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전쟁, 1·2차 세계대전, 프랑스 시민혁명, 베트남전쟁,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최근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인류는 수많은 전쟁과 분쟁을 거쳐 왔고, 지금도 전쟁은 세계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인간의 가장 오래된 행위가 ‘전쟁’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먼 옛날부터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 전쟁의 비극이다. 이번에는 전쟁화戰爭畵, 즉 전쟁 장면을 그린 그림들을 소개한다.

‘전쟁화’라고 하면 제일 먼저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가? 용맹한 장군의 자화상, 생생하고 참혹한 전투 장면, 전쟁에서 승리하여 기뻐하는 군인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떠오를 것이다. 화가는 창작할 때, 작가 내면의 내부적인 요인뿐만 아니라 외부적인 환경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전쟁화만 전문적으로 그린 화가는 거의 드물지만, 전쟁을 겪은 화가라면 자신만의 방법으로 그림 속에 전쟁의 이미지를 심는다. 따라서 우리는 작품을 통해 전쟁을 직접 겪지 않고서도 전쟁의 어떠함을 느낄 수 있으며 전쟁을 대하는 화가의 마음도 읽을 수 있다. 화가는 전쟁의 참혹했던 당시 상황을 자신의 화풍으로 표현하며, 때로는 전쟁을 기념하기 위해 혹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캔버스를 마주한다.

파올로 우첼로, ‘산 로마노 전투-베르나르디노 델라 치아르다가 창에 찔리다’, 1438년, 목제판, 182×320㎝,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파올로 우첼로, ‘산 로마노 전투-베르나르디노 델라 치아르다가 창에 찔리다’, 1438년, 목제판, 182×320㎝,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첫 번째 소개할 작품은 파올로 우첼로(1397~1475)의 ‘산 로마노 전투’이다. 피렌체 출신인 파올로 우첼로는 15세기에 ‘전쟁’이라는 새로운 주제를 회화에 도입하여서 최초의 전쟁화를 그린 화가로 평가받는다. 그의 그림 ‘산 로마노 전투’는 역사상 실제의 전쟁을 다룬 최초의 작품으로 기록되어 있다.

1432년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피렌체와 시에나 사이에 벌어진 산 로마노 전투에서 피렌체가 승리한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피렌체의 후원자였던 레오나르도 바톨리니가 파울로에게 의뢰한 작품이다. 총 3개의 대형 그림으로 이루어진 연작이다. 1편 ‘피렌체 군을 이끄는 니콜로 다 톨렌티노’, 2편 ‘베르나르디노 델라 치아르다가 창에 찔리다’, 3편 ‘미켈로토 다 코티뇰라의 반격’을 그려 산 로마노 전투의 시작부터 끝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위의 작품은 2편으로, 피렌체 군지휘관 니콜로 다 톨렌티노가 베르나르디노 델라 치아르다를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린 장면이다. 그냥 보면 누가 적군인지 아군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사람들이 이리저리 뒤엉켜 있다. 바닥에는 죽은 몇 마리의 말이 쓰러져 있어 전투의 치열함을 보여준다. 당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도시국가들 사이에 많은 전쟁을 치렀던 이탈리아의 격변기를 알 수 있다. 누군가는 지배력의 확장을 위해 또 누군가는 방어의 방책으로 전쟁을 치러내야 했다.

자크 루이 다비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1784년, 캔버스에 유채, 330×425㎝, 파리 루브르박물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자크 루이 다비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1784년, 캔버스에 유채, 330×425㎝, 파리 루브르박물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두 번째로 소개할 작품은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의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이다. 1784년에 그려진 이 작품은 실제로 일어난 전쟁을 그린 것은 아니다. 로마 역사가인 티투스 리비우스의《로마 건국사》142권 중 제 1권에 나오는 전설이야기를 화폭에 담은 것이다.

기원전 7세기, 로마와 이웃 나라 알바 사이에 국경분쟁이 일어났고,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양국은 각각 세 명의 대표를 뽑아 그들 사이의 결투 결과에 따라 승부를 정하기로 했다. 로마에는 호라티우스 가문의 삼 형제가, 알바 공국에서는 알바의 영웅인 쿠리아티우스 가문의 삼 형제가 결투에 나섰다. 공교롭게도 두 집안은 결혼으로 이어진 사돈 관계이다. 6명의 남자 중 결투로 5명이 죽어 전쟁은 로마가 승리하게 된다.

