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청소년들에게 ‘밸런스게임’이 유행했다. ‘여름에 에어컨 없이 지내기 vs 겨울에 히터 없이 지내기’처럼 고르기 힘든 두 조건을 임의로 만들어 놓고 조금이라도 내가 더 좋아하는 것을 고민해서 선택하게 하는 게임이다. 강의를 시작하기 전, 어색하고 딱딱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나도 꽤 자주 활용하곤 했다. 처음에는 밸런스게임에 재미난 상황을 주로 제시하다가, 마지막에는 강의에 오신 부모님의 의중이 궁금해서 난해한 질문을 드렸다. ‘내가 좀 희생을 하더라도 자녀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vs 자녀 인생은 자녀의 것이고, 일단 내가 행복해야 한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가 밸런스게임에 참여한다면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희생은 정말 어리석은 행동일까?

내가 부모교육을 시작한 지 6년째인데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어느 순간부터 후자로 모아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작년에는 1학년 학부모 강의 참석자 중 95%가 고민의 여지도 없이 후자를 선택했다.

‘부모가 젊은 세대라서 후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일까?’ 마침 옆에서 강의를 함께 듣고 있던 50대 선생님께 마이크를 돌려 어느 쪽인지 의견을 여쭈었더니 비슷한 답변이 돌아왔다.

“예전에 아이를 키울 때는 전자였는데, 지금은 후자로 살 걸… 하는 후회가 듭니다.” 그 말에 약간은 당황스러웠다. 후자를 선택한 부모나 전자를 선택한 부모나 모두 자녀를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자녀에게 희생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생각이 최근 들어 왜 보편화되고 있는지 놀랍고 의아했다.

필자는 그 후로도 부모교육이나 사적인 모임에서 ‘희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대화하는 시간을 자주 가졌다. ‘희생’이라는 단어가 밝고 즐거운 뉘앙스라기보다는 다소 무겁고 슬프게 다가오는 것은 당연할 수 있다. 남이 희생하면 존경스럽다고 말할 수 있지만, 나만큼은 되도록 희생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희생이 억울함과 후회가 남는 행동, 존경보다는 별로 영리하지못한 행동으로 귀결된다는 것엔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었다. 코로나 이후에 우리 사회는 매우 빠르게 변화하고 있으며, 사람마다 관점이 각기 다르겠지만, 혹시 잘못된 정보로 인해 생긴 오해라면 다시 한 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해는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다

사람이 정보를 잘못 해석해서 만든 사고방식을 우리는 ‘오해’라고 말한다. 마음에 오해가 생기면 일상적인 대화나 행동 속에 비협조적이거나 적대적인 모습이 드러나고, 결국 그것이 일처리를 하거나 관계를 형성하는 데 문제를 만들어낸다. 오해가 있는 사람과 함께 지내려면 바로잡고 해명하는 과정에 소모적인 에너지를 써야 하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피곤해진다. 오해는 특별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갖는 게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오해를 할 수밖에 없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 수많은 심리학자들이 해온 여러 연구들 중에서 오해와 관련하여 가장 잘 알려진 3가지 이론을 간추 리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인지적 구두쇠Cognitive Miser’ 이론이다. 사람이 돈을 아끼듯이 우리의 뇌도 생각하는 데 쓰는 에너지를 최대한 아끼려고 노력한다. 인간은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어떤 생각을 깊게 하는 것을 본디 싫어한다. 뇌를 풀가동하다가는 정작 필요할 때 최대의 성능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각한 일이 아니면 평소에 절전모드로 전환해 단순 방식으로 직관적인 판단을 내린다. 즉, 새로운 사람을 대할 때 자세히 알아보기 전에 인종, 지역, 학벌, MBTI 등을 근거로 ‘저 사람은 그렇겠구나.’라고 쉽게 판단해버리는 오류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두 번째로는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 이론이다. 사람은 누구나 사실 여부를 떠나 자신의 견해 또는 주장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선택적으로 취하고, 자신이 믿고 싶지 않은 정보는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 다른 말로 ‘자기중심적 왜곡myside bias’이라고 표현하는데, 쉽게 말해서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겠다는 뜻이다. 내가 직접 보고 경험한 뒤 정의 내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어떤 현상에 대해 단정해놓은 다음에 보려고 한다.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 들어와 있는 고정관념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 우리의 뇌는 목표를 정해서 그것에만 집중하면 다른 것은 쉽게 놓치는 오류를 범한다.(사진 YOUTUBE)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 우리의 뇌는 목표를 정해서 그것에만 집중하면 다른 것은 쉽게 놓치는 오류를 범한다.(사진 YOUTUBE)

