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듣는’ 투머로우

2021년 12월호부터《투머로우》가 오디오북으로 제작되어 ‘듣는 잡지’로 시각장애인들에게 보급되고 있다. 이 일이 가능했던 것은 시각장애인이자 투머로우 애독자인 박용택씨의 열정 덕분이다.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영역을 훨씬 더 잘 느끼고 이해하는 그는, 탁월한 촉각으로 사람의 몸 상태와 성격까지 다 파악해낸다.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꿈을 향해 도전하면서 살아가는 그의 마인드를 소개한다.

나는 열 살이 아직 안 되었을 때 실명失明하고 말았다. 어느 날부터 빛이 비취면 눈이 부셔서 견딜 수가 없었고, 아주 약한 빛줄기도 받아들이지 못해 눈을 가려야 했다. 그렇게 시작된 증세가 날로 심해지더니 결국 빛조차 볼 수 없게 되었다. 같이 뛰놀던 친구들은 다 학교에 가는데 나는 혼자 집에서 라디오나 들으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촉감으로 보는 세상

호기심이 강한 나는 라디오 속에서 나오는 온갖 소리가 너무 신기했다. 그러니 어찌 그 속을 만져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라디오를 해체해서 전파를 받아들이는 안테나와 그 속에 동조 코일과 주파수를 선별해서 수신하게 하는 바리콘, 그리고 전파를 타고 온 오디오 신호를 추출하고 증폭시켜 스피커를 구동시키는 원리를 알았다. 이렇게 하나하나씩 발견할 때마다 느끼는 쾌감은 혼자 있는 외로움을 떨쳐버리기에 충분했다.

그 후 시각장애인 학교에 진학해서 점자를 배우고 물리치료 기술을 익혔다. 졸업 후 척추교정원을 열었는데, 환자들로부터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원장님은 손가락에 눈이 있나 봐요! 아픈 곳을 어쩜 그리 정확하게 짚어서 치료를 하는지 신기해요!” 그때마다 내가 “피부로 덮여 있는 병은 눈으로는 찾을 수 없는데, 예민한 촉각이 그걸 찾아낼 수 있어요!”라고 답하면 모두들 고개를 끄덕인다.

시력 대신에 생긴 능력들

나는 눈으로 보는 시력은 잃었지만, 그로 인해 새로운 눈을 얻었다. 시각장애인은 모든 사물을 손으로 만져서 파악하는 훈련을 오래 해왔기 때문에, 손가락으로 전해지는 촉각을 통해 정보를 분석하는 능력이 일반인보다 탁월하다. 촉각이 특별히 예민한 사람은 촉진觸診만으로도 엑스레이나 MRI가 정확히 찾아내지 못하는 근육 상태를 금방 알아낸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유방암 조기 발견에 시각장애인들의 촉진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상대방의 목소리, 말투, 사용하는 어휘만 듣고도 그 사람의 성격을 거의 맞춘다. 얼굴 표정 외에 목소리, 말투가 사람의 성향 파악에 좋은 단서를 주기 때문이다. 뉴스를 티비로 보면 영상과 소리가 동시에 나오는데, 이럴 경우 소리가 제공해 주는 정보를 놓치기 쉽다. 그래서 시각장애인이 일반인보다 내용 파악을 더 잘한다는 연구 결과도 나와 있다. 책을 점자로 읽거나 오디오로 들을 경우에도 시각장애인들이 내용을 인지하는 정도는 매우 수준이 깊은 편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시각으로 인생의 모든 것을 느끼고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시각장애인은 눈이 아닌 청각, 후각, 촉각을 통해 훨씬 많은 것들을 볼 수 있다.