이 작품은 호라티우스 삼 형제의 몸을 일직선으로 배치하고 옷에 밝고 명쾌한 색을 입혔다. 그리고 이들은 결투 직전 아버지께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한다. 꼭 이기고 돌아오겠다는 호라티우스 형제들의 비장한 모습과 세 아들을 피의 제단에 바치는 영웅적 행동에 어떠한 망설임도 없다는 아버지의 각오가 느껴진다. 반면에 오른편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유연한 형태와 약간 어두운 색이 특징이다. 특히 호라티우스 가문의 며느리이자 쿠리아티우스 가문의 딸인 사비나, 그리고 호라티우스 가문의 딸이자 쿠리아티우스 가문의 약혼자인 카밀라, 또한 어린 손자들을 안고 있는 호라티우스 가문의 어머니가 깊은 실의에 빠져 있는 모습이 시선을 끈다. 어느 쪽이 전쟁에서 이기든 여인들은 남편이나 약혼자, 혹은 손자의 아버지를 잃게 될 비극적인 상황이다.

그럼에도 호라티우스 가문의 아버지는 아들들이 쿠리아티우스 가문과 싸우도록 촉구했고 아들들은 이에 복종했다. 이처럼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국가적 대의인 애국심과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이 극명하게 대비된 작품이다. 무엇보다 전쟁은 참전용사의 희생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 구성원 모두를 실의에 빠뜨리고 희생시킨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 3일’, 1814년, 캔버스에 유채, 266×345㎝,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 3일’, 1814년, 캔버스에 유채, 266×345㎝,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세 번째로 소개할 작품은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의 ‘1808년 5월 3일’이다. 고야는 처음엔 궁정화가로 발탁되어 활동했지만,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으로 전쟁의 폭력을 목격하면서 그와 관련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808년 5월 2일, 스페인을 점령한 나폴레옹 군대에 대항하는 마드리드 시민들의 민중봉기가 있었다. 이 저항은 신속하게 진압되는데 그 과정에서 프랑스 군대가 자행한 무자비한 학살이 있었다. 밤새도록 수많은 마드리드 사람들이 재판도 없이 총살당했다. 다음 날 새벽까지도 총살이 계속되었다고 해서 이 작품의 제목은 ‘5월 3일’이 된다. 고야는 이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프랑스 군대가 스페인에서 물러간 시점의 1년 뒤인 1814년에, 프랑스 군인들이 봉기에 가담한 스페인 시민들을 마드리드의 한 언덕에서 잔혹하게 처형하는 장면을 그리게 된다.

작품을 살펴보자. 칠흑 같이 어두운 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차디찬 총구 앞에 섰다. 우측에는 학살을 자행하는 프랑스군이 그려져 있는데 줄지어서 총을 겨누고 있는 뒷모습은 인간성이 배제된 전쟁의 비정함을 은유한다. 강렬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좌측의 일반시민들이다. 좌측 하단에는 학살당한 시민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고, 그 위로는 수도사 복장을 한 남성이 기도를 드리고 있으며 절망에 빠져 울며 부르짖고 있는 사람의 모습도 보인다. 곧 있으면 찢어지는 굉음과 함께 바닥에 쓰러져 다음 희생자가 될 사람들이다.

작품에서 확연히 눈길을 끄는 것은 가운데 흰색 셔츠를 입고 양팔을 벌리고 서 있는 남성이다. 죽음 직전의 공포와 비탄의 눈빛이 압도적이지만 동시에 이 남성이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에서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린 모습이 연상되어 스페인의 민중 부활을 상징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훗날 스페인은 웰링턴이 지휘하는 영국군의 도움을 받아 1813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는데 이를 암시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폴레옹 군대가 스페인 양민을 무작위로 학살하는 모습은 대다수의 전쟁에서 비슷하게 전개된다. 분쟁 중에는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을 보호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가장 나약하고 속수무책인 일반 사람들은 폭력에 쉽게 노출되어서 집단학살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1808년 5월 3일’에 감흥을 받아서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 등의 작품이 그려지는데 특히 피카소의 작품은 6.25 전쟁을 모티브화한 것으로서 고야의 작품과 비슷한 구도로 민간인을 대하는 전쟁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폭로하고 있다. 아쉽게도 저작권 문제로 여기에 그림을 소개하지 못했으나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감상이 가능하다.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년, 캔버스에 유채, 260×325㎝, 파리 루브르박물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년, 캔버스에 유채, 260×325㎝, 파리 루브르박물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마지막으로 소개할 작품은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다. 워낙 유명한 작품으로 재작년 TV 드라마 ‘빈센조’에서도 패러디 돼 화제가 된 바 있다. 1830년대 화가들은 역사적 순간을 화폭에 담아 당시 시민들과 대화를 시도했는데, 이 작품 역시 그러한 경향을 보인다.

“내가 부당한 정권에 맞서서 직접 싸우지는 못했지만, 조국을 위해서 그림을 그릴 수는 있어.”

