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까지 더위가 한창인 날씨 속에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그로부터 넉 달 후 병석에 오래 계셨던 어머니가 갑자기 뇌사 상태가 되었다. 나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병원의 보호자 대기실에 머무르며 하루 두 번 있는 중환자실 면회 시간을 놓치지 않았다. 어렸을 때 밤에 엄마 손을 꼭 잡고 잠을 자면서 “엄마, 내가 크면 엄마 좋은 데 많이 데려갈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줘.”라는 철없는 소리를 하거나, “엄마, 나중에 내가 돈을 많이 벌어서 엄마 줄 거니까 걱정하지 마.”라며 세상모르는 이야기를 자주 했었다. 어머니는 이런 아들이 있어서 좋다고 하시며 흐뭇하게 웃기만 하셨다. 이제 조금이라도 내가 어머니에게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는 때가 왔는데, 어머니는 아무런 의식 없이 차가운 침대 위에 누워만 계셨다.

나는 중환자실에서 어머니와 어렸을 때의 이야기를 계속 나눴다. 나 혼자 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어머니가 뭐라고 대답하실지 다 알고 있었기에 우리는 서로 말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어렸을 때, 어머니와 함께 있으면 터무니 없는 꿈도 마치 현실에서 이루어진 것인 양 흥분하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게 그리 좋았다.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더라도 상상하다 보면, 우리 가족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멋진 곳에서 여행을 하고 있었고, 아담한 식당에 가서 맛있고 따뜻한 음식을 나눠 먹고 있었다. 어머니는 세상의 찌끼가 묻은 말들을 우리의 이야기에 섞지 않으셨고, 아들이 말도 안 되는 꿈을 꾸어도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하시면서 나보다 더 기뻐하셨다. 항상 그렇게 하셔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는 나에 대한 어머니의 긍정을 의심하였지만, 나의 변심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여전하셨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이제 도서관에 가서 라면을 사 먹을 수 있다고 좋아하는 나에게 어머니는 “우리 아들은 앞으로 책을 많이 보면서 살겠네.”라고 하셨고, 비행기를 한 번도 타보지 못한 내가 하늘의 비행기를 보며 나도 탈 수 있는 날이 올까라고 중얼거리면 “그럼, 넌 비행기를 타고 먼 나라를 자주 다니게 될 거야.”라고 하셨다.

고등학교에서 꼴찌를 하고, 삐뚤어진 학창 시절을 보내고 있어도 “안 해서 그렇지, 하기만 하면 잘할 거야. 우리 아들은 변호사가 되어 이 나라 저 나라를 다니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줄 거야.”라고 하셨다.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나와 내가 보는 나는 완전히 달랐고, 어머니는 당신의 마음속에 그려 놓은 나를 믿으셨다.

나는 이런 어머니를 그냥 보내드릴 수 없었다. 나에게 어머니이기도 했지만 가장 좋은 친구이자 선생님이셨다. 나에게 안 된다는 말씀을 단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으셨던 분이었다. 몇 달 전에 급작스럽게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나는 방법만 있다면 어머니를 붙잡고 싶었다. 더 이상 입원 연장이 안 되겠다는 대학병원의 요청으로 나는 어머니를 요양병원으로 모셨다. 그리고 울적한 마음에 집 앞의 초등학교 운동장을 걷고 있었다. 하늘을 쳐다보며 원망 섞인 소리로 두 달이 다 되도록 똑같은 기도를 했다. “우리 어머니 살려주시면 안 됩니까?”, “다른 사람들은 아파도 잘 일어나고, 살아나는데, 왜 우리 어머니는 안 됩니까? 아버지 가신 지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운동장을 몇 바퀴째 돌고 있는데, 어머니가 나에게 조용히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심란해하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아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고 가서 편안하고, 이제 작별할 시간이라고 말씀하시는 듯했다. 나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지을 어머니의 표정을 떠올려 보았다. 슬프고 괴로운 표정이 아니라 따뜻하고 부드러운 옛날의 그 표정이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했던 인사를 어머니에게도 했다. “어머니, 너무너무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나는 이 일이 내 상상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만 생각을 하고, 다음 날 아침에 병원 면회를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막 집을 나서려고 하는데,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그렇다. 이제 나는 어머니의 따뜻한 체온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지금의 나는 책과 함께 살고, 틈틈이 해외를 다니고 있으며, 변호사로 분주하게 지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행복한 가정이 있고, 주변에는 나를 도와주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감사하고, 함께하는 사람들 때문에 행복하다. 며칠 전에 아내가 말했다. “당신은 어떻게 하는 일마다 다 되는 거예요?” 물론 그렇지 않은 것이 더 많다. 하지만 우리 눈에는 우리 삶에 감사와 행복이 넘치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맞아. 나도 왜 그런지는 잘 몰라.”라고 아내에게 대답했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만큼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안다. 지금의 나는 어머니의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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