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봄은 예년의 봄과 다르다. 우리의 발목을 묶어두었던 코로나가 물러가고, 얼굴에서 마스크가 해제된 자유로운 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디든 떠나고 싶어 모두의 마음이 들썩거린다. 가장 먼저 봄꽃 축제가 열리는 남녘 땅 광양으로 목적지를 정한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잠시 피고 지는 꽃만 보기가 아쉬워, 인근의 문화 콘텐츠를 검색해 본다. 마침 도시 재생 사업으로 새롭게 탈바꿈한 ‘인서리공원’과 국제적 규모의 ‘전남도립미술관’, 광양역 폐창고를 개조한 ‘광양예술창고’가 핫플레이스로 올라온다. 광양 여행은 당일치기도 가능하지만, 시간 여유가 있다면 인서리공원 ‘홰경당’에 하룻밤 묵어 보자. 도다리쑥국에 벚굴도 먹고, 자전거로 섬진강길을 달려 보면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다.  

별도의 입장료가 없는 청매실농원은 매화 천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희고 연붉은 꽃물결 사이로 푸른 섬진강을 바라보노라면 절로 행복감이 밀려온다. (사진 광양시청) 

10만 그루 매화가 만개하는 광양 매화마을

새벽 기차를 타고 도착한 광양은 바람에 꽃향기가 나풀거리고, 4년 만에 열리는 매화축제를 찾아가는 꽃구경 인파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1997년부터 매년 3월에 개최해 온 매화축제의 발원지는 ‘홍쌍리청매실농원’이다. 백운산 자락이 섬진강과 만나는 능선을 따라 자리한 5만여 평의 농원에는 수십 년 된 매화나무 10만 그루가 오순도순 살고 있다. 섬진강과 마주한 산마다 매화나무가 지천이지만, 청매실농원만큼 꽃이 풍성한 곳은 없다. 

그런 청매실농원도 코로나 시기엔 ‘방문을 자제해달라’는 현수막을 걸어야 했고, 그 여파로 봄마다 이곳을 찾던 인파가 뚝 끊겨버렸다. 사람이 오지 않는다고 매화가 꽃망울까지 닫아버린 것은 아니다. 그 자리, 그 시기에 늘 매화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으며, 청매실은 3천여 개나 되는 커다란 항아리에 나뉘어 숙성되고 있었다. 

올해 81세의 홍쌍리 명인은 반세기 넘게 매화나무를 가꿔온 전문 농사꾼이다. 경남 밀양의 만석꾼집 딸이 전라도 광양의 벽촌으로 시집오지 않았더라면, 지금 우리가 반기고 누리는 매화축제는 없었을지 모른다. 

인생을 모두 매화나무에 쏟아부은 그였지만, 초창기엔 첩첩산중 가난한 삶이 힘들어 도망갈 궁리를 여러 번 했다. 그때마다 자식 같은 하얀 매화꽃이 눈에 밟혀 떠날 마음을 내려놓곤 했단다.

그는 시아버지가 심어둔 2천 그루의 매화 묘목을 기반으로 매실 농사를 시작했다. 매실을 거저 줘도 먹지 않던 시절에 매실의 효능에 대해 연구한 그는 국내 최초의 매실 명인으로 지정되었다. 

이런 시절을 거쳐 일궈진 홍쌍리청매실농원에 매화 구경을 가려면 아침 일찍 서둘러야 한다. 주말이나 한낮에는 관광객이 몰려 앞사람 머리끝만 볼 수도 있다. 구불구불 꽃길을 따라 오르락내리락 걷다 보면 숨도 차고 땀도 난다. 그럴 때엔 산 중턱 팔각정에 앉아 잠시 바람을 쐬면 된다. 무념무상으로 바라보고 있어도 행복감이 밀려오는 그곳은 매화 천국이니까. 

내려오는 길목에는 매실 제품 판매점이 있고, 그 좌우로 동네 아주머니들이 좌판을 펼쳐 향긋한 봄나물을 한바구니씩 팔고 있다. 무릉도원에서 갑자기 시골 장터로 바뀌는 분위기지만, 몇 년간 사람 구경이 귀했던 매화나무들에게는 소음 섞인 번잡스러움도 정겨울 듯하다. 