1830년 10월 18일, 들라크루아가 형 샤를 앙리에게 자신이 그리고 있는 작품을 소개한 편지내용 중 일부이다. 이 그림이 바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다. 프랑스 7월 혁명에서 파리 시민이 진압군을 몰아내고 파리를 점령한 순간을 드라마틱하게 그리고 있다. 그림 속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자유, 평등, 박애로 대표되는 프랑스 국기를 오른손에 들고 대열의 앞에 서서 시민군을 이끄는 한 여성이다. 작품 제목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이 여인은 ‘자유의 여신’이다. 그는 로마시대에 자유를 얻은 노예들이 썼던 프리지아 모자를 쓰고 있으며, 복장은 로마 신화의 자유의 여신 리베르타스를 연상케 한다는 해석이 있다. 그의 모든 것에서 ‘자유’를 읽어낼 수 있다. 들라크루아가 그려낸 ‘자유의 여신’은 뉴욕을 대표하는 랜드마크 ‘자유의 여신상’ 얼굴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자유’를 쟁취하기까지의 과정은 험난하다. 작품 속에 쓰러져 있는 왕의 경비들은 벌거벗겨져 있고, 심지어 시위대는 그 시체들을 밟고 지나간다. 가운데 여인의 가슴을 훤히 드러낸 것은 그만큼 시민군이 적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였다는 것을 비유한 표현이다. 자유를 상징하는 그녀가 가는 길엔 사람들의 주검이 쌓여 있다. 적군과 아군이 뒤섞여 있는 발 아래의 죽음은 그날의 전쟁이 얼마나 잔혹하고 치열했는지 참상을 잘 말해준다.

한편 자유의 여신 주변에서 그녀와 함께 전쟁을 치르고 있는 남성들의 옷과 모자는 제각각이다. 다양한 연령과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시민혁명군이 되어서 진압군을 몰아내고 프랑스 7월 혁명의 중심이 되었다는 의미리라.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라면 신분, 연령, 직업, 성별과 상관없이 모두가 한 마음으로 길거리로 나와 적과 대항해 싸운다. 피를 대가로 소중한 자유를 지켜내고자 한 것이다.

전쟁은 군인만 하는 게 아니다. 전쟁은 누구 하나만의 전쟁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전쟁이다. 모두가 자유를 쟁취하려는 하나의 마음으로 싸운다. 나약해 보이는 이들이 강하게 반격하여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기도 한다.

지금까지 네 작품을 살펴보면서 영토를 점령하고 쟁탈하여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혹은 외부의 위협에서 나라의 자유와 안전을 지켜내기 위해 전쟁은 발발하고, 그 과정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잔인한 폭력에 노출되어 희생당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작품 속으로 들어가 상상해보라. ‘호라티우스의 형제들’의 용사들이 나의 가족이라면? ‘1808년 5월 3일’에서 적의 총구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나라면?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배경의 시대에 내가 살고 있다면? 작품을 바라보는 마음이 결코 가볍지 않으리라. 두려움과 절망이 우리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전쟁은 그토록 잔혹하고 무자비하며 수많은 사람의 희생을 뒤따르게 한다.

전쟁 작품들을 감상하고 글을 쓰는 내내 떠오르는 전쟁이 하나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경,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아마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역사의 순간이다.

필자의 외할아버지는 6·25 전쟁, 월남전 두 번의 전쟁에 참전한 용사다. 작년 3월 향년 99세의 나이로 별세하기까지 늘 당신의 가슴에 참전용사 배지를 달고 다니셨다. 그래서인지 6월이 오면 외할아버지 생각이 많이 난다. 명절에 온 가족이 모일 때면, 당신의 아들과 사위들 앞에서 전쟁 이야기를 그렇게 하셨는데, 그저 철없이 ‘왜 저러실까? 또 전쟁 이야기야?’라고 생각했었다. 지금 다시 한번 떠올려 보면 우리나라를 지켜주신 할아버지께 감사하고 죄송할 따름이다.

필자의 외할아버지와 같은 수많은 분들이 피 흘려 우리나라의 자유와 평화를 지켜내셨다. 그 불가피한 희생이 감사하고 위대해 보이지만 한편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인가? 무장 전쟁 말고 평화수호방식의 다른 버전은 무엇일까? 인간에 내재된 광기와 폭력성을 어떻게 하면 다스릴 수 있을까? 이런저런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6월이다.

글 정유진

충북대학교 미술과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 교육대학원에서 미술과 석사학위를 받았다. 다수의 단체전을 통해 작품 발표를 해왔으며, 길가온 갤러리에서 갤러리스트로 활동했다. 행복한미술심리센터에서 교육 프로그램을 연구했고, 현재 파랑새 인성교육원 대표로서 미술교육에 대해 계속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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