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싯 몸의 소설《달과 6펜스》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화가 폴 고갱. 흔히 ‘고갱’이라고 하면 고흐와 함께 거론되거나, 착한 고흐 vs. 나쁜 고갱으로 양분되기도 한다. 인터넷에 고갱을 검색해보면 연관 검색어로 ‘타히티 섬’이 나온다. 다른 화가들이 당시 예술의 중심축인 파리로 모여들 때, 그는 왜 남태평양 타히티 섬으로 향했을까?

폴 고갱Paul Gauguin이 태어난 1848년 당시 유럽은 한창 혁명 중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사업가 집안 출신의 자유주의 언론인이었는데 신문에 기고한 기사로 인해 프랑스에서 추방령을 받는다. 그래서 고갱 가족은 페루로 가는 배를 탔으나,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배에서 사망한다. 고갱은 6살까지 페루에서 살다가 프랑스로 돌아왔고 고등학교 졸업 후 상선 해병을 위한 도선사導船士가 된다. 23살에 배 타는 일을 그만 두고 고갱은 1871년에 파리로 와서 증권회사에 취직한다. 11년 동안 증권거래사로 일하며 큰돈을 벌었고, 그는 결혼해서 자녀 다섯을 둔 가장이 되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취미활동을 시작한다. 고갱도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그림 사는 일도 했다. 돈을 잘 벌고 취미생활도 하는 고갱은 그 당시에 최고의 남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기침체로 인해 프랑스 증권시장이 무너지면서 평화로웠던 일상이 깨진다. 한순간에 실업자가 된 고갱은 인생의 갈림길에서 화가의 길을 선택한다. 취미로 하던 미술을 업으로 삼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하겠지만, 고갱은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하며 주말마다 그림을 그렸고 이미 취미를 넘어선 수준이었다. 책상에 앉아 증권을 사고파는 것보다 붓을 들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그림을 그리겠다고 정했을 때 그는 해방감을 느꼈을까?

‘레 미제라블’, 1888년, 캔버스에 유채물감, 반고흐미술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레 미제라블’, 1888년, 캔버스에 유채물감, 반고흐미술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아내의 반대에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고갱은 퇴직금으로 미술용품을 사들이면서 화가의 길을 준비했다. 하지만 쉽게 성공할 리가 없었다. 갈수록 삶이 궁색해지자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림 그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고갱은 대상을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화풍을 넘어서 자신의 상상을 더하고 작품 속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여 전달하고자 하였다.

고갱은 1885년에 자화상을 그린 뒤 싸인과 함께 빅토르 위고의 소설 제목인 ‘레 미제라블’이라고 썼다.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을 화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가족조차 외면해버린 상황이었으나, 고갱은 그림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생계를 위해 전단지 붙이는 일까지 하면서 그는 계속 그림을 그렸다. 누가 봐도 열정과 끈기가 대단한 화가였다.

그는 항상 성공을 꿈꿔왔다

1886년, 제8회 인상파 전람회에 그는 모든 것을 걸고 출품했다. 참여한 작가들 중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출품한 걸로 보아, 기대와 확신 그리고 자신감이 분명했던 것같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그의 작품은 전혀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못했다.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 1859~1891)의 출품작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에 모든 관람자들의 시선이 모였기 때문이었다.

쇠라에게 선수를 뺏긴 고갱은 씁쓸했을 것이다. 기대가 무너진 그는 분노를 표출하며 항구도시 퐁타벤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다시 자유를 느끼며 자신만의 화풍을 만드는 것에 더 집중했다.

조르주 쇠라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1884~1886년, 유채, 시카고미술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조르주 쇠라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1884~1886년, 유채, 시카고미술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그리고 1887년에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는데, 이때 고갱과 고흐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되었다. 고흐의 동생인 테오가 고갱의 그림을 구입했고, 이를 계기로 고갱이 전업화가로 등단하게 된 것이다. 테오의 권유로 고갱은 고흐가 머물고 있는 ‘아를’로 향한다. 그러나 고갱은 아를의 노란 집을 ‘무척 작고 꾀죄죄한 곳’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고흐를 좋아했던 것 같지 않다. 그저 자신의 그림을 사주는 테오와의 관계를 잘 유지하려고 아를로 갔던 것이 아닐까.

고흐와 고갱은 그림을 바라보는 견해도 달랐고, 성격이 따뜻한 고흐와 냉소적인 고갱은 모든 것이 반대였다. 둘은 서로에게 양보할 의사가 없어 종종 싸웠다. 결국 고흐가 자신의 귓불을 자르는 일이 생기자, 고갱은 파리로 다시 돌아간다.

이후 프랑스의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고갱은 오직 자신만의 화풍과 색채를 찾는 일에 몰두하였고, 우리가 아는 유명한 작품을 그리게 된다.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작품은 자신의 오른쪽 위에 예수가 그려져 있고 예수의 왼쪽에 고갱 자신을 그려 넣어 신앙과 현실 세계를 대조시켰다. 그림 속 황금 들판은 예수의 부활을 의미하며,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해 순교한 것처럼 자신도 예술을 위해 삶을 던졌다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1890년, 캔버스에 유채, 오르세미술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1890년, 캔버스에 유채, 오르세미술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누가 감히 예수그리스도를 자신과 견주어 표현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자신의 그림에 관심이 없었고, 그림은 좀처럼 팔리지 않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로 겨우 끼니만 해결하는 것이 그의 현실이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막막한 시간이었지만 그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것 같다.

