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미켈란젤로

“모든 돌덩어리 안에는 조각상이 있고,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조각가의 임무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 산치오와 함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3대 거장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5~1564)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미켈란젤로는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과 같은 성화聖畫를 그린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동시에 ‘다비드’, ‘피에타’를 만든 천재적인 조각가이기도 하다. 자신을 화가가 아닌 조각가로 여겨 달라고 할 정도로 조각에 혼신의 열정을 다한 그의 작품에는 대리석에 갇혀 있는 인물을 끄집어낸 것처럼 살아 숨쉬는 생동감이 넘친다.

이번에 소개할 작품은 미켈란젤로 인생의 최대 걸작, 조각상 ‘피에타’pietà이다.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이지만, 통상적으로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슬퍼하는 성모 마리아를 그림이나 조각으로 묘사한 가톨릭 미술의 한 양식을 가리킨다.

피에타는 1290년경부터 1300년대 초반까지 독일에서 만들어진 ‘베스퍼빌트 Vesperbild(저녁기도의 조각상)’가 시초이다. 성모 마리아의 애도가 해 저물 무렵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독일의 수도사들은 죽은 예수를 무릎 위에 안고 있는 성모마리아 나무상을 만들어 저녁 시간에 기도를 드렸고, 그래서 독일에서는 ‘저물 무렵’을 의미하는 ‘베스퍼’를 붙여 ‘베스퍼빌트’라고 나무상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것이 1400년 이후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이탈리아로 넘어와, ‘피에타’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피에타를 만들었지만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일 것이다. 그는 평생에 걸쳐 3개의 피에타를 제작하였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 ‘피렌체 두오모 성당의 피에타’, ‘스포르체스코 성에 있는 론다니니 피에타’가 그것이다. 노안으로 거의 앞이 보이지 않는데도 촉각에 의지하여 세상을 떠나기 엿새 전까지도 매달려 작업했던 작품이 피에타일 정도로, 미켈란젤로는 피에타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그랬던 이유에 대해, 그가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읜 것과 관련이 있다는 해석이 있다.

‘피에타’, 미켈란젤로, 1498~1499년, 대리석,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사진 위키미디어커먼스
‘피에타’, 미켈란젤로, 1498~1499년, 대리석,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사진 위키미디어커먼스

그가 만든 3개의 작품 중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동시에 모든 피에타 조각 최고로 추앙받는 작품은 ‘성 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이다. 그 이유는 첫 번째로 표현 방법에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는 1499년 당시 24세였던 미켈란젤로가 랑그로사이오 추기경의 의뢰를 받아 그의 무덤을 장식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작가 자신도 만족했는지 미켈란젤로가 남긴 조각 중에 직접 서명을 한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다.

높이 174센티의 이 대형 조각은 대리석을 깎아 만들었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굉장히 사실적이다. 성모 마리아의 옷 주름, 뼈만 앙상하게 남아 성모의 무릎에 축 늘어진 예수의 모습, 손에 핏줄 하나하나까지도 무척 생생하다. 작품을 보고 있으면, 마치 행위 예술가가 앉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만지면 움직일 것만 같고 살아 숨쉬고 있다고 느낄 정도로 말이다. 무엇보다 ‘피에타’는 고요하고 절제된 슬픔을 간직한, 뭔가 초월한 듯한 성모 마리아의 표정이 큰 특징이다.

