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수, 김은진, 강에스더 3인의 해외봉사 활동

1950년 6월 한국전쟁에 전 세계 16개국의 젊은 장병들이 유엔군의 이름으로 소중한 생명을 바쳤다. 그중 카리브 해에 위치한 섬 나라 푸에르토리코에서도 청년 군인들이 태평양을 건너와 이역만리 한반도 땅에서 사명을 다했다. 지난해, 그 나라에 가서 참전용사들에게 1년간 봉사하고 온 대한민국의 청년들을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에서 만났다.

사진 왼쪽부터 김은진, 강에스더, 박은수는 작년 한 해 푸에르토리코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자유와 희생의 가치 그리고 나를 있게 해준 타인을 향한 감사함을 몸소 경험하고 배웠다. 그곳에서 얻은 삶의 교훈은 한국에 돌아와서도 대학 생활이나 취업 준비를 할 때 도움이 되고 있다. 이들은 애국심을 깨우쳐준 푸에르토리코를 결코 잊지 못한다고 입을 모았다. 사진 박종도 기자
사진 왼쪽부터 김은진, 강에스더, 박은수는 작년 한 해 푸에르토리코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자유와 희생의 가치 그리고 나를 있게 해준 타인을 향한 감사함을 몸소 경험하고 배웠다. 그곳에서 얻은 삶의 교훈은 한국에 돌아와서도 대학 생활이나 취업 준비를 할 때 도움이 되고 있다. 이들은 애국심을 깨우쳐준 푸에르토리코를 결코 잊지 못한다고 입을 모았다. 사진 박종도 기자

지난해 푸에르토리코에서 한국전 참전용사를 위해 활동하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은수: 푸에르토리코는 한국전쟁에 61,000여 명이나 되는 많은 젊은이를 파병한 나라입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이 사실을 굿뉴스코 해외봉사를 가서야 알았어요. 뒤늦게나마 그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어 동료 단원들과 함께 바야몬 시에 위치한 국립묘지를 찾아갔어요. 그곳에 잠들어 계신 참전용사들의 묘비를 닦고 태극기를 꽂아드렸죠. 우리가 처음 방문한 날이 마침 아버지날이었는데, 그 후로도 꽃과 태극기를 가지고 매달 하루를 국립묘지에서 가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에스더: 해가 갈수록 참전용사들이 세상을 떠나 작년 말 기준 생존자는 900여 명 정도라고 해요. ‘한 분이라도 더 살아 계실 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이분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남기고 알려야겠다.’고 생각해 우리는 네 가지 미션을 정했습니다. ‘첫째, 생존해 계신 참전용사들을 찾아가 감사 인사와 선물 드리기. 둘째, 참전용사들의 이야기를 글과 사진, 영상 기록으로 남기고 언론과 SNS로 한국에 알리기. 셋째, 참전 용사들이 잠들어 계신 국립묘지를 매달 참배하기. 넷째, 보훈병원에 가서 자원봉사하기’였어요. 이것이 1년간 우리의 주된 활동이었습니다.

처음에 국립묘지를 찾아가서 묘비를 닦고 태극기를 꽂아드렸을 때 어땠나요?

은진: 그날이 마침 아버지날이라서 사람들이 정말 많았어요. 우리는 유가족도 참전용사이듯 감사 인사를 드리고 특별히 주문제작한 ‘한국-푸에르토리코’ 양국 국기 배지까지 달아드렸어요. “여기에 잠들어 계신 분들의 눈물과 땀, 피로 말미암아 대한민국이 현재 잘살고 있습니다. 그 먼 나라까지 오신 분들께 대한민국 청년들이 보답하고 싶습니다.”라고 인사를 드렸어요. 유가족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를 안아주시고 악수해 주셨어요. 어떤 분은 “미국에 살고 있어서 아버지날이 되면 혼자서 아버지 묘를 찾는다. 그런데 아버지가 지킨 나라의 청년들이 태극기를 들고 찾아와줘서 고맙다.”고 하셨어요. 정말 의미 있는 시간이었죠.

