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를 아시나요?”라고 질문하면, 대부분 “네, 알지요.”하면서 말끝에  ‘자기 귀를 자른 사람’, ‘정신병원에 있던 화가’라고 덧붙인다. 우리가 생각하는 고흐는 보통 사람들과 다른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 같지만, 그의 인생과 작품을 깊이 들여다보면 따뜻한 마음씨와 그림을 사랑한 뜨거운 열정이 숨어 있다. 

나에게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1)는 특별한 존재다. 고흐의 그림이 나를 다시 새롭게 도전하도록 발받침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2019년부터 연이은 두 번의 출산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점점 엄마의 역할에 한계를 느끼고 있을 즈음이었다. 나의 삶이 증발해버린 듯해서 우울한 마음에 빠져 있었을 때, 어떤 도서관에서 명화를 주제로 한 미술 수업을 요청해왔다. 나는 고민 끝에 수락을 했고, 수업을 들을 아이들에게 어떤 그림을 보여줄까? 생각하면서 4년 만에 미술책을 다시 펼쳤다. 그때 눈에 강렬하게 들어온 그림이 고흐의 ‘해바라기’였다. 내가 대학교에서 4년, 대학원 3년 과정 동안 꽃과 관련된 그림을 계속 그렸을 만큼, 꽃을 좋아했기에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에 더 끌렸는지도 모른다. 

이제 고흐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서양 미술사에서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지만, 그가 처음부터 화가의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다. 네덜란드 개혁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진지하고 생각이 깊은 아이였다고 한다. 미술에 대한 관심도 있어서 고흐는 당시 유명 화가가 미술교사로 있는 국립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잘 적응하지 못해 자퇴하고 만다. 이후 큰아버지가 소개해준 헤이그의 구필 화랑에서 일했고 얼마 뒤 런던에 있는 지점으로 발령이 났다. 그곳에서 열심히 일해 성과를 인정받은 그는 하숙집 딸에게 처음 사랑을 고백했다가 거절당한다. 이 일을 계기로 점점 종교에 몰입했고, 신학공부를 하기로 정한다. 그는 벨기에 탄광지대에서 무급 선교사로도 일했으나 결국 선교사의 길도 실패를 맛본다. 

그는 동생 테오의 도움을 받아 화가의 길을 걷기로 한다. 1880년 11월, 스물여덟 살 때였다. 고흐는 어느 학교나 화파에 소속되어 미술 배우는 것을 싫어했고, 혼자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동생의 권유에 못 이겨 브뤼셀 왕립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해 해부학, 소묘, 원근법을 배운다. 고향집 뉘넌에서 그림에만 몰두하던 고흐는 밀레의 전기를 읽다 영감을 받아 시골 풍경을 삽화로 그리기 시작했으며, 1885년 4월에 ‘감자를 먹는 사람들’을 완성한다. 이 작품은 그가 남긴 많은 작품 중에서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 

‘감자를 먹는 사람들’ 1885년, 캔버스에 유채,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감자를 먹는 사람들’ 1885년, 캔버스에 유채,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이듬해인 1886년에 고흐는 테오가 있는 프랑스 파리로 떠난다. 그곳에서 마네, 모네, 고갱, 쇠라, 피사로, 시냐크 등의 화가들과 어울리며 빛과 색채에 대해 공부를 한다. 그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물감의 색이나 붓 터치로 그림에 표현해 보려고 노력했다.

1888년 2월, 파리에서 2년 동안 200여 점의 그림을 그린 고흐는 요양을 위해 남부 지방인 아를Arles로 거주지를 옮겨간다. 그는 새로 이사 간 집을 ‘노란 집’이라고 명명했고, 파리에서 알고 지내던 화가 고갱을 그곳으로 초대한다. 이 시기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한 작품 ‘해바라기’가 탄생한다. 