다른 피에타 조각상과 비교해보자. ‘뢴트겐 피에타’는 미켈란젤로보다 앞서서 1300년경 독일에서 제작된 작품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였다. 예수 몸의 못 자국, 손·발·옆구리의 상처에서 솟아나는 핏방울, 끔찍하게 손상된 육체, 고통스러운 얼굴을 통해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당한 고통을 직설적으로 형상화하였다. 마리아 역시 얼굴에 아들을 잃은 비통함이 가득하다. 이 작품의 포인트는 ‘고통을 얼마나 잘 묘사하느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뢴트겐 피에타’, 작가 미상, 1300년경, 채색목조, 높이86cm, 라인강 주립박물관. 사진 위키미디어커먼스
‘뢴트겐 피에타’, 작가 미상, 1300년경, 채색목조, 높이86cm, 라인강 주립박물관. 사진 위키미디어커먼스

중세 때 신학자 성 보나벤투라는 저서《그리스도 삶에 대한 명상》에서 성모 마리아의 고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참을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이리저리 그리스도의 손과 옆구리에 난 상처를 바라보았다. 그리스도의 얼굴과 머리를 바라본 마리아는 가시관의 흉터를, 쥐어뜯긴 턱수염을, 침과 피로 더러워진 얼굴을 응시하였다. (중략) ‘무릎에 앉고 있는 나의 아들아, 너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네 자신을 희생하였구나. 나는 기뻐해야 할 이 구원의 행위가 너무나 고통스럽고 괴롭구나!’”

‘뢴트겐 피에타’는 성 보나벤투라의 글에서 언급된, 자식을 잃은 애통한 어머니로서의 마리아의 슬픔을 고스란히 조각에 담은 것이다.

이와 반대로 미켈란젤로는 절제된 감정을 ‘피에타’에 담았다. 작품은 아들이 죽은 끔찍하고 처절한 상황을 너무나 차분하고 고요하게 표현하였다. 마리아의 품에 안긴 예수는 평안히 잠든 모습이며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마리아는 평온하여 마치 기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작품을 본 많은 사람들은 ‘통곡을 하는 성모의 모습보다 더 슬퍼 보인다.’고 말한다. ‘너무 슬퍼서 눈물도 나지 않는다.’는 말처럼 미켈란젤로의 이 도상圖像에는 조용하지만 깊은 슬픔이 담겨 있다. 자세히 바라보면, 아들의 마지막 체온이라도 느껴보려는 마리아,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육체적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예수가 보인다. 그들의 담담하고 차분한 모습은 오히려 비극적인 분위기를 극대화시킨다.

위에서 바라본 ‘피에타’. 사진 la-pieta.org
위에서 바라본 ‘피에타’. 사진 la-pieta.org

'성 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가 추앙 받는 두 번째 이유는 특별한 구도 때문이다. 르네상스 회화와 조각에서는 삼각형 구도를 많이 사용하였다. ‘피에타’ 역시 삼각 구도에 따라 만들어졌다. 삼각형 안에 피에타를 넣으면 안정적인 조형미를 드러내는 동시에 관객의 집중도를 높일 수 있다. 또한 2m나 되는 큰 조각상이 무거운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넘어지지 않도록 하단을 크게 만들어 지지대 역할을 하게 해야 했다. 그래서 성모의 머리는 작게, 몸통과 입고 있는 옷은 더 크게 표현하여 안정감과 시각적인 효과를 동시에 주려고 설계하였다. 이러한 삼각형의 구도는 ‘피에타’의 차분한 아름다움을 배가시킨다.

세 번째 이유는 ‘신의 관점’에서 바라본 ‘피에타’ 때문이다. ‘피에타’는 정면이 아닌 위에서 내려다 볼 때, 미켈란젤로의 진짜 의도를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작품을 보고 “성모가 예수 그리스도보다 크게 제작되었다!”, “성모가 주인공인 것처럼 보인다!”, “아들이 죽었는데 슬퍼 보이지 않는다.”고 비난했을 때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말했다.

“이 조각은 신에게 바치는 것이니 감히 인간의 시선으로 평가하지 말라.”

