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우진택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 대개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게 되고, 주변에서 해주는 쓴소리를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반면에 자신의 약점을 아는 사람은 상대방의 충고를 그대로 수용한다. 사람의 변화는 바로 약점을 인정할 때 시작된다. 대학생 해외봉사단 ‘굿뉴스코’로 낯선 땅 ‘피지’에서 일 년을 보내고 온 우진택 씨가 그러하다. 

피지에서 군기반장으로 매번 내게 잔소리를 쏟아붓던 루떼 누나(왼쪽)는 잊을 수 없는 좋은 친구다. (사진 우진택.)
피지에서 군기반장으로 매번 내게 잔소리를 쏟아붓던 루떼 누나(왼쪽)는 잊을 수 없는 좋은 친구다. (사진 우진택.)

반갑습니다. 복학하고 한창 바쁘시겠네요. 

사실 저는 대학생이 된 후 코로나 사태로 학교에 간 날이 별로 없거든요. 요즘은 수업 들으러 다니느라, 동아리와 다양한 대외 활동을 이어가느라 좀 바빠요. 예전 같으면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뭐든지 혼자 생각하고 결정했지만, 이제는 주변 선배들의 충고를 들으며 하고 있어요. 덕분에 피지를 다녀온 후 ‘얼굴이 좋아졌다.’ ‘인상이 폈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요.(웃음)

원래 그렇게 활동적이셨나요? 

저는 중학생 때는 다소 방황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중2병이 좀 심했던 거 같아요. 저희 집 형편이 각종 대출금 압박으로 힘들었거든요. 부모님이 돈 때문에 다투시는 걸 보면 ‘내가 왜 태어났지?’ ‘왜 살아야 하지?’ 하는 회의가 들었어요. 학교생활에서 많이 겉돌았고, 장래에 대한 꿈도 없었어요. 3학년이 돼서야 인문계를 들어가기 위해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기초가 없어서 따라가기가 버겁더라고요. 학교를 일곱 군데나 지원했지만 모두 떨어졌어요. 인생에서 처음으로 실패를 경험하면서 눈물을 흘렸지요. 그 즈음에 형이 대안학교 입학을 물어보더라고요. 대안학교가 아니면 제가 중학생 시절처럼 방황하는 고등학생이 될 것 같아서, 아버지께 애원하다시피 매달렸어요. 결국 완강하시던 아버지께서도 제 장래를 생각해서 부산에 있는 대안학교에 보내주셨지요.

그렇게 들어간 학교에서 무척 열심히 살았어요. 부모님께서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비싼 기숙학교를 보내주신 거니까요. 미국으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 ‘아, 나는 정말 좁은 곳에 살고 있었고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바쁘게, 열심히 사는구나.’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그곳 선생님들의 말씀도 잘 따랐고요. 그러면서 제 가능성을 좀 봤던 거 같아요. 행동거지가 많이 바뀐 제가 방학 때 집으로 와서 중학교 친구들을 한 번씩 만나면 “진택이가 예전 진택이가 아니네. 너무 모범생이다.”라고 해서 오히려 서로 거리감이 느껴졌어요. 

대안학교에서처럼, 대학생이 되어서도 ‘모범생’ 소리를 들었나요?  

그렇지 않아요. 제 스스로 많이 변했다고 생각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저는 자신감이 넘쳤어요. 제가 대학에 가서도 고등학교 때처럼 열심히 공부도 하고, 책도 많이 읽고, 필요한 자격증도 따려고 했어요. 하지만 금세 느슨해졌어요. 또래 친구들이 신나게 노는 사진을 SNS로 보며 마음이 잘 잡히지 않았어요. 

한번은 누가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컴퓨터 게임을 하자고 해서 몇 판을 같이 했어요. 게임이 곧잘 되어 계속했고 결국 저는 빠져나오기가 힘들게 되었어요. 코로나로 매일 온라인 수업을 켜놓고 한쪽에서 게임을 했어요. 매일 늦잠을 자고, 밥도 제가 먹고 싶을 때 먹었어요. 나태해진 저를 보고 주변에서는 ‘진택이가 자기 마음대로 산다.’며 걱정을 하셨어요. 학과 성적이 좀처럼 잘 나오지 않으면 이번 학기도 망했다고 생각했어요. 

마지막 한 학기를 남기고 군 입대와 학업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을 즈음, 부모님께서 “이번에는 우리가 너를 이끄는 대로 한번 가봐라.” 하며 강력하게 말씀하셨어요. 후회와 자책의 연속이었는데 그 말에 꽂힌 듯 부모님이 추천하시는 굿뉴스코 대학생 해외봉사를 가게 된 거예요. 제 모든 단점들을 바꾸고 변하고 싶어서였어요. 