해바라기 작품은 고흐가 고갱의 방을 꾸며주려고 그린 것이었다. 고갱은 빈센트 반 고흐를 ‘해바라기 화가’라고 불렀고, 고흐가 해바라기를 그리고 있는 모습을 고갱이 자신의 그림에 담기도 했다. 고갱이 자신의 해바라기 그림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안 고흐는 친구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는지, 12점의 해바라기 작품으로 고갱의 방을 꾸미려고 했다. 그러나 실제는 4점을 완성하였다. 나중에 아를을 떠난 고갱은, 노란 집에 남겨두고 온 자신의 습작들 대신에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을 보내달라고 할 정도로 그 그림을 좋아했다고 한다.

고갱을 위해 그린 그림인데, 이로 인해 고흐는 ‘해바라기의 화가’라는 별명이 생겼다. 누군가를 위해 그림을 그릴 때 어떤 마음이 들까? 나는 이 작품을 볼 때마다 괜히 설렌다. 어느 누구도 고흐만큼 해바라기를 잘 그릴 수 있을까 싶다. 화가들은 대개 작품을 그리면서 그 안에 자신의 생각과 철학을 담는다. 그리고 감상자들은 그림에서 화가의 의도를 읽어내거나, 화가의 마음을 알았을 때 큰 감동을 받는다. 고흐는 해바라기 그림을 그리면서 고갱을 기다리는 그리움과 앞으로 둘이 만나 함께 그림을 그릴 것에 대한 기대를 작품에 담았다. 그의 행복한 마음이 밝은 노란색부터 붉은 노란색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사용되었고, 붉은 색에 가까운 화려한 노란색과 꿈틀거리는 붓 터치로 꽃병과 배경까지 온통 노란색으로 표현했다. 

‘해바라기’, 1888년, 유채,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사진 위키아트
‘해바라기’, 1888년, 유채,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사진 위키아트

해바라기의 형태를 살펴보면, 활짝 핀 꽃송이도 있고 시들시들한 해바라기도 같이 꽂혀 있다. 아마도 아를까지 멀리 자신을 찾아오는 고갱에 대한 감사, 그리고 그를 만날 기대에 자신의 부푼 마음을 여러 모양의 해바라기에 담아 그린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이런 고흐의 일기로 보아, 고흐의 노란빛 기대는 잠시였고 둘 사이에 점점 금이 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노란 집에서 갈등이 많았던 것 같다. 고갱의 말에 의하면 저녁에 산책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고흐가 면도칼로 위협을 했고 불안한 마음에 노란 집으로 가지 않고 호텔로 갔다고 한다. 그날 고흐는 자신의 귓불을 잘라 매춘부에게 전해준 뒤, 노란 집에 돌아와 해바라기 그림이 걸린 고갱의 방에서 의식을 잃었다. 다음날 아침, 경찰이 고갱의 침대에서 피를 흘리고 누워 있는 고흐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겼다. 

이 과정을 다 지켜본 고갱은 동생 테오에게 전보를 친 뒤 아를의 노란 집을 떠난다. 고갱과 다툰 후 귓불을 자르고 그린 ‘붕대 감은 자화상’은 다른 자화상들과 다르다. 슬프고, 외롭고, 힘들어하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여러 점의 자화상 중에서 고흐는 이 작품에 가장 일그러지고 형편없는 얼굴로 자신을 표현했다. 친구를 잃은 슬픔과 그로 인한 절망감, 게다가 곧 동생 테오가 결혼한다는 소식까지 겹쳐 심란한 자신의 감정을 담았기 때문이 아닐까.

얼마 뒤, 고흐는 주민들로부터 미치광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탄원서에 의해 병원에 감금되다시피 했다. 그래도 그림에 대한 열정은 꺾이지 않았다. 1889년 5월, 자진해서 생레미 정신요양원에 입원한 고흐는 그곳에서도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이 시기에 브뤼셀에서 ‘20인전’이 시작되었고, 그때 고흐의 ‘붉은 포도밭’ 작품이 400프랑에 팔렸다. 이것이 고흐의 1500여 점의 유화 중 살아생전에 유일하게 팔린 작품이었다. 