국립묘지에서 만난 참전용사 유가족을 위로하며 추모의 기도를 드렸다.
국립묘지에서 만난 참전용사 유가족을 위로하며 추모의 기도를 드렸다.
참전용사 댁을 방문해 양국 국기가 그려진 배지를 달아드렸다. 활짝 웃으시며 단원들을 반갑게 맞아주셨다. 사진제공 굿뉴스코 푸에르토리코 지부
참전용사 댁을 방문해 양국 국기가 그려진 배지를 달아드렸다. 활짝 웃으시며 단원들을 반갑게 맞아주셨다. 사진제공 굿뉴스코 푸에르토리코 지부

에스더: 생각보다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묘지가 많아서 놀랐어요. 사망 연도가 모두 다르다 보니까 정말 오래된 묘비도 있고 새것처럼 보이는 묘지도 있었어요. 저희는 1년 봉사하고 돌아갈 걸 알지만, 이분들은 전쟁에 간 거니까 언제 올지 모르는 그런 상황이잖아요. 총알이 빗발치는 상황에서 얼마나 두려웠을지 생각해 보았어요.

은수: 열여덟 살 어린 청년의 묘비도 있었어요. 그 나이에 낯선 땅에 와서 싸우다 피흘려 돌아가신 거잖아요. 저는 최전방 부대의 수색대에서 군복무를 했어요. 자주 북한군을 봤고 북한의 도발로 위험했던 순간도 있었어요. 그런데 내가 이들처럼 남의 나라 전쟁에 가서 목숨 걸고 싸울 수 있을까 싶었어요. 묘비를 닦으며 모든 것이 감사했고 숙연했습니다. 가족이 없어 구석진 곳에 있는 무연고 묘비는 관리가 잘 안되어 마음이 아팠어요. 그토록 고생하셨는데 돌보는 이가 없다니 더 미안했습니다.

생존해 계신 참전용사들 댁으로 직접 찾아갔다고요?

은진: 주변에 한국전 참전용사가 계시면 알려 달라고 수소문을 했고, 여러 분을 소개받았어요. 참전용사 할아버지들 댁을 찾아가 집 안팎을 청소해 드리고, 고운 한복으로 갈아입고 큰절을 올렸어요. 그리고 한국에서 가져온 홍삼과 김을 선물로 드리고 옷깃에 양국 국기 배지를 달아드렸어요.

에스더: 아흔을 훌쩍 넘어 허리가 구부정하셨지만, 배지를 달아드리는 순간만큼은 군기가 바싹 든 20대 청년들처럼 허리를 꼿꼿이 세우시더라고요. 마치 한국 정부 주최의 훈장 수여식에 참여하는 것처럼요. 그 덕분에 우리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어떤 할아버지는 촬영용으로 가져온 태극기를 보시고는 “이거 나 주려고 가져온 거냐?”라며 어린애처럼 활짝 웃으셔서 태극기를 그 집에 두고 온 적도 있었어요. 3·1절이나 현충일, 광복절이 되면 태극기 달기보다 놀러갈 계획에 더 마음을 두고 사는 우리에게 참전용사들은 ‘자유란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Freedom is not free.’는 정신을 일깨워주신, 살아 있는 전쟁기념관이셨습니다.

은수: 저는 라파엘 리베라 할아버지(94세)가 기억에 많이 남아요. 대부분 건강이 안좋으셔서 산소호흡기를 꽂거나 휠체어를 타시는데 라파엘 할아버지는 잘 걸으시고 말씀도 잘하셨어요. 한국전에서 만났던 전쟁고아들 기억이 생생하셨어요. 보급품으로 받은 음식을 그 아이들에게 많이 나누어 주셨대요. 나중에 ‘아빠’하면서 따르는 아이들을 보며 정말 눈물겨웠다고 하시더라고요. 지금은 대한민국이 잘사는 나라가 되어 뿌듯하다며, 자동차와 가전제품은 한국산이 최고라고 ‘엄지척’을 하셨어요.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은 대한민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에스더: 참전용사의 가족들은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가서 싸웠던 나라로 알고 있지만, 대다수의 국민들은 한국을 문화 콘텐츠 강국으로 알아요. 가장 놀랐던 건, 그곳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 정말 잘 알고 있다는 거예요. 한국 대중문화를 사랑하고, 한국인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어요.