홍쌍리 명인이 먼저 매화나무를 심었고, 뒤늦게 매실의 경제적 가치를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이 함께 가꾸면서 생겨난 매화마을은 이제 우리나라의 봄을 대표하는 축제의 장소가 되었다. 매화꽃의 아름다움을 아낌없이 보여주는 관광명소가 되기까지, 백운산 자락엔 농부들의 묵묵한 수고와 진한 사랑이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주소 전남 광양시 광양읍 다압면 도사리 414
시간 연중무휴 (입장료 무료)

광양 매화축제의 출발점을 만든 홍쌍리 명인. (사진 청매실농원 홈페이지)
거둔 매실은 항아리에 담아 숙성시킨다. 3천 개의 항아리가 모여 있는 주변에 홍매화가 아름답게 피어 있다. (사진 조현주 기자)
거둔 매실은 항아리에 담아 숙성시킨다. 3천 개의 항아리가 모여 있는 주변에 홍매화가 아름답게 피어 있다. (사진 조현주 기자)
매화나무 아래 좌판을 펴고 봄나물을 팔고 있는 동네 아주머니들.  (사진 조현주 기자)
매화나무 아래 좌판을 펴고 봄나물을 팔고 있는 동네 아주머니들.  (사진 조현주 기자)

예향의 멋을 담은 복합문화공간, 전남도립미술관 & 광양예술창고

외벽 유리에 반사되는 햇빛이 더욱 돋보이는 이 건물은 2년 전 개관한 도립미술관이다. 넓은 잔디 마당에 들어서면 ‘자비에 베비앙’의 작품 ‘빨간 새’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작품을 많이 진열하려는 여타의 미술관들과 다르게, 여유를 두고 작품을 전시해서 더 몰입하여 감상할 수 있다.  

전남의 새로운 문화예술 거점이 되기 위해 이 지역의 작고한 작가들을 발굴해내고 있는데, 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고화흠 화백의 회고전이 3월 말까지 열렸다. 현재는 ‘시의 정원’을 기획, 전시 중이다. 전시를 본 뒤엔 1층에 있는 카페 ‘플랫폼 660’에 들러 차 한잔 하기를 권한다. 군더더기 없는 인테리어에 편안한 가구들이 놓여져 혼자 책을 읽거나 여럿이 대화를 나누기에 제격이다.   

도립미술관과 잔디밭을 사이에 두고 있는 광양예술창고 역시 가 볼 만한 복합문화공간이다. 광양역 폐창고의 옛 모습을 보존하려고 천장의 목재 트러스 구조를 그대로 살려둔 점이 특이하다. 미디어 영상실과 전시실, 카페와 다목적실  등 두 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주소 전남 광양시 광양읍 순광로 660 전남도립미술관 
시간 매일 10시-18시(월요일 휴관)

주소 전남 광양시 광양읍 순광로 664 광양예술창고 
시간 매일 10시-18시(월요일 휴관)

미술을 좋아하는 BTS RM이 방문해서 더 유명해진 전남도립미술관 외관. (사진 조현주 기자)
미술을 좋아하는 BTS RM이 방문해서 더 유명해진 전남도립미술관 외관. (사진 조현주 기자)
남도 문학에서 영감을 받았거나 남도 문인들과 협업한 동시대 작가들 가운데 안유리, 임홍순, 이매리, 리밍웨이 4명을 선정해 그 작품들을 ‘시의 정원’이라는 이름으로 지금 전시하고 있다. (사진 조현주 기자)
남도 문학에서 영감을 받았거나 남도 문인들과 협업한 동시대 작가들 가운데 안유리, 임홍순, 이매리, 리밍웨이 4명을 선정해 그 작품들을 ‘시의 정원’이라는 이름으로 지금 전시하고 있다. (사진 조현주 기자)
미술관 중앙에는 쇠구슬을 엮은 듯한, 장 미셀 오토니엘의 작품 ‘블랙 토네이도’가 전시되어 있다. (사진 조현주 기자)
미술관 중앙에는 쇠구슬을 엮은 듯한, 장 미셀 오토니엘의 작품 ‘블랙 토네이도’가 전시되어 있다. (사진 조현주 기자)

광양 원도심에 자리한 이색문화 지구, 인서리공원

새로 개발한 신도시로 사람들이 옮겨가면서 빈 집과 폐업한 가게들이 늘어나자, 광양시는 텅 빈 원도심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쇠락한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2016년부터 대대적인 도시재생 사업을 추진했고, 5년 가까운 리모델링 기간을 거쳐 지난해 12월에 첫선을 보인 곳이 인서리공원이다. 

