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 후 뭘 해야 할지 몰라 고민을 하면서 부산 서면 거리를 걷고 있었다. 5층짜리 건물의 3층 창문에 붙여 놓은 ‘일본어, 완벽 3개월 속성’이라는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독학 일본어 완성’보다는 조금 덜하지만 이 또한 과장광고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미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학원 문을 열고 있었다.

“정말 3개월 만에 일본어를 마스터할 수 있습니까?”

“뭐… 정말 그런 분들도 있고, 몇 년째 공부하고 있는 분들도 계세요.”

“어떻게 3개월 만에 가능한 거예요?”

“저는 그냥 경리 직원이라 잘 몰라요.”

“일본어를 완벽하게 해준다는데 가격은 왜 이리 싼 거예요?”

“……”

나와 그 학원 직원이 주고받은 대화였다.

이어서 강사진을 보여 달라고 했다. 두 분이었다. 오전 강의는 할아버지 선생님, 저녁 강의는 할머니 선생님이었다. 재일교포이신 것 같은데 추가된 프로필은 없었다. 한국에 와서 이 학원에서 몇 년째 강의를 하고 계신다는 내용이 거의 전부였다. 이 정도면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나와야 하는 게 정상인데, 나는 돈을 내고 결제를 해버렸다. 뭔가에 홀려도 보통 홀린 게 아니었다.

다음 날 오전에 학원으로 갔다. 교실에 들어가니 정말 큰 테이블 한가운데에 할아버지 선생님이 앉아 계셨고, 그 옆에는 학원에 다닌 지 오래돼 보이는 나보다 연배가 높은 아주머니들과 그보다 나이가 더 많은 할머니 몇 분이 할아버지 선생님과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들어서니 다들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도 안다. 왜 젊은 놈이 이 시간에 일본어 학원을 오는 것이냐? 얼마나 정보가 없으면 여가를 즐기는 차원에서 주부들이 오는 이런 학원에 온 것이냐? 그런 눈빛이었고, 할아버지 선생님은 내가 요청만 하면 당장에라도 경리를 설득해서 환불을 해줄 심산이었다. 그런데, 난 정말 갈 데가 없었고, 정보도 없었다. 그렇다고 오랜만에 한 결심을 되돌리고 싶지 않아서 “저, 오늘부터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하자, 다들, 열심히 하지 말고 재미있게 공부하자면서 젊은 사람이 들어오니 좋다고 하셨다.

할아버지 선생님은 특별한 노하우는 가지고 있지 않았고, 대신 딱 두 가지를 알려주셨다. 일본어는 연습을 하는 만큼 실력이 는다는 것과, 일본어를 배워서 일본 여행을 가면 재미있다는 어떻게 보면 하나마나한 말이기는 하나, 이 의미 없어 보이는 말이 나에게는 동기부여가 되었다. 아줌마들과 할머니들 사이에서 나는 당연히 우등생이 되었다. 나는 수업이 끝나도 집에 가지 않고, 학원의 빈자리를 찾아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어가듯이 일본어를 공부했다.

희한한 일이 생겼다. 정말 1~2년 동안 배워야 할 분량이 3개월 만에 속성으로 완성되었다. 주변에서는 왜 쓸데없이 일본어를 배우냐고 하기도 했고(그때 나에게는 쓸데 있는 게 없었다.) 중간에 그만둘 거면서 돈만 날린다는 말도 있었다.(그래서 가장 짧은 기간으로 했다.) 일본어를 배웠다고 갑자기 인생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일본어 공부는 나에게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하였고, 3개월 속성을 마친 지 4년쯤 뒤 나는 짧은 기간 안에 사법시험에 붙을 수 있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나는 외국어 공부에 치중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유창하지도 않고, 써먹지 않은 기간이 훨씬 길어서 머리에 남아있는 게 별로 없다. 사법연수원에서 교수님이 해외파들을 모아서 어떤 자료를 각 외국어로 번역할 때 외에는 써먹을 일이 없었고, 변호사 개업 이후에는 정말 쓸 일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쓸데없는’ 것을 많이 하고 있고, 지금도 내가 할 수 있는 쓸데없는 일이 있는지 찾아본다. 그러다가 유튜브도 하고 블로그도 하고 먹고사느라 중단했던 지적재산권 공부도 다시 시작했다. 약 10년 전에 ‘쓸데없다’고 여겨서 휴업 처리했던 변리사 자격도 부활시켰다.

무엇이든 3개월이면 된다는 생각이 내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았던 것은 일본어 학원 덕분이었다. 3개월이면 된다. 3개월만 속성으로 해 보면, 안 되는 게 없다. 3개월을 못 버티고, 당장 쓸데 있어 보이지는 않아 그만둬서 그렇지, 3개월만 하면 된다. 지금 ‘쓸데없는 것’을 하고 있다는 회의가 든다면 3개월만 속성으로 해보자. 그리고 잠시만 기다려 보라. ‘쓸데없는’ 것이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아주 유용하게 쓰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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