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봄이 시작되면 해마다 어김없이 찾는 곳이 경기도 장흥면에 있는 양주화훼단지다. 아직 꽃샘 추위가 있지만, 이곳에 가면 초록식물과 봄꽃들을 먼저 만날 수 있다. 다육식물, 관엽식물, 형형색색 봄꽃을 피운 화분들이 가슴을 설렘으로 바꾸어준다. 겨우내 누군가 애써 가꾸어 두었다가 내놓은 선물처럼 아기 손톱만치 작은 안개꽃, 꽃이 꽉찬 수국, 겹겹이 올라오는 장미 등을 보면 마음이 열린다.

차를 조금 더 타고 가면 파주 마장호수가 나오는데 호수 둘레길을 따라 걷다보면 쭉쭉 뻗은 소나무 숲과 단풍 나무들을 볼 수 있다. 눈길을 멀리 옮기면 호수 넘어 인적이 드문 곳에 있는 크고 우람한 나무들도 보인다.

사진 국립삼림과학원 웹진
사진 국립삼림과학원 웹진

산 길을 걷다 보면 수령이 어린 나무가 있고, 굵고 키가 큰 나무, 바위 사이로 뿌리를 내려 세찬 바람에 휘어져 자라는 나무도 있다. 때로 병이 든 나무도 있고, 뿌리가 사면에 노출된 자세로 살고 있는 나무도 있다. 산에 홀로 아무런 간섭 없이 자란 나무를 보면 각종 덩굴 식물에 싸여 있거나 모양도 볼품이 없다. 또한 상처가 있는 나무들은 다른 균류들이 번식할 조건을 만들어주면서 조금씩 고사해간다. 그러다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면 나무 전체가 말라 죽기도 한다.

소나무의 경우, 눈에는 안 보여도 현미경으로 관찰해 보면 해충이 산다. 소나무는 병충해를 스스로 이겨낼 힘이 없기 때문에 탈색, 잎마름병에 걸리기도 하고 주변의 다른 나무들에게도 피해를 준다. 하지만 병든 나무도 관리자가 있으면 초기에 해충을 잡아주고 돌보아서 다시 건강해질 수 있다.

대목장大木匠은 숲에서 대들보감, 서까래감, 문틀감으로 쓰일 나무들을 먼저 알아본다고 한다. 나중에 재목材木이 될 성 싶은 나무는 잔가지도 잘라주고 잘 자랄 수 있도록 형태를 잡아주며 관심을 보인다. 좋은 재목이 되려면 키가 작을 때부터 삐죽 튀어나온 가지를 잘라 줘야 한다. 어린 시기에 잘라 주지 않으면 점점 굵어져 다듬기도 어렵고, 뒤늦게 잘라내면 상처도 커서 나무가 더 큰 아픔을 겪게 된다.

관리자로부터 꾸준히 돌봄을 받은 나무는 제 맘대로 자란 나무보다 형태가 반듯하고 목질이 좋아서 나중에 좋은 건축자재로 사용된다. 아니면 공원에 조경수로 옮겨져서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에세이《사흘만 볼 수 있다면》은 헬렌 켈러가 50대에 이르러 3일 동안 세상을 볼 경우를 가정해서 쓴 자전적 글이다. 태어난 지 19개월 만에 심한 병을 앓은 헬렌은 그 후유증으로 시력과 청력을 잃고 말도 못하게 되었다. 유년기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괴성을 지르거나 손짓과 발짓 뿐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제한된 형태로만 나타낼 수 있었던 헬렌은 점점 자라면서 표현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기에 암흑세계에 사는 것 같았다. 7살 무렵 가정교사로 앤 설리번 선생님이 왔을 때, 헬렌은 첫 만남을 ‘그는 내 손을 잡고, 나를 끌어당겨 양팔로 꼭 감싸 안았다.’고 표현했다. 이처럼 설리번은 어두움에 싸인 소녀를 이끌어내 세상의 밝은 빛 가운데 서게 하는 스승이 되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이 에세이를 ‘20세기 최고’로 선정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이 에세이를 ‘20세기 최고’로 선정했다.

설리번 선생님은 헬렌에게 사물마다 이름이 있다는 것과 세상에 대한 영감, 생명의 떨림 등 ‘영혼의 눈’을 뜨게 해주었고, 그의 교육을 받은 헬렌은 나중에 하버드 대학 부속 래드클리프를 졸업하게 된다. 정상인보다 세상을 더 섬세하게 관찰할 수 있고, 보이지 않는 영역까지 알 수 있도록 헬렌을 가르친 설리번은 ‘20세기를 대표하는 가장 존경 받는 스승’이 되었다.