우리는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 전에 많은 준비를 해두려고 한다. 달리 표현하면, 많은 준비를 하지 못해서 시작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도전을 위한 시작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나 또한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시작이 너무 어려웠다. 연년생 두 딸을 돌보며 집안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저 글을 쓴다는 것은 나의 작은 꿈 리스트의 하나였다. 시간적인 여유가 없고, 글을 쓸 만한 능력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글쓰기의 꿈은 현실에서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도전을 했다. 그리고 할 수 있다는 마음 하나로 벌써 투머로우 잡지에 두 번째 글을 쓰고 있다. 당장 눈에 보이는 불편한 현실과 적당히 타협했다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어떤 비평가는 고갱이 오만하다고 하지만, 고갱이 지닌 자신감과 새로운 일에 과감히 도전하는 정신, 어려운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성공을 끝까지 밀고 나아가는 태도는 지금 우리에게 절실할 때가 정말 많다. 그 후 고갱은 타히티 섬으로 향한다.

그는 왜 타히티 섬으로 갔을까?

그도 처음부터 멀리 타히티 섬으로 떠나려 했던 것은 아니었고, 파리에서 성공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가 간절히 원하던 것은 ‘새로운 양식’이었고, 당시 파리에는 인상주의 화파가 인기몰이를 하고 있었던 터라 그곳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상징적인 새 화풍을 만들어내기 어려웠다. 고갱은 순수함이 가득한 원시 사회로 떠나고 싶었고, 이를 이루기 위해 1891년 타히티 섬으로 향한다.

남태평양 한가운데에 있는 타히티 섬. 고갱은 문명사회를 떠나 섬에 가면 가난해도 욕심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곳에서 강렬한 색채와 훼손되지 않은 풍경을 접했다. 2년 동안 머물면서 마음껏 그림을 그린 그는 다시 파리로 돌아온다. 이번 파리 입성은 그의 인생에 두 번째 도전이었다. 첫 번째에는 조르주 쇠라에게 밀려 실패했지만, 두 번째엔 자신이 완성한 ‘새로운 양식’이 큰 파장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파리 미술계의 이목을 끌지도 못했고, 그의 작품을 보고 혹평까지 해대는 사람들이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해야 할까? 그때, 삼촌한테 물려받은 유산마저 도둑을 맞아 실의에 젖은 고갱은 다시 타히티 섬으로 간다. 그리고 그 섬에서 가로 4미터에 이르는 대걸작 ‘우리는 어디서 와서, 무엇이 되어, 어디로 가는가?’를 2년에 걸쳐 완성한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무엇이 되어, 어디로 가는가?’, 1897~1889년, 캔버스에 유채물감, 보스턴미술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우리는 어디서 와서, 무엇이 되어, 어디로 가는가?’, 1897~1889년, 캔버스에 유채물감, 보스턴미술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이 작품은 오른쪽 아기에서부터 왼쪽 노인까지 유년기, 성년기, 노년기의 일생을 표현하고 있다. 실제로 보면, 어두운 청색 계열이라서 마치 죽음의 세계에 들어간 듯하고, 어디선가 뱀이 나올 것 같은 으스스한 느낌도 든다. 인간의 삶과 죽음이 얼마나 허무하며 또 얼마나 가까운 것인가. 고갱은 그것을 하나의 캔버스 안에 담았다. 빈털터리였을 때도, 처가살이를 했을 때도, 늘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게 그렸던 그림들과는 반대되는 화풍이다. 이 거대한 작품을 마지막으로 고갱은 1903년에 54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죽고 나서야 화가로 인정받고 유명해진 고갱. 그가 원하던 ‘새로운 양식’은 결국 만들어졌다. 그는 미술사에서의 한 획을 그을 만큼 거장이 되었고, 클루아조니즘*, 상징주의, 종합주의** 등의 화풍을 구현했으며 나아가 현대미술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클루아조니즘 : 대상에 두꺼운 윤곽선을 두르는 것
**종합주의 : 사물을 보고 직접 그리는 것이 아니라 기억과 상상에 의해 표현하려는 것

고갱은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도전하는 삶을 살았다. 자신만의 새로운 양식을 만드는 것에 몰두했고, 다른 사람이 가지 않은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증권거래를 하려면 가장 예민한 것이 실패 확률을 계산하고 예측하는 것인데, 그는 그림을 그릴 때에는 어떠한 실패 확률도 계산하지 않았다.

운동선수들이 가장 많이 하는 훈련 중 하나가 ‘자기 암시화’라고 한다. 해낼 수 있다고 끊임없이 주문을 외우는 것이다. 스케이팅의 금메달리스트 김연아 선수도 빙판에서 ‘나는 실수 없이 잘 할 수 있다’는 주문을 외웠다. 리우올림픽 때 펜싱 선수 김상영도 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할 수 있다’는 주문을 외워 펜싱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현실을 보면 안 될 조건과 이유가 많을 것이다. 그렇다고 안 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면 승산은 없다. ‘할 수 있다’고 정신을 가다듬고 자신감을 가진다면 어떤 상황에서든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고갱의 작품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글쓴이 정유진

충북대학교 미술과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 교육대학원에서 미술과 석사학위를 받았다. 다수의 단체전을 통해 작품 발표를 해왔으며, 길가온 갤러리에서 갤러리스트로 활동했다. 행복한미술심리센터에서 교육 프로그램을 연구했고, 현재 파랑새 인성교육원 대표로서 미술교육에 대해 계속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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