‘붕대 감은 자화상’, 1889년, 코톨드 인스티튜트 갤러리 소장. 사진 위키아트
‘붕대 감은 자화상’, 1889년, 코톨드 인스티튜트 갤러리 소장. 사진 위키아트

그토록 자신의 작품이 팔리길 바랐던 고흐가 얼마나 설렜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빈센트 반 고흐는 현재 마지막 작품으로 추정되는 ‘나무뿌리들’을 다 그리지 못한 채 권총으로 자신의 가슴을 겨눠 세상을 떠났다.

늦은 나이에 그림을 시작하여 37세에 생을 일찍 마감했지만, 고흐는 동시대의 화가들 중 가장 많은 작품을 남겼다. 10년 동안 유화와 습작을 포함하여 2,000여 점의 그림을 그렸다니, 1년 동안에 약 200점의 작품을 그린 셈이다. 어느 화가가 1년에 200점씩 10년 동안 꾸준히 작업할 수 있을까? 나도 한때 작품 활동을 열심히 한 적이 있었는데 그래도 1년에 10점 정도밖에 그리지 못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처음엔 단순히 해바라기 그림에 매료되어 그의 작품을 좋아했지만, 고흐에 대해 공부를 하면 할수록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커진다. 그가 살았을 때 자신이 바라고 원했던 전성기를 맛보았으면 어땠을까?

‘붉은 포도밭’, 1888년, 캔버스에 유채, 러시아 모스크바 푸슈킨 미술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붉은 포도밭’, 1888년, 캔버스에 유채, 러시아 모스크바 푸슈킨 미술관 소장. 사진 위키아트

길지 않은 그의 인생은 여러 사건과 사고들로 얼룩져 있다. ‘하는 일마다 왜 안 될까?’라는 생각이 들 만큼, 그는 첫 직장 구필 화랑에서 쫓겨났고, 마음을 다해 헌신한 선교사의 길에서도 실패를 맛보았다. 그런데 그때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그의 곁에 있었다. 화랑에서 쫓겨났을 땐 목사인 아버지의 도움으로 선교사가 될 수 있었고, 선교사의 길에서 또 실패했을 때에는 동생 테오의 도움으로 화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 시작만 하면 모두 다 실패했지만, 그에게는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후로는 오로지 작품 속에 빠져 살았다. 자신의 작품에 혹평을 하는 사람과는 등을 돌렸고, 점점 자신의 의견과 그림에 호평을 하는 사람들과만 소통했다. 결국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해, 다른 사람들과 담을 쌓고 지냈다. 오로지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가 유일한 대화의 창구였다. 

만약 고흐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힘든 마음을 이야기하고 함께 이겨낼 수 있는 존재가 곁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자신의 생각만 고집하지 않고, 주변 사람과 교류하는 삶을 살았다면 또 어땠을까? 아마 살아서 전성기를 맛보지 않았을까? 그리고 고갱과도 서로 돈독한 사이가 되지 않았을까?

인생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그리고 어려움을 겪지 않는 사람은 없다. 크고 작은 어려움이 왔을 때 어떻게 이겨내느냐가 중요하다. 어떤 일에 빠져 지내다보면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 그때 멘토가 있다면, 힘들고 어려움이 오더라도 그 속에서 빠져나올 힘이 생긴다. 멘토가 나보다 성공했거나, 나이가 많은 선배나 어른이 아니더라도, 마음을 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가 가까이에 있다면 어떤 어려움이 오더라도 쓰러지지 않고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글쓴이 정유진 

충북대학교 미술과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 교육대학원에서 미술과 석사학위를 받았다. 다수의 단체전을 통해 작품 발표를 해왔으며, 길가온 갤러리에서 갤러리스트로 활동했다. 행복한미술심리센터에서 교육 프로그램을 연구했고, 현재 파랑새 인성교육원 대표로서 미술교육에 대해 계속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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