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일흔여섯의 노인은 오늘도 골방에 들어앉아 고서를 열심히 베껴 쓰며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노인이 15세의 나이에 스승께 받은 가르침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지키기 위함이다. 관 뚜껑을 덮기 전에는 스승의 ‘지성스럽고 뼈에 사무치는 가르침’을 저버릴 수 없다는 그의 이름은 치원巵園 황상, 그리고 그의 스승은 바로 다산茶山 정약용이다. 한양대 정민 교수가 쓴 글《삶을 바꾼 만남》은 정약용과 황상의 만남, 사제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정리情理를 이야기한다. ‘더벅머리 소년이 스승이 내린 짧은 글 한 편에 고무되어 삶이 송두리째 바뀌어가는 과정’을 그린 이 책은 어떤 드라마보다 극적이고 감동적이다. 읽고 난 나의 감상을 몇 자 보태 책의 내용을 소개한다.

다산 정약용은 정조 임금의 큰 사랑을 받았던 조선의 대학자였다. 그러나 정조가 세상을 떠난 뒤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1801년 11월 전라도 강진으로 이배되었다. 갈 곳이 없어 동문 밖 찬 우물 옆 주막집 봉놋방에 눌러앉았고, 유배자의 시름을 잊고 적막을 견디기 위해 시골 아전의 자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때 투박하지만 진솔하면서 명민한 눈빛을 가진 한 소년이 그의 눈에 들어온다. 다산이 이제 막 배움을 시작하는 그 아이에게 열심히 공부해야 할 것을 당부하자 소년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 그런데 제게 세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너무 둔하고, 둘째는 앞뒤가 꽉 막혔으며, 셋째는 답답합니다. 저 같은 아이도 정말 공부할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 다산은 민첩하게 금세 외우는 것, 예리하게 글을 잘 짓는 것, 깨달음이 재빠른 것은 오히려 자신의 머리를 믿고 대충 하게 하고, 튀려고만 하지 진중한 맛이 없다고 이른다. 오히려 “공부는 너 같은 사람이 해야 한다. 구멍은 어떻게 뚫어야 할까? 부지런하면 된다. 막힌 것을 틔우는 것은? 부지런히 하면 된다. 연마하는 것은 어찌해야 하지? 부지런히 하면 된다.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으라.”며 둔하고 답답한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으니 부지런하면 학문의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다산은 문답을 글로 써서 소년에게 주어 늘 마음을 다잡도록 하였다. 그 소년의 이름은 황상으로, 스승이 건넨 당부의 말을 ‘삼근계三勤戒’라고 부르며 평생의 신조로 삼게 된다.

《규장전운奎章全韻》
《규장전운奎章全韻》

묵묵히 스승이 하라는 대로

다산은 자신과 제자들에게 굉장히 엄격하고 까다로운 사람으로 유명했다. 귀양살이 18년 동안 매일 앉아서 저술에 몰두하는 바람에 바닥에 닿은 복사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났다고 한다. 그 정도로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가르치는 일에도 한없이 자애롭다가도 나무랄 때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진땀이 나도록 매서웠다. 공부를 소홀히 하거나 교만한 기색이 보이면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살벌했다. ‘임금의 엄명을 받았다.’, ‘뒤에서 장수가 칼을 뽑아들고 돌격 명령을 내렸다.’고 여기며 그렇게 정신을 번쩍 차리고 공부할 것을 일렀다.

다산은 황상이 하나를 물으면 서넛을 가르쳐주어야 직성이 풀렸고 혹 모르면서도 묻지 않고 그냥 넘어갈까봐 이것저것 예를 들면서 여러 번 반복해 일깨워줄 정도로 집요했다. 그렇게 해서 모르는 것을 반드시 깨우치게 만들었다. 황상이 열여덟 살에 장가를 들어 신혼의 단꿈에 빠져 공부 태도가 예전 같지 않자, 다산은 작심하고 그를 호되게 야단친다. 당분간 아내와 떨어져 공부만 할 것을 이르자, 황상은 그 길로 고성사 승방에 올라가 한 철을 보내며 초심을 되찾았다.