그의 말대로 신의 시선에서 바라보려면 위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위에서 내려다 볼 때, 작품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인간의 눈높이에서는 성모의 커다란 존재감이 눈에 띄지만, 위에서 보았을 때 즉, ‘신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피에타’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겪은 예수만 집중적으로 보인다. 또한 90도 각도 위에서 내려다보면 예수의 신체 비율이 완벽하게 들어맞도록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아닌 신의 관점에서 미켈란젤로는 피에타를 형상화한 듯하다. 이처럼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섬세하고 생생하게 죽음과 애도를 묘사하였고, 마리아의 표정에 슬픔을 초월한 절제를 담았으며, 위에서 내려다본 신의 시각까지 고려하여 창조되었다.

1499년, 20대 초반의 미켈란젤로가 ‘피에타’를 처음 세상에 내놨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완벽한 해부학, 뛰어난 기교, 우아한 아름다움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대리석이라는 재료가 가지고 있는 성질을 넘어 영혼의 형상을 시각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르네상스 조각을 정점까지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으며 이로써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 천재 조각가로 불리게 된다. 그의 ‘피에타’는 수없이 패러디되고 오마주되었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미켈란젤로만이 피에타를 다룬 것은 아니다.

‘피에타’, 안니발레 카라치, 1602~1607년, 오일에 캔버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피에타’, 안니발레 카라치, 1602~1607년, 오일에 캔버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피에타’, 조반니 벨리니, 1460년, 목판에 템페라, 밀라노 브레라미술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피에타’, 조반니 벨리니, 1460년, 목판에 템페라, 밀라노 브레라미술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피에타’, 피에트로 페루지노, 1494~1495년, 목판에 템페라,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피에타’, 피에트로 페루지노, 1494~1495년, 목판에 템페라,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피에타를 그렸을까? 실제로 성경에서 예수가 마리아의 무릎에서 숨을 거뒀다는 구절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기 위해 후대 사람들이 추측하여 만든 이 장면을 미술에서 작품 주제로 자주 사용하였다. 동시에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 인간이 겪는 커다란 상실의 고통을 예수를 바라보는 마리아의 마음에 불어 넣었다. 그리하여 피에타는 종교적인 주제를 넘어 보편적인 공감의 대상이 되어 오랫동안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아왔다. 피에타라는 주제로 많은 예술가가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했지만, 표현된 한 가지는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 자식을 향한 진정한 사랑인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어머니에게는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잘생긴 외모의 어머니도, 못난 얼굴의 어머니의 마음도 그렇다. 많이 배운 어머니에게도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못 배운 어머니도 그렇다. 돈이 많은 어머니는 돈이 많은 대로 자식을 위하고, 돈이 없는 어머니는 돈이 없는 대로 자식을 위하고 사랑한다. 어떤 모양으로 있든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동일하다. 부모가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해도, 물질적으로 뒷받침을 많이 해주지 못하더라고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은 한결같다. 마치 수많은 피에타를 통해 죽어가는 아들을 향한 슬픔, 단 한 가지가 표현된 것처럼 말이다.

나도 자식일 때 몰랐던 엄마의 마음을 두 아이를 키우며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거나 성격이 좋아서 좋은 것이 아니라 내 자식이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우리는 부모를 오해할 때가 많다. 내가 괜찮은 학교 또는 회사에 들어가야 부끄럽지 않은 자식이고, 형제간에도 더 뛰어난 형제를 부모가 좋아할 것이라고 착각할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부모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나의 모습과 상관없이 늘 옆에서 응원해주고 지지해 주는 것이 바로 부모다. 때로는 내 생각과 다른 길을 제시하기도 하며, 쓴소리로 나무랄 때도 있어도 부모님은 한결같이 나를 지켜주고 사랑한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부모님께 전화를 드려 사랑과 감사의 인사를 전했으면 좋겠다.

글쓴이 정유진

충북대학교 미술과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 교육대학원에서 미술과 석사학위를 받았다. 다수의 단체전을 통해 작품 발표를 해왔으며, 길가온 갤러리에서 갤러리스트로 활동했다. 행복한미술심리센터에서 교육 프로그램을 연구했고, 현재 파랑새 인성교육원 대표로서 미술교육에 대해 계속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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