세 번째 이론은 ‘부주의 맹Inattention blindness’이다. 우리에겐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연구팀은 이 실험을 위해 흰옷과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농구공을 패스하는 1분짜리 영상을 만들어서 참가자들에게 보여준 후, 흰옷 팀의 패스 횟수만 세라고 했다. 사실 그 영상 속에는 고릴라 옷을 입은 사람이 9초간이나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와 카메라를 향하여 가슴을 두드리는 장면이 있었지만, 절반 이상의 사람들은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 미션 수행을 위해 흰옷 입은 사람에게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뇌는 자신이 인지해야 할 목표를 정해놓고 그것에만 집중하면, 다른 것은 쉽게 놓친다. 그런데도 분명히 같은 화면을 보고 있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자신의 감각을 고집한다면 오해가 생길 수밖에 없다.

셋째 아이를 낳으면 힘들어진다는 인식이 뒤바뀌다

모든 사람에게 이런 심리적 성향들이 존재한다고 해도 모든 사람이 오해에 휩싸여 살지는 않는다.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우리의 잘못된 인식을 뒤바꾸어주는 새로운 경험을 하면, 그 경험이 마음에 각인되어 유사한 다른 인지적 오류가 와도 거기에 휩쓸리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내 마음에도 새롭게 각인된 인식이 있는데, 바로 셋째 아이에 대한 생각이다. 결혼과 동시에 첫째가 생겼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연년생인 둘째까지 낳아 양육하는 동안 정말 바빴다. 둘째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다니느라 몇 배가 더 힘들기도 했다. 양가 부모님께 도움을 받을 상황이 아니었고, 당시에는 집안일과 육아가 거의 여자의 몫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7년을 정신없이 지냈다.

시간이 흘러 학교와 유치원에 잘 적응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이제 좀 편안하다 싶을 때, 셋째가 덜컥 생긴 것이다. 그런데 셋째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경험을 하지 않았는데도, 바쁘고 힘들 거라는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또 다시 아이 양육으로 정신없이 보낼 5~6년을 생각하니, 막막하고 우울한 생각까지 들어 한동안 힘들었다.

다행히 어려울 때 주변 분들의 도움을 받아서 우울한 시기를 이겨내고 평안하게 10개월을 보냈다. 실제로 셋째를 품에 안은 후, 내가 막연히 추측했던 바쁘고 힘들 거라는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아이를 향한 상상도 할 수 없는 사랑과 감사가 마음을 채워 내 가슴이 터질 듯이 기뻤다. 힘들다는 생각은 0.1%도 들지 않았고, 볼 때마다 얼굴을 비비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쳤다. 게다가 셋째 아이는 누나와 형을 보고 따라 배워 아주 수월하게 성장했다. 모든 것이 내 생각과 달랐다. 아이를 낳은 후에 생긴 새로운 마음은 경험하지 않고는 절대 알 수 없는 세계였다. 그 후로 나는 ‘셋째 낳기’ 전도사 역할을 자청했다. 다시 돌아보면 첫째와 둘째를 낳았을 때도 분명히 그렇게 기쁘고 좋았는데, 다 망각하고 잘못된 인식을 사실인 양 받아들였던 것이다.

학교 교육현장에서도 경험학습이론은 굉장히 중요하다. 사람은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학습을 하고 그런 경험을 통한 학습의 결과는 신뢰 있게 평가받는다. 따라서 이론적인 상황과 원리들을 제시하고 가르치기보다는 학생들 스스로 다양한 체험과 실험을 하며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유능한 교사는 사실을 전달하고 가르치는 것을 넘어서 학생의 경험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학습 과제를 재구성하는 작업을 끊임없이 진행한다.