한국 배우들이 출연한 드라마와 배역, 명대사는 물론, 한국의 역사까지 줄줄 꿰는 청소년들이 적지 않았죠. 저도 잘 모르는 한국 연예인을 알고 있을 정도로요. 그야말로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은 그들’이었어요. 이곳 친구들에게 ‘나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열에 아홉은 BTS의 팬이라며 곁으로 다가와요. 그래서 저희가 진행한 한국어 클래스나 코리안 캠프의 인기가 많았어요.

토요일마다 해변정화 활동을 함께해 준 자원봉사자들과 한 컷. 봉사가 끝나면 케이팝을 틀어놓고 함께 신나게 춤추곤 했다.
토요일마다 해변정화 활동을 함께해 준 자원봉사자들과 한 컷. 봉사가 끝나면 케이팝을 틀어놓고 함께 신나게 춤추곤 했다.
푸에르토리코의 푸른 하늘과 해변은 최고의 공연장소였다. 사진제공 굿뉴스코 푸에르토리코 지부
푸에르토리코의 푸른 하늘과 해변은 최고의 공연장소였다. 사진제공 굿뉴스코 푸에르토리코 지부

은진: 저희는 토요일마다 해변정화 활동도 했어요. 아름다운 푸에르토리코에 많은 관광객이 드나들다 보니 해변에 버려진 쓰레기가 문제였는데 자원봉사자를 모집해 함께 청소를 했죠. 그리고 한국어 클래스, 코리안 캠프를 주기적으로 개최해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소개하고 교류하는 기회를 가졌어요. 저희가 강사가 되어 수업을 진행하는 특별한 시간이기도 했고요.

이런 활동이 한국 언론에 보도가 됐더라고요. KBS 라디오에도 출연했지요?

은수: 얼마 전 KBS라디오 ‘한민족 하나로’ 일요초대석에 출연했어요. KBS는 국영방송이라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방송사잖아요. 그래선지 가족들이 ‘가문의 영광’이라 하고, 친구들은 ‘출세했네.’ 하더라고요.(하하) 상장도 받고 방송에도 나가고 그냥 감사하다는 말밖에 드릴 것이 없어요. 저희가 받은 많은 것들도 결국 많은 분의 희생으로 얻어진 것이라 죄송한 부분도 컸어요.

은진: 조선일보, 연합뉴스, 매일경제에서도 “자원봉사활동으로 해외에서 대한민국을 알리는 청년들이 있다.”라며 저희를 보도해줬어요. 저희가 출연해서 그간의 활동들을 쭉 소개해 드렸더니 MC분께서 어떻게 그 먼 나라까지 가서 봉사를 할 수 있었느냐, 우리가 못 했던 일들을 대신 해줘서 고맙다고 말씀하셨어요.

라파엘 에르난데스 국회 하원의장으로부터 감사장을 받고 국회의사당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이를 포함해 유수의 기관에서 12개의 감사장을 받는 영광을 얻었다. 한국전 참전용사를 위한 봉사와 푸에르토리코 청소년과의 협력, 교류를 높이 치하해 주셨다. 
라파엘 에르난데스 국회 하원의장으로부터 감사장을 받고 국회의사당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이를 포함해 유수의 기관에서 12개의 감사장을 받는 영광을 얻었다. 한국전 참전용사를 위한 봉사와 푸에르토리코 청소년과의 협력, 교류를 높이 치하해 주셨다. 
상원의회 명의의 메달을 받았다. 
상원의회 명의의 메달을 받았다. 
엘리에셀 라모스 교육부 장관으로부터 받은 감사장 내용. 사진제공 굿뉴스코 푸에르토리코 지부
엘리에셀 라모스 교육부 장관으로부터 받은 감사장 내용. 사진제공 굿뉴스코 푸에르토리코 지부