스승의 매정한 불호령에도 묵묵히 뜻을 받들며 스승이 하라는 대로 하는 제자가 황상이었다. 중간에 딴마음 먹지 않고 끝까지 견디어 다산의 가르침을 받든 사람은 수많은 제자 중 황상 한 사람뿐이었다고 정민 교수는 평했다.

같은 스승 아래 다른 제자들

많은 이들이 정약용의 집요함과 꼼꼼함을 존경하면서도 부담스러워했고 나중에 귀양살이가 끝나 다산이 한양으로 돌아가자 그를 뒷배로 삼고 출세의 욕망을 이루려고 하였다. 그렇게 배움의 뜻을 흐리고 스승을 변절한 대표적인 사람이 이학래다.

이학래는 다산의 가장 뛰어난 제자 중 하나이다. 편집과 정리에 탁월하여 다산의 작업에 가장 큰 도움이 된 조력자였다. 그러나 스승을 애써서 섬겨보았자 자신의 출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다산을 배신하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비난을 하고 다녔다. 입신출세에 대한 그의 과욕을 알아본 다산도 강진 시절 크게 염려했던 바이다.

다산에게 등을 돌린 후, 오랜 세월 아무 성과 없이 추사 김정희의 식객으로 서울 생활을 이어온 이학래는 70세 때 마지막으로 과거에 다시 응시한다. 그러나 또 낙방 하자 우물로 뛰어들어 생을 마감하였다. 같은 스승 아래, 두 제자의 대조적인 행보가 오래 마음에서 여운을 남긴다.

눈물겨운 재회와 작은 꾸러미

그런데 다산이 한양으로 떠난 뒤, 황상은 스승과 연락이 끊겼다. 황상이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고 나자, 집안 형편은 더 궁핍해지고 동생들도 아직 어려서 생계조차 힘들었다. 결국 그는 가족을 이끌고 백적산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 고된 농사를 지었다. 입에 풀칠해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황상이 산으로 들어간 발걸음에는 스승이 그를 위해 써 준《재황상유인첩題黃裳幽人帖》에 나오는 유인幽人의 삶을 서원하는 마음도 담겨 있었다. 스승은 강진 소식이 올라올 때마다 제자의 안위를 걱정했지만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간 제자 황상의 근황을 알아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다산 부부의 결혼 60주년인 회혼回婚에 이르러서야 황상은 한번 올라오라는 스승의 간곡한 편지를 거절하지 못하고 어려운 상경을 결심한다. 당시 스승의 나이는 일흔다섯으로 건강이 썩 좋지 않았다.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죽음을 앞에 둔 스승은 수없이 기다리며 생각했던 제자가 찾아오자 농사 일로 투박해진 황상의 손을 잡으며 지나온 세월을 묻고 들었다.

이튿날 새벽, 작별의 큰절을 올리는 황상에게 다산은 작은 꾸러미를 건넨다. 그 안에는《규장전운奎章全韻》작은 책자 한 권, 중국제 먹과 붓 하나, 담뱃대 하나와 부채 한 자루가 있었고 여비로 엽전 두 꿰미가 따로 묶여 있었다. 이는 고된 삶으로 잠시 접어두었던 시 공부를 다시 시작하라는 뜻이었다. 더우면 부채를 부치고 힘들면 담배도 한 대 피우면서 쉬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스승의 한결같은 가르침 앞에서, 그는 스승이 주신 보퉁이를 끌어안고 꺼이꺼이 울었다. 그토록 아끼고 그리워 하던 제자를 떠나보낸 사흘 뒤, 스승은 세상을 떴다.다산 정약용의 서거 소식을 들 은 황상은 자식처럼 장례의 모든 절차를 곁에서 지켰고, 상복을 갖춰 입고 낙향했다. 그리고 매년 스승의 기일마다 멀리 두릉 쪽을 바라보면서 곡哭을 했다.