피지에서 생활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제가 바다와 물놀이를 무척 좋아해요. 전에 잡지에서 키리바시에 대한 기사를 본 적이 있거든요. 그 바다가 너무 예뻐서 처음에 키리바시를 지원했다가 인근 나라인 피지로 가게 되었죠. 처음 공항에 도착했을 때엔 너무 덥고 습했어요. 한국의 장마철 느낌인데 습도가 훨씬 심해서 불쾌지수가 높아요. 숙소에 도착해 짐을 내리다가 깜짝 놀랐어요. 제가 한국에서는 나름 덩치도 있고 힘도 센 편인데, 여자애들이 나와서 저희 짐을 막 나르는 거예요. 피지 여자들은 저보다 덩치도 훨씬 크고 힘도 좋아요. 거기에서부터 제 고정관념이 박살났어요. 현지 여자들이 삽질을 하며 농사를 짓거나 나무 타는 모습을 보면서도 기겁했고요. 그 앞에서 남자로서 자존심이 좀 상했는데, 곧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무엇보다도 피지는 개들 천국이에요. 집 밖으로 나가면 정말 사람 반, 개 반이라고 할 만큼 개가 많아요. 개똥이 길에 널렸고, 쓰레기를 버리면 개들이 봉지를 다 물어뜯어 놓아서 매일같이 청소를 다시 해야 했어요. 제가 여섯 살 때 길을 가다가 큰 개에게 물린 적이 있었어요. 그 뒤로 개가 너무 무서워서 개가 보이면 5분이면 갈 길도 15분 이상 돌아서 갈 정도로 피해 다녔어요. 그런데 ‘개들 천국’인 줄 모르고 제가 피지에 지원한 거예요. 온 지 얼마 안 돼서 같이 지내는 현지인 로떼 누나가 저보고 “너는 개가 무서워서 맨날 다른 길로 돌아다닌다.”라고 말하더라고요. 덕분에 ‘개에게 물려 죽더라도 가보자.’는 오기가 생겨 지금은 예전처럼 개를 무서워하지 않아요. 

지난해 10월, 피지 수도인 수바Suva 근교의 나우소리Nausori라는 작은 도시로 무전여행을 떠났다. 우연히 만난 마을 아이들과 영어로 대화하며 금세 친해졌다. (사진 우진택)

제가 피지에서 체중이 15킬로그램이나 줄었어요. 억지로 다이어트를 하는 세상에 좋은 거죠?(웃음) 그곳에서 카사바, 타로를 주식처럼 먹었는데 우리나라의 감자와 고구마 같아서 먹고 나면 배가 금방 꺼져요. 한국 대학생들을 위해 쌀밥을 따로 챙겨주시기도 했지만, 이런 식습관의 차이도 처음에는 적응하기가 힘들었어요. 

영어 실력도 일취월장했다고 들었어요. 

저는 원래 영어를 싫어했어요. 영어 점수도 잘 안 나왔고요. 대학을 영문과와 산림자원학과 두 군데에 합격했지만, 영어 공부가 싫어서 산림자원학과에 들어갔어요. 그 학과 학생은 거의 남자들이죠. 그런데 피지에 간 세 명의 봉사단원 중에 남자가 저밖에 없었어요. 처음에는 외로웠는데요. 지부장님이 “그렇게 생각하면 끝도 없다. 생각을 바꿔야 한다.”라고 하셨어요. 또 ‘부담스러운 일을 피하기만 하는 것은 마음을 꺾지 않는 고집’이라고 하신 말씀도 마음에 와닿았어요. 그때부터 현지인들과 섞이며 대화를 많이 나누려 했어요. 지금은 영어로 말하기가 편하고 자연스러워요. 문법에 맞든지 맞지 않든지 1년간 영어로 말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게 더 낫겠다.”며 조언해 주는 사람들의 말을 받아들이며 수정을 거듭해 만들어진 실력이지요. 

부모님 말씀을 듣고 피지에 갔던 게 여러모로 인생에 큰 도움이 되었네요. 

확실히 인생의 큰 터닝포인트가 되었어요. 지금은 제게 해외봉사를 권해주신 부모님께 정말 감사해요. 무엇보다도 제게 사는 데 필요한 마음가짐에 대해서 많이 가르쳐 주신 피지의 지부장님께도 감사드려요. 저는 다른 사람 말을 듣지 않고 뭐든지 혼자 알아서 결정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피지에서는 단체 생활이든지 행사 준비든지 무엇이든 지부장님께 먼저 묻고 점검받고 다른 단원들과 소통하는 과정을 통해서 일을 했어요. 저는 방송 장비 준비를 주로 맡았는데, 지적받는 사항들을 수용하고 다시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고민하며 수정을 반복했어요. 때론 제 마음을 피지 친구들에게 토로하며 속내를 표현하는 법도 배웠어요. 그렇게 해서 좋은 결과가 나올 때마다 ‘아, 내가 이렇게 사는 게 맞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멋진 사람이 되어 한국에 돌아오고 싶었다는 우진택 씨. 그러나 여전히 실수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스스로는 절대 완벽해질 수 없구나.’를 절실히 느꼈다. 주변에서 나를 잡아줄 사람의 필요성을 깨달으며, 지금은 자신에게 충고해 주는 사람들의 말에 더욱 귀기울이고 있다. 성장한다는 건 그렇게 조금씩 바뀌어가는 게 아닐까. 어떤 문제를 만나도 그것을 극복하면서 살면 약점은 더 이상 약점이 아닌 게 된다. 그는 앞으로도 혼자가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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