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그들의 변화
역사 속 약속

고구려왕이 된 유리, 부러진 칼 반쪽을 품고

고구려 2대 왕 유리명왕琉璃明王은 주몽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예 씨이다.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기 전 부여에 있었을 때, 그는 예 씨 부인과 결혼해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좌를 뺏길까 봐 견제하는 금와왕의 일곱 아들 때문에 주몽은 다급히 부여를 떠나야 했고, 그 바람에 임신 중이었던 예 씨 부인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떠나기 전, 주몽은 예 씨 부인의 손을 잡고 차분히 말했다.

“일곱 모가 난 바위 위 소나무 아래 증표를 숨겨 둘 테니 아이를 낳거든 그걸 찾아서 내게 보내시오.”

그 후에 부인이 낳은 아이가 유리다. 유리의 활 솜씨는 누구보다 뛰어나 예 씨 부인은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주몽을 떠올리곤 했다. 그러나 혹시라도 금와왕의 아들들이 그 사실을 알면 유리를 괴롭힐지 몰라서 입을 함부로 열 수 없었다.

어느 날, 유리가 참새를 향해 활을 쏜다는 것이 물 긷는 부인의 물동이를 잘못 겨냥해 깨뜨렸다. 그 부인이 꾸짖어 말했다.

“이 아이는 애비가 없어서 이렇게 노는구나!”

유리가 부끄럽게 여기며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물었다.

“우리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며 살아 계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예 씨 부인은 가슴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유리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더는 볼 수 없어 고민 끝에 말했다.

“아들아, 네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시다. 하지만 나라에서 받아주지 않아 멀리 도망가서 고구려라는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셨단다. 너는 누구보다도 네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겨야 해.”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듣고 속이 상한 유리에게 부인은 아버지가 남긴 증표에 대해서도 설명을 해주었다.

“아버지가 떠날 때 내게 ‘당신이 만약 아들을 낳으면, 나의 유물이 일곱 모가 난 바위 위에 있는 소나무 밑에 숨겨져 있다고 말하시오. 만일 그것을 발견해 가져오면 곧 나의 아들일 것이오.’라는 말을 남겼단다.”

동명왕릉 능문 제당에 그려진 유리명왕 벽화. 아버지를 찾아 고구려에 온 주몽의 아들 유리와 예 씨 부인을 그렸다.
동명왕릉 능문 제당에 그려진 유리명왕 벽화. 아버지를 찾아 고구려에 온 주몽의 아들 유리와 예 씨 부인을 그렸다.

이때부터 유리는 모든 일을 제쳐 두고 산으로 들로 증표를 찾으러 다녔지만, 지쳐서 돌아올 뿐이었다. 하루는 유리가 마루끝에 앉아 쉬고 있을 때였다. 기둥과 주춧돌 사이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다가가서 보았다. 주춧돌은 일곱 모가 나 있었고, 주춧돌이 받치고 있는 기둥은 소나무인 게 분명했다. 기둥 아래를 뒤져 보니 부러진 칼 반쪽이 들어 있었다.

아버지가 남긴 증표를 찾은 유리는 부여를 떠나 고구려로 향했다. 드디어 고구려의 첫 번째 도성인 졸본에 이르러 고구려의 왕 주몽을 뵙고 부러진 칼 반쪽을 내밀었다. 주몽도 자기가 간직하고 있던 칼 반쪽을 꺼내어 합쳐 보았다. 꼭 들어 맞아서 하나의 칼이 되었다. 그렇게 태어나 처음 만난 아버지에게 유리는 큰절을 올렸다. 주몽 또한 기쁘고 벅찬 마음으로 유리를 맞이해 태자로 삼았다. 그 후에 유리는 고구려의 궁에서 자랐으며 기원전 19년, 주몽의 뒤를 이어 고구려의 2대 왕이 되었다.

유리는 아버지가 없는 자식이라며 사람들에게 무시도 당하고 부끄러움을 당하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증표를 남기셨다는 사실을 안 뒤로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도, 수치를 주는 말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부여를 떠나 고구려로 가는 길은 험난했지만 아버지의 증표를 품은 가슴은 벅차올라 힘차게 달릴 수 있었을 것이다. ‘자랑스러운 나의 아버지! 아버지를 만난 후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까?’ 약속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꿈이 된다. 우리도 험난한 여정을 기쁨으로 달리게 할 약속 하나씩은 마음에 품어보자.