사진 박용택 제공

방송 특종감이 된 자전거 타기

앞이 안 보이는 내가 자전거를 타게 된 이야기를 하자면 우습기 짝이 없다. 어릴 적 형들이 타는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시골길을 달리노라면 그 상쾌함이 너무 좋았다. 가끔 밤에 아버지 자전거를 끌고 집밖으로 나가 몰래 탔다. 어릴 적 시골길은 내게 비교적 익숙했기에, 한 발만 페달에 올리고 다른 한 발은 조심스럽게 땅에 대고 달렸다. 그러다 가끔씩 땅을 딛고 있는 발을 떼보기도 하면서 연습을 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균형을 잡을 수 있게 된 후로는 길가에서 다른 자전거가 가면 그 소리를 듣고 페달을 밟아 뒤따르며 제법 달려보기도 했다. 어느 날, 친구를 앞서 달리게 하고 나는 자전거를 타고 친구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따라갔다. 그런데 내 자전거가 점점 가깝게 따라 붙자 겁이 난 친구는 길가 논으로 피해버렸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친구의 기척을 따라 핸들을 꺾었고 자전거는 논바닥에 박혔다. 그날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앞으로 자전거를 타지 않겠노라고 다짐을 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고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둘이서 강변 둑길을 자주 걸었는데 하루는 내가 이런 제안을 했다. “내가 자전거를 탈 줄 아는데 뒤에 같이 타겠어요?”

하지만 불안했던지, 내가 자전거를 타면 아내는 내 팔을 잡고 같이 뛰어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자전거를 빌려 한번 타보았는데 옛날 기억이 솔솔 나면서 재미가 있었다. 내 자전거 실력을 알아 본 아내가 나중엔 내 뒤에 앉아 함께 타기 시작했다. 아내가 뒤에 타서 길 안내를 하니 내 자전거 실력은 갈수록 늘었다. 그 후에 승용차를 구입하고, 시술원이 바빠지면서 자전거 타기가 중단되었다.

그러다 약 10년 전부터 내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일이 고되다 보니 몸살 약을 자주 먹었는데 약물 부작용으로 여러 질병이 찾아왔다. 결국 일을 더 못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주 3일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엔 아내와 산을 오르면서 운동을 시작했다. 낙동강변을 따라 좋은 자전거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2015년부터 다시 자전거를 탔다. 그 소식이 알려져, SBS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 담당 작가로부터 연락이 왔고, 제작진이 직접 방문해 정말 세상에 보기 드문 특종감이라며 우리를 취재해갔다. 그것을 본 여타 방송사들의 연락이 끊이지 않았고 계속 취재하러 왔다. 지금도 그때 제작된 콘텐츠가 여기저기서 송출되고 있다.

잡지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는 기기. (사진 박용택)
잡지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는 기기. (사진 박용택)

교감으로 타는 자전거

아내는 요즘도 일과 중에 자전거를 타며 강변을 달리는 시간이 제일 행복하다고 한다. 쑥이 많이 있는 곳에 다다르면 잠시 자전거를 세워두고 쑥을 캔다. 집에 가져와 도다리쑥국을 끓여 먹기도 하고, 하얀 쌀가루를 뿌려가며 쑥털털이를 쪄서 먹으면 봄기운이 입안 가득 퍼지며 마음까지 풍요로워진다.

5~6월이면 대숲을 지나다 죽순을 꺾어 자전거 핸들 바구니에 잔뜩 싣고 와서 죽순된장찌개며 죽순오리양념구이를 해서 갓 지은 밥과 함께 먹으면 마음 가득히 아내의 사랑이 전해진다. 바람이 부는 날은 가슴 가득히 바람을 품으며 달리는데 강물이 마치 파도처럼 출렁인다. 하얀 거품띠를 만들며 요동치는 강물이 철썩거리며 소리를 낸다. 때로 양산에 차를 세워두고 타기 시작하여 밀양의 삼랑진까지 20km의 거리를 대문 드나들 듯이 달리다 보니, 이제 내 건강은 많이 회복되었다.