에스더: 저희가 푸에르토리코에서 받은 상이 많아서 화제가 된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국회 상원의장, 하원의장, 교육부 장관, 시장님을 비롯해 12개의 감사장과 4개의 메달을 받았거든요. 한국에서 받아본 적 없는 상을 1년 동안에 이렇게 많이 받았다니, 놀라워요.(하하) 라파엘 에르난데스 하원의장은 “한국에서 온 청년 봉사단원들이 70여 년 전 한국전쟁에 참전한 분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푸에르토리코 청년들과 함께 봉사하면서 희생정신을 일깨워줬다.”라고 치하해 주셨죠. 우리가 ‘대한민국 국가대표이자 민간 외교관’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지 벌써 반년이 지났어요. 어떻게 지냈나요?

에스더: 학교를 졸업하고 해외봉사를 갔기 때문에 지금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취업준비를 하고 있어요. 스페인어를 잊지 않기 위해서 계속 언어공부도 하고 현지 친구들과 메신저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내고 있어요.

은진: 저는 복학했어요. 학교 졸업 요건 중에 일정 시간 이상 봉사해야 하는 내용이 있어요. 그래서 장애인을 위한 활동을 신청해 봉사하고 있어요. 푸에르토리코에서 누군가를 돕는 기쁨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한국에 와서도 보람차고 행복했던 그 기억을 제 삶에 계속 불어넣게 되더라고요.

은수: 저 역시 대학교를 다니고 있어요. 그리고 중간에 밴드를 결성해서 페루, 에콰도르, 콜롬비아 남미 3개국을 다녀왔어요. ‘K-Stars’라는 이름으로요.(하하) 처음엔 학기 중간에 가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교수님께 양해를 구했더니 허락해 주셨어요. 3개국을 돌면서 노래하고 연주하며 멋진 추억을 만들고 돌아왔습니다. 아무래도 제 전공이 스페인어라서 중남미와 계속 인연이 있네요.

해외봉사에 다녀오기 ‘전’과 ‘후’가 어떻게 다른가요?

은진: 저는 사람을 대하거나 대화하는 것을 엄청 어려워하던 사람이에요. 그런 제게 푸에르토리코에서의 활동은 거의 대부분 지금까지 안 해본 새로운 것들이어서 매일이 훈련 같았어요. 하지만 현지 분들이 스스럼없이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주었기 때문에 저도 사람을 향해서 마음을 열고 대화하는 걸 배웠어요. 제가 어려울 때 같이 어려워하고, 기쁠 때 함께 기뻐해 주는 관계의 힘을 느꼈어요. 지금은 사람 사귀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많이 사라졌습니다.

쑥스럽고 어색해하는 단원들에게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은 유쾌하고 친절한 매력으로 다가와 말을 건네 주었다. 아이들은 더욱 그렇다. 사진제공 김은진
쑥스럽고 어색해하는 단원들에게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은 유쾌하고 친절한 매력으로 다가와 말을 건네 주었다. 아이들은 더욱 그렇다. 사진제공 김은진

 

에스더: 새로운 언어를 배웠고 지금도 공부하고 있어요. 학교 다닐 때는 그냥 공부에 관심이 없었고 포기를 잘했어요. 굿뉴스코 가서 언어를 배울 수 있을까 걱정도 되고 잘 안되니까 힘들기도 했지만, 계속 현지어로 대화를 하다 보니까 언어가 늘고 배우는 게 재미있었어요. 제게 굿뉴스코 프로그램은 언어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어요. 저는 사람들 만나는 걸 좋아하고 말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마음 표현은 서툴렀거든요. 제 솔직한 마음을 숨기니 사람 관계에 여러 문제가 드러났어요. 푸에르토리코에서 사람을 많이 사귀고 또 마음의 이야기를 하는 법을 배우면서 이젠 마음 표현이 또렷해졌어요.