평생을 교육에 헌신한 페스탈로치
그를 성장시킨 가정부의 약속

페스탈로치가 전쟁 고아들을 돌보는 모습을 그린 유화. 1879년 콘라트그로브 작. 사진 위키피디아
페스탈로치가 전쟁 고아들을 돌보는 모습을 그린 유화. 1879년 콘라트그로브 작. 사진 위키피디아

​전 세계인이 존경하는 교육자 페스탈로치. 그는 교육만이 사회의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자신의 일생을 교육에 바쳤다.

페스탈로치는 1746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의사였지만 돈을 버는 것보다 가난한 환자들을 치료하는 일에 더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집안의 형편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게다가 페스탈로치가 5살일 때 아버지는 중병에 걸렸다.

아버지는 자신의 임종을 위해 가족들이 모여 있을 때, 자신이 죽은 후 남게 될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며 가정부 바아베리에게 부탁했다.

“바아베리. 내 가족들을 앞으로도 지금처럼 잘 돌봐 주길 부탁하네.”

바아베리는 꼭 그렇게 하겠다고 눈물을 흘리며 약속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약속이 계속 지켜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나마 적었던 수입마저 가장의 죽음으로 모두 없어진 상황에서 아직 젊은 바아베리가 자신을 희생해가며 페스탈로치 가족들을 계속 돌보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아베리는 장례식 후에도 페스탈로치의 가족을 떠나지 않고 묵묵히 일하며 남은 가족들을 정성껏 보살펴 주었다.

주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바아베리의 모습, 또한 목사인 할아버지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았던 부모님은 페스탈로치의 마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비록 사회는 문제가 많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그리고 바아베리처럼 훌륭한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더 많이 있을 거야. 나도 어른이 되면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일생을 바치면서 살 거야.’

학업을 마친 페스탈로치는 귀농해서 1771년 농민 학교 ‘노이호프’를 세웠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육 운동을 시작했고, 고아원과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새로운 교육방법을 실천해 나갔다. 노이호프를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집으로 제공하면서 아이들에게 일하는 법을 가르치고 바르고 정확하게 말하는 법을 가르쳤다.

하지만 재정난과 학교장과의 갈등으로 쫓겨나기도 했고 학교 문을 닫기도 했다. 당시에 교육은 상류층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에 페스탈로치가 주장한 신분에 상관 없는 평등 교육과 전인 교육은 호응을 얻기 힘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노이호프 학교가 폐교된 뒤에도 페스탈로치는 좌절하지 않고 책을 쓰는 데 몰두했으며, 대안학교를 만들어 자신만의 교육 방법을 실천했다.

여러 번의 실패 끝에 페스탈로치의 교육 방법은 인정받기 시작했고, 1805년 이베르돈에 학교를 설립했다. 이베르돈 학교는 교과서를 사용하지 않았고, 실제 물건을 이용한 교육과 체험을 통한 교육을 했다. 아이들 스스로 공부하게 만든 것이다. 이런 교육 방법은 유럽의 유아교육과 초등교육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유럽 곳곳에서 페스탈로치가 있는 이베르돈으로 자녀를 유학 보내는 학부모도 있었다. 프레벨도 이 학교를 방문해 페스탈로치의 사상에 실천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이베르돈 학교는 페스탈로치의 교육법을 둘러싼 제자들의 갈등과 경영난으로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베르돈은 페스탈로치가 죽기까지 약 20년간 전 유럽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페스탈로치는 교사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1808년에는 스위스 교육협회를 만들고 초대 회장이 되었다. 이 단체는 오늘날 스위스 교원 노동조합으로 발전했다. 그래서 페스탈로치는 ‘교원 노조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페스탈로치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을 쓰고 강연을 이어나가던 중 1827년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평생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 노력하고 헌신했던 페스탈로치. 그가 눈을 감았을 때 어린이들이 임종을 지켰고, 그의 묘비에는 ‘모든 것을 남을 위해 바치고, 자기에게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라고 적혀 있다.

페스탈로치는 어린이 교육에서 조건 없는 사랑을 실천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어려운 아이들의 교육 개혁을 위해 일생을 바쳤고, 수많은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업적을 남겼다. 페스탈로치가 살았던 사회는 자기 자신의 이득과 안전을 위해서라면 약속도 쉽게 저버리는 이기주의가 팽배했던 시대였다. 하지만 그는 젊은 가정부 바아베리가 주인과의 약속을 꿋꿋이 지키며 사는 모습을 어려서부터 보아 왔기에,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의 가치를 알고 몸소 실천했다.

약속을 지키며 남을 위해 희생할 때 오는 행복을 아는 사람들이 있기에, 세상은 지금도 희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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