설리번은 장애를 장애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상인처럼 헬렌을 가르쳤고, 이런 스승의 마음을 받아 들인 헬렌은 모든 역경을 희망과 소망으로 바꾸어서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강연자, 작가, 사회운동가로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어린 시절 헬렌은 마음에 맞지 않으면 선생님을 힘으로 밀어 붙이면서 하지 말라는 행동만 골라서 했다. 남의 접시에 남아 있는 음식을 일부러 집어 먹고, 누워서 발로 차고 소리 지르며 몇 시간씩 말썽을 부려 선생님을 녹초로 만들었다. 집안 사람들도 아이가 하고 싶어 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 두었기에, 헬렌은 부모와 하인, 놀이동무인 흑인 아이까지 모두의 위에서 폭군처럼 군림했다. 무엇을 갖고 싶은지 상대방에게 전달이 안 될 때마다 격한 감정을 드러냈고, 성장과 함께 욕구도 커지면서 헬렌은 점점 폭력적인 아이로 변해갔다.

 앤 설리번 선생과 헬렌 켈러(사진 위키피디아)
 앤 설리번 선생과 헬렌 켈러(사진 위키피디아)

설리번 선생님은 헬렌이 복종을 배우고 사랑이 뭔지 알 때까지 집에서 400미터 떨어진 외딴집으로 거처를 옮겨 지냈다. ‘푸른 담쟁이 집’이라고 부르는 이 집에서 헬렌과 단둘이 살기 시작하면서 설리번은 한 치의 양보도 아이에게 허용하지 않았다. 외딴집에서 헬렌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오면 가족들은 너무 견디기 어려워했다. 하지만 설리번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헬렌에게 복종부터 가르쳤다.

어떤 날엔 헬렌이 몹시 흥분해 발버둥을 치며 울다가 혼미 상태에 빠지기도 했고 식욕도 점점 줄어들었다. 헬렌의 가족은 아이가 병에 걸렸다며 집으로 데려오려고 했으나, 설리번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렇게 헬렌과 설리번 선생님의 치열한 싸움은 끊이지 않았다. 딸의 응석을 모두 받아주는 부모님과 늘 제 맘대로인 헬렌 사이에서, 설리번은 하고 싶은 대로 놔두는 것의 위험성을 계속 경고하고 주지시켰다.

이렇게 강직한 설리번에게도 가슴 아픈 어린 시절이 있었다. 술 중독자 아버지의 폭력, 이어진 어머니와 동생의 죽음으로 아동 보호소에 들어간 설리번은 아무도 믿지 못하는 공격적인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모두가 치료를 포기해, 설리번이 지하 독방에서 짐승처럼 지내고 있을 때 간호사 로라를 만난다. 로라는 설리번에게 183일 동안 “하나님이 너를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로라의 지극한 사랑과 관심이 설리번의 마음을 움직였고, 공격적인 성향이 바뀌어갔다. 2년 뒤 정상아 판정을 받은 설리번은 퍼킨스 시각장애아 학교에 입학해 공부를 했고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막무가내 소녀였던 설리번을 사랑으로 가르친 로라 간호사.(사진 www.phac.or.kr)
막무가내 소녀였던 설리번을 사랑으로 가르친 로라 간호사.(사진 www.phac.or.kr)

로라 간호사의 사랑으로 세상에 나온 설리번은,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아이를 돌볼 사람 구함!’이라는 구인 공고를 보면서 자신이 받은 사랑을 기억했다. 삼중 장애아인 헬렌을 가르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자신을 사랑으로 이끌어 준 로라의 사랑이었다. 설리번은 그렇게 헬렌과 48년을 함께했다.

산에 홀로 주인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자란 나무는 볼품이 없지만, 관리자가 있어 잘 가꾸어진 나무는 재목으로서 가치가 높다. 좋은 나무가 되려면 뿌리도 정리되고, 가지도 잘려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면 이전보다 잘 자라나 아름다운 조경수가 되어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는다.

어린 헬렌에게도 편하고 풍족한 집과 뭐든 다 해주는 가족을 떠나 사는 것이 처음엔 힘들었을 것이다. 외딴집에서 매일 전쟁 같은 싸움을 치르면서 설리번은 지극히 즉흥적인 헬렌의 마음속 가지들을 하나 둘씩 꺾어갔다. 마침내 선생님 사랑을 발견한 헬렌은 새로운 도전을 통해 행복을 개척하며 세상의 빛이 되었다.

로라 간호사의 진정한 사랑이 설리번 선생을 만들었고, 그에게 교육을 받은 헬렌은 ‘20세기 최대의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남았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진정성을 가지고 인생을 이끌어 줄 멘토가 있으면 좋겠다. 믿음이 가는 멘토를 만난다면 두려운 인생길도 밝게 바뀌어질 것이다.

 

글쓴이 노순미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했다. 중앙항업(주) 기획실, 농어촌공사 조사설계처를 거쳐 현재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기술경영융합대학에 교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2020년 교육부 혁신행정업무 유공자, 노원구 평생학습 증진 유공자로 선정되었다. 이외에 별내 ‘시월에 독서모임’ 대표로, 지역사회에서 강연과 토론회를 펼치고 있다 이런 재능기부 활동의 바탕엔 ‘부모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하다.’라는 교육철학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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