인간의 오해와 관련된 재미난 실험이 담긴 한스 로슬링의 책(사진 YES24)
인간의 오해와 관련된 재미난 실험이 담긴 한스 로슬링의 책(사진 YES24)

경험된 세계를 받아들이면 수많은 오해가 줄어들고

그러나 모든 것을 다 경험하고 나서야 알고 배우도록 우리 인생은 마냥 기다려주지 않는다. 유한한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을 경험해야만 배울 수 있다면 인간은 지금처럼 스마트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경험을 통해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은 사람들에게서 배우는 일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수십 배, 수백 배의 가속도로 성장할 수 있다.

2019년도에 출간된 한스 로슬링의《팩트풀니스 Factfullness》책에는 인간의 오해와 관련된 재미있는 실험이 담겨 있다. 저자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13가지 문제’를 만들어서 각각 침팬지와 인간에게 문제를 풀게 했다. 뜻을 모르고 찍는 방법을 선택한 침팬지는 33%의 정답률을 보인 반면 인간의 정답률은 16%에 불과했다. 더욱 놀라운 점은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일수록 오답률이 높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저자 한스 로슬링은 인간의 잘못된 인식 즉, 편견과 부정적 생각이 실제 세상과 얼마나 다른지 통계 수치를 근거로 자세히 풀어주면서 사실에 근거해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한스 로슬링이 테드에 출연해 침팬지와 사람에게 던진 설문들을 청중에게 보여주면서 강연하고 있다.(사진 TED YOUTUBE)
한스 로슬링이 테드에 출연해 침팬지와 사람에게 던진 설문들을 청중에게 보여주면서 강연하고 있다.(사진 TED YOUTUBE)

사실에 입각해서 희생을 본다면?

그렇다면 서두에 이야기했던 ‘희생’에 대해서도 막연한 감각이나 느낌이 아니라, 사실에 입각하여 생각해 보자. 과연 실제로 희생한 사람들이 불행하고 고통스러웠을까? 억울하고 창피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위인전이나 자서전, 혹은 지나온 시간 동안 만났던 많은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았을 때, 희생을 그렇게 받아들인 사람은 없었다. 실제로 희생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불이익이 와도 그것을 행복하게 받아들였다. 다만, 희생을 경험하지 않고 옆에서 본 사람들이 그 마음을 묻지도 않고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는 심리적 성향을 따라 ‘불쌍하다.’ ‘얼마 나 힘들었을까?’ ‘나는 절대 저 길을 가지 않을 거야.’라는 생각을 퍼뜨리는 것이다.

여기에 가끔 극단적인 정보가 뇌에 입력되면 그 오류는 더 강력해진다. 예를 들어, 뉴스에서 평생 아들 뒷바라지를 한 어머니를 버린 아들의 이야기를 접할 때 사람들은 바로 ‘그것 봐. 아들을 위해 희생하면 뭐해. 내가 먼저 잘 살고 봐야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에 입각해서 본다면 생각이 달라진다. 결과로서의 지금 ‘버려진’ 상황이 아닌, 희생을 하는 과정에서 행복했는지 행복하지 않았는지가 더 중요하다.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면, 버림을 받은 결과가 아니라 버림받은 순간에도 어머니의 마음속에 있는 자식을 향한 마음이 어떠한지 확인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우리가 겉으로 보이는 결과를 따라서만 인식한다면, 확증편향은 오히려 더 강력해질 가능성이 높다.

이기적인 희생이나 바람직하지 못한 것을 위해 희생을 한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희생이 행복을 주지 못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희생이었기 때문인데도 누군가가 옆에서 그것을 지적해 주지 않으면, 자신이 집중하고 있는 것에 빠져서 ‘부주의 맹’이라는 인식의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엄마 까투리의 행복

비록 실제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희생이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인지가 잘 나타나 있어서 학교에서 아이들과 자주 읽는 이야기가 있다. 권정생 선생의 생전 마지막 작품인《엄마 까투리》이다.

어느 산에 불이 나서 동물들이 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뛰어다녔다. 엄마 까투리도 새끼 아홉 마리를 데리고 불을 피해 다녔지만, 불길에 싸여 더 이상 달아날 곳이 없었다. 엄마 까투리는 사나운 불에 몸이 닿자 자기도 모르게 후드득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저만치 날아가다가 새끼들이 생각나 다시 돌아왔다. 그렇게 뜨거운 불이 몸에 닿으면 화들짝 놀라 날아올랐다가 새끼들 생각에 돌아오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그러다가 굳은 결심을 하고 아홉 마리 새끼를 날개 아래 품은 채 눈을 감았다. 사나운 불길이 엄마를 덮치고 지나갔다.