혹시 ‘인서리공원’이라는 이름 때문에 푸른 숲과 벤치가 있는 공원을 기대할 수도 있을 텐데, 인서리는 광양읍성 서쪽에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고, 공원은 숫자 ‘01’을 한글과 영어로 각각 읽은 요즘 감각의 네이밍이라고 한다. 인서리공원은 낡고 오래된 건물과 주택 14채를 갤러리, 카페, 라이브러리, 숙소 등으로 멋지게 개조한 공간이다. 서울의 서촌이나 익선동과 분위기가 비슷해서 젊은이들이 특히 즐겨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런 이색적인 공간들이 곳곳에 늘어난다면 매화철에만 몰렸던 관광객들이 사계절 내내 찾아올 것이며, 광양은 여행지로서의 면모를 한껏 더 갖추게 될 것이다.  

인서리공원 입구. 마주보이는 회색 건물이 갤러리 ‘반창고’, 오른쪽 한옥이 아트숍 ‘아트앤에디션’인 동시에 이곳의 운영과 관리를 겸하는 사무실이다. 이곳의 역사나 전시품에 관해서 궁금한 점이 있다면 고은정 매니저에게 도움받을 수 있다. (사진 조현주 기자)
인서리공원 입구. 마주보이는 회색 건물이 갤러리 ‘반창고’, 오른쪽 한옥이 아트숍 ‘아트앤에디션’인 동시에 이곳의 운영과 관리를 겸하는 사무실이다. 이곳의 역사나 전시품에 관해서 궁금한 점이 있다면 고은정 매니저에게 도움받을 수 있다. (사진 조현주 기자)

인서리공원을 구경하기 위해, 우선 지정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길 건너편으로 간다. 거기에서 ‘아트앤에디션’이라는 아트숍을 둘러보고, 그 왼편에 양곡 창고를 개조한 갤러리 ‘반창고’로 발길을 옮긴다. 현재 반창고에서는 설치예술가 황란 작가의 ‘매화, 소멸하는 아름다움’ 전시가 열리고 있다. 뉴욕 페이스북 본사에 작품이 설치되어 화제를 일으켰던 작가로, 오는 5월까지 그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아트숍 뒤쪽엔 작은 차고를 개조한 갤러리 ‘01’이 있고, 공간 더 깊숙한 곳에 카페 ‘Aat’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디저트와 커피를 마시면서 잠시 에너지를 충전해도 좋다. 나오는 길에 별채 라이브러리에 들러 미술 서적과 잡지, 그림책도 구경하길 바란다.  

인서리공원은 크게 갤러리, 카페, 숙소 3영역으로 구성되는데, 숙소인 1백 년 된 한옥 ‘다경당’, 모던 한옥 ‘홰경당’, 근현대적 감성의 ‘예린의 집’에서 하룻밤 머물고 싶다면 예약이 필요하다.  

이곳의 주변 골목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새로운 공간이 계속 이어진다. 자주 눈에 띄는 한옥의 형태는 방과 마루, 부엌이 일렬인 ‘ㅡ’자형으로, 통풍을 중시하는 남부 지방의 전형적인 구조이다. 집집마다 마당과 텃밭을 두고, 나지막한 담장 위로는 붉은 동백꽃과 곧게 뻗은 종려나무가 드러나 더욱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낸다. 천천히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듯하다. 