강변을 따라 아내와 자주 걷는다. 아내는 뭉게구름을 보며 양들이 노닌다고 하거나, 수제비를 뜯어놓았다고 하거나, 개들이 꼬리를 물고 움직인다는 등의 표현으로 동화 작가처럼 재미있게 묘사해준다. (사진 KBS1 사랑의가족)
강변을 따라 아내와 자주 걷는다. 아내는 뭉게구름을 보며 양들이 노닌다고 하거나, 수제비를 뜯어놓았다고 하거나, 개들이 꼬리를 물고 움직인다는 등의 표현으로 동화 작가처럼 재미있게 묘사해준다. (사진 KBS1 사랑의가족)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듣는’ 투머로우

몇 년 전 지인으로부터 투머로우 잡지가 너무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문자로 펴낸 종이 잡지여서 누가 읽어주지 않으면 방법이 없었다. 가끔 아내가 그 잡지를 읽고 느낀 점들을 말해주었는데 공감이 가는 내용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용기를 내어 투머로우 잡지사에 전화를 걸었다. 시각장애인을 위해 음성 파일을 만들 원고를 요청했는데 운 좋게도 받아들여졌다. 그때부터 내가 매달 투머로우 원고를 mp3 파일로 제작하여 주변에 가까이 지내는 시각장애인들 스무 명에게 나눠주었다. 2021년 12월호부터 시작을 했으니 벌써 1년 반이 가까워온다.

오디오 파일은 mp3 재생이 가능한 기기만 있으면 누구나 들을 수 있다. 기사 하나하나를 따로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손쉽게 다음 기사와 이전 기사를 건너뛰며 이동할 수 있고, 기기의 기능에 따라 속도 조절도 할 수 있고, 듣던 곳을 기억해두었다가 다음에 이어서 듣기도 가능하다.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손이 되어주는 아내. 그에게 아내는 빛과 같은 존재다. (사진 KBS1 사랑의가족)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손이 되어주는 아내. 그에게 아내는 빛과 같은 존재다. (사진 KBS1 사랑의가족)

내 삶에 감동을 더해주는 잡지

기사 중에서 ‘건달에게 아들을 맡긴 정승’ 이야기는 시각장애인 독자들로부터 좋다는 피드백을 많이 받았다. ‘역시 정승은 달라. 지혜는 비범해.’, ‘우리도 자녀들을 그렇게 키웠다면 좀 더 다른 삶을 살게 했을 텐데.’ 같은 소감이 올라왔다. 작년 12월호 투머로우에서 ‘Homeless is not hopeless’라는 글을 읽으며 큰 감동을 받았다.

가산을 모두 압류당한 가난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아빠에게 저금통을 건네며 힘이 되고파 했던 어린아이가 내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었다. 이 이야기를 내 경우에 대입시켜 보았다. ‘Sightless is not hopeless.’ 운율은 맞지 않지만, ‘시력은 잃었어도 희망까지 잃은 것은 아니다.’ 나는 반쯤 열린 방문에 부딪혀 입술에 피가 나기도 하고, 통로 입구에 세워 둔 배달 오토바이에 무릎을 다쳐 며칠간 절뚝이며 다닌 때도 있었다. 눈만 밝았다면 당하지 않았을 일들이 지금 내게 수없이 벌어진다. 그때 비참한 생각이 들어 기가 꺾여 있으면 아내는 울먹이며 내게 말을 건넨다. “그래도 당신을 제일 사랑하는 내가 곁에 있잖아! 우리 힘을 내어 다시 걸어가요. 응?” 언제나 희망은 내 편이다. 아내의 그 말에 절망이 안개가 걷히듯 사라지고, 나는 다시 일어선다. 이렇게 살아온 세월이 벌써 예순 나이를 넘겼다.

매달 투머로우를 듣는 한, 내게 내일은 늘 밝고 희망적이다.

글쓴이 박용택

현대물리시술원 원장. 예민한 촉각으로 척추를 교정해 목 디스크, 허리 디스크, 오십견으로 오는 증상들을 치료한다. 자신에게 희망을 심어준 잡지 투머로우를 다른 시각장애인들에게도 보급하고자 오디오북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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