끝나지 않는 인연

황상과 다산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다산의 두 아들 정학연, 정학유와의 우정은 기이하고 감동적이다. 황상은 다산의 죽음 이후 정학연과 많은 편지를 나누며 그를 만나기 위해 정말 어려운 상경 길에도 여러 번 오른다. 황상의 속 깊고 진솔 한 정에 두 형제는 감동했고 정학연은 정 씨와 황 씨 두 집안끼리 ‘정황계丁黃契’ 맺자고 제안한다. 정민 교수는 사제의 인연이 자식 대로 이어지고 스승의 아들과 제자가 집안의 이름으로 계를 맺으며 자손끼리도 아름다운 만남을 이어간 정황계의 사연은 달리 예를 찾기 어렵다고 평한다.

그리고 황상의 높은 시격詩格과 사람됨이 다산의 두 아들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 한다. 특히 시 방면에 소질을 드러내는 황상을 다산은 시인으로 키우고자 집중적인 훈련을 시킨 바 있었다. 유배지 제주에서 황상의 시를 본 추사 김정희는 큰 감동을 받았고, 귀양에서 풀려나 뭍에 도착하는 즉시 황상을 만나러 백적산 은거지를 찾아 갈 정도였다. 이를 계기로 황상은 추사와도 인연을 맺고 그의 집에 초대받아 한양에서 시명詩名을 날리게 된다.

황상은 이학래처럼 스승에게 무언가를 바라거나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스승의 가르침만을 아로새기며 자신의 삶 속에 실천하는 일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야욕이 아닌 순수한 배움의 자세가 황상에게 기대하지 않았던 명성까지 가져다 주었다.

삶을 바꾼 만남: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저자 정민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고전문학자의 한 사람으로, 현재 한양대 국문과 교수로 있다. 대표 저서로는《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고전문장론과 연암 박지원》, 《초월의 상상》, 《다산의 재발견》, 《미쳐야 미친다》등이 있다. 특히 조선시대 지성사를 연구해왔으며 한문학의 대중화에도 공헌하고 있다.
삶을 바꾼 만남: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저자 정민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고전문학자의 한 사람으로, 현재 한양대 국문과 교수로 있다. 대표 저서로는《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고전문장론과 연암 박지원》, 《초월의 상상》, 《다산의 재발견》, 《미쳐야 미친다》등이 있다. 특히 조선시대 지성사를 연구해왔으며 한문학의 대중화에도 공헌하고 있다.

눈 감을 때까지 한결같이 공부를 하며

일흔다섯이 되어서야 황상은 ‘임술기’라는 글을 썼다. 여기서 자신의 삶을 술회하기를, 스승께 받은 ‘삼근계’의 가르침을 평생 마음에 새기고 뼈에 새겨서 품고 살았다고 했다. 중간에 집안 형편으로 공부를 그만두고 농사를 지을 때도 스승의 말씀이 그를 붙들었고 스승이 시키는 대로, 부지런히 학문에 전념했노라고 선언했다. 비록 양반 출신이 아니고, 머리는 둔하며 집안이 가난할지라도, 부지런히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큰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스승이 심어준 신념은 황상의 마음에 불꽃이 되어 평생 사그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83세의 나이로 눈을 감을 때까지도 황상은 공부를 계속하며 시를 지었고 변함없이 스승을 생각했다. 말년에 지은 시들을 보면 ‘다산의 일들은 만 줄기 눈물’, ‘노둔함 안 따지고 큰 은혜 베푸셨네’, ‘나무하는 손자도 내 뜻을 아니 힘써 배움 집안에 전해주리라’와 같은 표현이 많이 나온다. 스승과 공부하던 일을 생각하면 늘 눈물이 난다. 제자의 부족함을 탓하지 않고 집요할 정도로 꼼꼼 하게 가르쳐주던 스승의 높은 가르침을 대대로 끊임없이 지키겠다는 황상의 마음가짐이 보인다. 그 역시 스승과 같이 한결같았다. 평생 서로에게 귀감이 되며 든든한 동행이 되어 준 정약용과 황상.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정말 아름답고 놀라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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