일제 강점기 때의 한옥을 리모델링해서 만든 카페 ‘Aat’(At all times의 약자). 여기에서는 수제 양갱과 앙버터 모나카, 파운드케이크 등 각종 디저트를 중심으로 커피와 음료를 판매한다. (사진 조현주 기자)
일제 강점기 때의 한옥을 리모델링해서 만든 카페 ‘Aat’(At all times의 약자). 여기에서는 수제 양갱과 앙버터 모나카, 파운드케이크 등 각종 디저트를 중심으로 커피와 음료를 판매한다. (사진 조현주 기자)
옛 양곡 창고를 개조한 갤러리 ‘반창고’에서는 요즘 설치미술가 황란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사진 조현주 기자)
옛 양곡 창고를 개조한 갤러리 ‘반창고’에서는 요즘 설치미술가 황란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사진 조현주 기자)
별채로 마련된 라이브러리. 가느다란 목재 두 개를 합쳐 천장의 대들보를 만들었다. 굵은 목재가 귀했던 이 지역에서 예전에 집을 짓던 방식이라고 한다. 카페에서 주문한 음료를 이곳에 가지고 와서 마실 수도 있다. (사진 조현주 기자)
별채로 마련된 라이브러리. 가느다란 목재 두 개를 합쳐 천장의 대들보를 만들었다. 굵은 목재가 귀했던 이 지역에서 예전에 집을 짓던 방식이라고 한다. 카페에서 주문한 음료를 이곳에 가지고 와서 마실 수도 있다. (사진 조현주 기자)

도시 재생 사업으로 문화의 새 옷을 입고 되살아난 인서리공원은 현재, 바른손카드 50년 경험으로 아트프린트를 제작하는 ‘아트앤에디션’과 식음료 전문 기업 ‘두그루’가 함께 광양시로부터 위탁받아 운영되고 있다.

광양光陽은 이름처럼 빛이 많은 곳이다. 밝은 빛을 받고 살면 사람들 마음도 밝아지는가? 대문 기둥엔 한글 문패가 걸려 있는데, 부부와 자녀 이름까지 큼직이 적은 것들이 꽤 보인다. 개인 정보 유출이 민감한 시대에 괜찮으냐고 한 주민에게 물었다. 문패 때문에 사고가 생겼다는 말은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가볍게 하루 놀러왔다가, 눌러 앉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동네다.   

라이브러리 한쪽에 진열된 미술 관련 서적들과 여러 종류의 잡지들을 자유롭게 볼 수 있다. (사진 조현주 기자)
라이브러리 한쪽에 진열된 미술 관련 서적들과 여러 종류의 잡지들을 자유롭게 볼 수 있다. (사진 조현주 기자)
인서리공원 14채 건물 중 하나인 ‘갑빠오의 집’은 작가 고명진이 주택을 개조해 만든 아트 공간이다. 이곳에 꾸민 ‘탑이 쌓여 있는 방’은 반려묘에 대한 스토리를 담고 있다. 갑빠오의 집 주소는 광양읍 신재로 7-6이다. (사진 조현주 기자)
인서리공원 14채 건물 중 하나인 ‘갑빠오의 집’은 작가 고명진이 주택을 개조해 만든 아트 공간이다. 이곳에 꾸민 ‘탑이 쌓여 있는 방’은 반려묘에 대한 스토리를 담고 있다. 갑빠오의 집 주소는 광양읍 신재로 7-6이다. (사진 조현주 기자)
카페 뒤쪽에도 넓은 마당이 있는데, 여기엔 뉴욕 브라이언 파크의 시그널 퍼니처로 알려진 진초록 테이블과 철제 의자가 놓여 있다. (사진 조현주 기자)
카페 뒤쪽에도 넓은 마당이 있는데, 여기엔 뉴욕 브라이언 파크의 시그널 퍼니처로 알려진 진초록 테이블과 철제 의자가 놓여 있다. (사진 조현주 기자)
인서리공원 주변 주택가를 산책하다 보면 집집마다 한글 이름의 문패가 큼지막하게 걸려 있다. (사진 조현주 기자)
인서리공원 주변 주택가를 산책하다 보면 집집마다 한글 이름의 문패가 큼지막하게 걸려 있다. (사진 조현주 기자)
집 앞마당이나 자투리땅엔 텃밭을 가꿔 사람 사는 동네의 맛이 느껴진다. (사진 조현주 기자)
집 앞마당이나 자투리땅엔 텃밭을 가꿔 사람 사는 동네의 맛이 느껴진다. (사진 조현주 기자)
골목이 계속 이어지는 형태라서 천천히 걷다 보면 여러 풍경이 골목 안에 펼쳐진다. (사진 조현주 기자)
골목이 계속 이어지는 형태라서 천천히 걷다 보면 여러 풍경이 골목 안에 펼쳐진다. (사진 조현주 기자)
인서리공원 스테이 한옥 ‘다경당’은 안채와 별채가 있고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있는 멋진 집이다. (사진 조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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