이 책은 읽을 때마다 숭고한 모성애에 코끝이 찡해지곤 한다. 새끼들을 날개 아래 품고 죽어간 엄마 까투리는 행복했을 것이다.(사진 YES24)
이 책은 읽을 때마다 숭고한 모성애에 코끝이 찡해지곤 한다. 새끼들을 날개 아래 품고 죽어간 엄마 까투리는 행복했을 것이다.(사진 YES24)

사흘 후, 불 꺼진 산길을 아랫마을 박서방이 지나가다가 까맣게 타 죽은 엄마 꿩의 품속에서 살아남은 새끼 꿩들을 발견한다. 새끼들은 부지런히 먹이를 주워 먹고 다시 죽은 엄마 품으로 돌아와 잠을 잤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새끼들은 엄마 까투리의 몸이 점점 부서져 재가 되어버린 후에도 밤이면 어김없이 죽은 엄마 날개 밑으로 들어가곤 했다. 엄마의 흔적만 남은 자리에 새끼 아홉 마리는 저희들끼리 보듬고 잠이 들며 자랐다.

그림책 속에 계속 반복해 나오는 ‘꼼짝 않았습니다.’라는 표현에 오랫동안 내 코끝이 찡하도록 여운이 남았다.

엄마 까투리가 새끼들을 품고 있으면서 느꼈을 마음을 나는 ‘행복한 감사’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결코 애처롭거나 불쌍한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적인 결과로 보면 비극이라고 오해할 수 있지만, 아름다운 마음은 그 자체로 아름답게 느껴야 한다. 새끼 꿩들은 엄마 까투리에게 받은 사랑의 기억을 힘의 근원으로 여기며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엄마 까투리는 그것을 기대하며 꼼짝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희생을 감내했으리라 본다.

권정생의 동화 원작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 EBS에서 방영된 ‘엄마 까투리’의 주요 장면들. 산불을 피할 길을 찾지 못해 위기에 봉착했을 때 자식의 안전을 먼저 선택하는 엄마의 마음을 진한 감동으로 표현하였다.(사진 EBS 방송 캡쳐) 
권정생의 동화 원작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 EBS에서 방영된 ‘엄마 까투리’의 주요 장면들. 산불을 피할 길을 찾지 못해 위기에 봉착했을 때 자식의 안전을 먼저 선택하는 엄마의 마음을 진한 감동으로 표현하였다.(사진 EBS 방송 캡쳐) 

자녀를 위해 희생하는 쪽이 맞으니까 희생을 감당해라는 결론을 내리고 싶진 않다. 다만, 희생을 오해하지 않고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 감사한 것으로 그대로 받아 들이기를 바란다. 태풍의 눈 안에 들어가면 고요하지만, 태풍을 밖에서 맞으면 크게 고통스럽다. 직접 희생을 하면서 느끼는 행복을 모른 채, 겉모습만 보고 잘못된 인식을 가진다면 행복을 오롯이 인지할 수 없다. 내가 내 권리를 찾고 챙길 때의 행복도 중요하지만, 내 권리를 희생하고 나눌 때 얻게 되는 행복의 경험도 해 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 아이들도 그런 희생의 사랑을 받고 자라나 언젠가는 희생하는 행복도 경험해봐야 하지 않을까? 가정의 달 5월, 가족의 사랑과 희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우리 모두에게 있었으면 좋겠다.

글쓴이 안현지

교육학 박사과정에 있는 그는 올해 27년 차 초등학교 교사이다. 2021~2022 교육부 인성교육 우수선진교사로 선정되었고, 지역사회 교육문화단체 ‘하트톡’ 대표로 활동 중이다. 춘천교도소 초청으로 2015년부터 재소자들에게 매달 인성교육 강연을 해오고 있으며, 최근에는 전국 온오프라인 학부모교육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교사이자 엄마로서, 자폐 스펙트럼 장애아 학부모들과의 상담에도 많은 시간을 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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