8년차 직장인이다. 묵직해지는 연차만큼 업무 범위와 책임 영역은 점점 커져간다. 회사에서는 한두 가지 일을 꼼꼼하게 해내는 것뿐 아니라, 연간계획과 중장기 전략까지 고민하고 실행해 줄 것을 요구한다. 일간 단위가 아닌 월간, 연간, 3년, 5년, 10년까지, 좀 더 넓은 단위로 계획하고 전체 그림에서 현 위치를 파악하며 조율해 가는 일은 멋지다. 하지만 더 큰 숲을 그려보라는 회사의 요구에 나는 가끔씩 ‘나무 쳐내느라 바쁜데 숲이라뇨?’ 하며 속으로 머리를 가로젓곤 했다.

정신없는 대리에게 상무님이 건넨 말

홍보와 마케팅이라는 큰 범주 안에서 나는 기업 홍보, 사내 커뮤니케이션, 사회공헌, 브랜드 마케팅 등 여러 분야를 경험했다. 현재는 지금까지의 업무들을 포함하는 ‘기업 커뮤니케이션’ 담당자로 일하고 있다. ‘커뮤니케이션’은 어디에나 녹아드는 개념인 만큼 회사에서도 다루는 일의 종류가 다양하다. 부서원이 많지 않아서 한꺼번에 챙겨야 할 내용도 많다. 내 앞에 심어야 할 나무는 점점 늘어나는데 품종은 또 어쩜 모두 다 다른지…. “정신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것 같아 스스로 금지어로 정해두기도 했다. 장대한 비전과 촘촘한 전략 아래 착착 실현하는 이상적인 KPI*는 아득해져 가고, 당장 눈앞의 할 일 리스트를 지워가기에 바빴다. *KPI : Key Performance Indicator의 약자로 핵심성과 지표를 말한다. 특정 기간 동안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정하고 해당 목표를 얼마나 달성했는지 평가할 수 있는 기준과 전략을 설정해 둔 것이다.

그러다 하루는 우리 조직을 총괄하는 상무님과 정기 면담을 할 기회가 생겼다.

업무적인 고민들을 털어놨다.

“정신없이 나무만 쳐내는 것 말고 숲을 보고 싶은데 잘 안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숲은 나같이 멀찍이 떨어져 있을 때 보이는 거고요. 사원, 대리 때는 나무를 잘 가꾸는 것이 중요한 능력이죠. 잘하고 있어요.”

사진 프리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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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님은 먼저 격려를 해주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이어가셨다.

“숲을 보려면 일의 취지와 목표를 놓치지 않고 있으면 됩니다.”

지금 이 업무를 왜 하는 것인지, 그래서 이루려는 목표물은 무엇인지를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취지와 목표를 생각하면서 업무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중요도에 따라 주어진 시간 내에 처리하는 연습을 해보라고 조언해 주셨다. 시간 관리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의식적으로 연습하지 않으면 절대 늘지 않는다며 업무가 몰리는 바쁜 시기일수록 의식적인 훈련을 하면 좋다고 하셨다.

조 대리, 번아웃을 거부하다

마음이 에너지드링크를 마신 느낌이었다. 면담 후로 업무별 ‘취지’와 ‘목표’를 적으며 일하는 연습을 했다. 그 연습이 빛을 발한 것은 얼마 전 일이다. 일 년에 한두 번 일이 유독 몰리는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가지를 뻗쳐대는 각양각색 나무들 때문에 3주 연속 매일같이 추가근무를 해야 했다. 면담 효과로 마음은 달려가는데 몸이 따라와 주지 못해 기어코 소화불량과 두통이 찾아왔다. 그날 밤도 혼자 야근을 하다가 느지막이 사무실을 나와서 뻑뻑해진 눈을 끔벅거리며 걸었다. 문득 ‘무슨 부귀 영화를 누리자고 이렇게까지 일을 하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이 문장 뒤엔 ‘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되는데?’가 이어지고 ‘서럽다. 힘들다. 다 짜증나!’로 마무리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면서 ‘번아웃’*이 찾아오는 것이 샐러리맨들의 정해진 경로다. 그 흐름을 무시하고, 나는 면담 내용을 활용해보기로 했다.

마음은 숲을 향하도록

회사 업무에도 취지와 목표가 있듯이 내 회사 생활에도 취지와 목표가 있지 않겠는가. 노트를 펴서 적기 시작했다. 나는 왜 회사 생활을 하는가(취지=목적=why). 이곳에서 이루고 싶은 건 무엇인가(목표=결과=what). 내 회사 생활의 목적은 ‘집중 야근과 열일 끝에 기어코 내가 맡은 업무를 잘 끝마치는 것’이 아니다. 곰곰이 적어가다 보니 ‘일을 통해 나를 훈련하고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능력 만들기’라는 1차적인 목적과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영감을 주는 사람이 되기’라는 2차 목적이 선명해졌다. 이 목적을 위해 회사에서 얻고 싶은 목표 지점은 기업 커뮤니케이션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처리해야 할 업무와 개인적인 상황들 같은 눈앞의 나무들을 잠깐 벗어나 나만의 숲을 차분히 그려보니 왠지 힘이 났다. 체력의 한계가 마음의 한계로 그대로 연결되지 않는,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마음이 중심을 잡고 서 있으면 몸이 좀 지쳐도 다시 회복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이 바닥을 치면 몸이 회복되어도 진짜 ‘힘’은 나지 않는다. 마음이 지친 것 같다면 나는 지금 이 일을 왜why 하는지, 무엇what을 얻고 싶은지 적어보자.

why를 이루기 위한 what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얼마든 수정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마음껏 나만의 숲을 그려보면 좋겠다. 그리고 힘이 필요할 때 꺼내보자. 내가 그려둔 숲이 선명할수록 마음의 중심을 잘 잡아줄 수 있다. 우리에겐 나무에 광을 내는 시간도 필요하지만, 결국 더 멋진 숲을 만들어 가기 위한 나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글쓴이 조민지

90년대생 8년차 기업 커뮤니케이터. 서울대 언론정보학과에서 공부하고 L사, C사 에서 실무를 배웠으며 현재 H사 기업 커뮤니케이션 전략가로 활동하고 있다. 기업과 개인 구성원 간의 ‘더 좋은 커뮤니케이션’이란 무엇인지 고민하고 답을 찾으면서 그는 배우는 설렘과 소통하는 기쁨을 쌓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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