은수: 푸에르토리코에 다녀와서 스페인어 실력이 정말 많이 늘었어요. 이번에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스페인어 통역도 해봤죠. 스피킹이 좋아지니까 학교 수업에서도 토론과 발표에 적극 참여하고 있어요.

그리고 살다보면 어려운 일들이 가끔씩 찾아오잖아요. 원래 생각이 깊지 못하고 감정 기복도 심한 편이라 저는 힘든 일이 있으면 쉽게 좌절에 빠지는 편이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힘든 일이 생기면 해외봉사를 하며 지부장님이 들려주신 이야기와 또 참전용사들께 배운 마음가짐으로 콘트롤하게 되는 것 같아요. 주변 친구를 보면 별일 아닌 것에 금방 짜증내고 어려워하는데 그에 비하면 제 마음이 전보다 많이 단단해진 걸 느껴요.

전쟁기념관을 직접 방문한 소감은 어떤가요?

에스더: 예전엔 이런 기념관에 오면 생각 없이 둘러보고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넘겼는데, 푸에르토리코에 다녀온 뒤로는 그 나라 국기부터 찾더라고요. 전쟁 기념관 광장에 와서도 한국전에 참전한 나라의 국기가 꽂혀 있는 곳을 유심히 보았어요. 그런데 푸에르토리코 국기는 없는 거예요. 솔직히 속상했어요.

은진: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사가 참전한 나라가 푸에르토리코지만 독립국이 아닌 미국령이라서 미군에 소속되어 싸웠기 때문에 전쟁기념관 중앙 광장에는 푸에르토리코 국기가 걸려 있지 않았죠. 그 빈자리가 서운하긴 했지만, 정말 많은 나라에서 우리나라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워주셨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꼈고 감사했어요.

은수: 애국심은 특별한 게 아니라, ‘잊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가 옛날부터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았는데, 그렇게 많은 전쟁을 치렀고 그 피의 대가로 지금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었잖아요. 우리나라를 지켜주신 많은 분의 희생을 잊지 않고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저도 그분들의 희생을 모르고 살았는데 이번에 푸에르토리코에 가서 알게 되었고 앞으로는 잊지 않으려고 해요.

KBS라디오 ‘한민족 하나로’의 일요초대석에 출연해 인터뷰하는 단원들. 
KBS라디오 ‘한민족 하나로’의 일요초대석에 출연해 인터뷰하는 단원들. 
조선일보, 연합뉴스 등 여러 언론 매체에 소개된 단원들의 활동. 사진제공 굿뉴스코 푸에르토리코 지부
조선일보, 연합뉴스 등 여러 언론 매체에 소개된 단원들의 활동. 사진제공 굿뉴스코 푸에르토리코 지부

단원들 말대로 용산 전쟁기념관 중앙에 위치한 평화광장에는 푸에르토리코의 국기가 펄럭이지 않았다. 기념관의 전시관 왼쪽 건물, 전사자 명비 한쪽 구석에서 미국 자치령의 하나로 푸에르토리코의 작은 국기가 새겨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한국 땅에서 소멸한 그분들의 피의 가치가 작은 것은 결코 아니다.

전사자 명비의 위쪽 벽면에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나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국민을 지키라는 부름에 응했던 그 아들, 딸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라는 문구가 우리 마음을 대변하듯 크게 새겨져 있었다. 국군과 유엔 연합군의 생명과 맞바꾸어 대한민국에 다시 자유와 평화가 찾아왔다.

비단 전쟁만이 아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모든 일상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나를 위해 자신의 소중한 무언가를 포기하면서까지 지켜 준 누군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뿌리다. 푸에르토리코를 다녀온 청년들의 말처럼, 잊지 말고 항상 감사하기를 바란다. 지금 이 순간도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고가 있기에 우리가 잔잔한 기쁨과 충만한 여유를 누릴 수 있음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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