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 읽는 걸 좋아하고, 책을 사는 것은 더 좋아한다. 책이 유용하고 교양을 높여주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재밌어서 읽는 편이다. 읽다보니 내가 좋아하고 내게 익숙한 곳에서 다른 장르로 넘어가기도 한다. 나와 우주가 무슨 상관이 있겠냐마는 우주에 대한 책도 읽고, 이과적인 면이 ‘제로’인데도 반도체에 대한 책을 갑자기 사서 보기 시작한다. 

한국 시장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변변한 투자 한번 해본 적도 없으면서, 시장의 자유를 둘러싼 새뮤얼슨과 프리드먼 같은 경제학의 대가들이 하는 이야기도 들여다본다. 어쩌다 해외에 나가게 되면, 내가 갈 국가나 도시에 대한 책들을 미리 구해서 호기심을 키워가고, 반대로 아무 데도 가지 못해 갑갑함을 느끼면 여행 에세이들을 마구 사들이고 눈으로 집어삼켜서 직접 다녀온 것보다 더 실감을 느낀다. 

그림이라고는 자동차밖에 그리지 못하는 내가 그림의 역사와 변천에 관한 책을 읽고 마치 그동안 그림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던 것처럼 강의를 하고, 유명 음악인들에 대한 책이 나오면 그게 클래식이든, 뮤지컬이든, K-팝이든 어떤 생각으로 연주하고 노래하는지 궁금해서 읽어본다. 인터넷 서점 홈페이지에 신간 역사책이 있다면 그것은 고민할 여지도 없이 장바구니에 담는다. 요즘에는 챗GPT가 나와서 이것과 관련된 책과 인공지능에 대한 책을 겁도 없이 주문해서 보고 있으며, 대체불가능토큰이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 물체(물체 아님)를 알고 싶어서 NFT에 대한 책도 사무실 책상에 꽂아 두었다. 마음에 힘을 잃지 않기 위해서 마인드 관련 책이 나왔다고 하면 나오는 족족 거의 일등으로 사 본다.  

아내는, 같은 평수인데도 다른 집은 깔끔하고 정돈이 잘 되어 있는데, 우리 집은 아무리 치우고 정리해도 왠지 복잡하고 좁아 보인다며 그 원인이 뭔지 알았다고 한다. 물론, 나도 안다. 그래서 이사 때마다 책을 골라 버리거나, 박스 채로 인터넷 중고서점에 되판다(그 돈으로 또 새 책을 산다). 차마 버리기 어려운 것들은 사무실 회의실에 갖다 놓고.

문제는, 책을 나름대로 즐겨보지만, 나는 읽은 책에 대하여 기억을 잘 못한다. 저자, 제목, 등장인물, 심지어 줄거리조차 기억나지 않는 책이 너무나 많다. 형편없는 기억력 때문에 나는 같은 책을 또 살 때도 있다. 다행히 노트나 어플에 메모를 남겨둔 책들은 그 메모를 들추며 기억을 살려낼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책들은 내가 읽었다는 기억에서조차 남아 있지 않아, 서점에서 그 책을 보고 처음 보는 것처럼 희색을 띠며 손에 쥐고 계산대로 가지고 간다. 그러다보니 내가 책을 많이 읽은 것 같은데, 어떤 책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자고 하면 내용을 다 까먹어서 할 말이 별로 없다. 그래서 독서토론 같은 데에는 가지 않는다.

책을 읽어놓고도 내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면, 그것이 다 증발되었다는 말인가? 기록으로 남겨둔 메모를 빼면 도대체 내가 읽은 것은 처음부터 읽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일까? 그런데도 왜 나는 계속 책을 보며, 또 사고 있을까? 이 정도면 책을 읽는 것에 대해서 의심이나 회의를 품어야 할 텐데, 나는 책 읽는 것, 더 나아가서 책 사는 것을 멈출 생각이 없다. 이유가 있다. 나의 기억에 내용은 별로 남아 있지 않지만, 책을 읽는 동안 나의 머리와 가슴이 새로운 색깔과 모양으로 변해가는 것을 매번 느끼기 때문이다. 

비가 내리면 밭에 빗물이 고여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땅속에 스며들며 그 땅을 부드럽게 만들어 주듯이, 책은 나에게 있어서 겉으로 볼 수 있는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내 속의 생각과 마음을 고쳐주고 지나간다. 시간이 지나면 지식과 감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는 대신, 책은 나로 하여금 작가가 말하고 느낀 것을 같이 공감하고, 같은 관점 또는 다른 관점에서 삶과 사물을 보게 한다. 마치 내가 앞에 서 있으면 아내가 “당신 자세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어요. 좀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하듯이(이젠 포기했다), 책은 나에게 시선과 자세를 바꾸어주고 그 역할을 다하면 미련을 남기지 않고 다음 책에 나를 맡기고 떠나간다. 책이 나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고, 이런 시간이 없다면, 나는 힘들어서 삶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 

세월이 지나 우리는 또다시 봄을 맞았다. 따뜻한 기운을 받아 피어나는 꽃을 보는 것도 좋겠지만, 이미 내 옆에 피어 있는 꽃을 발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우리를 더 풍요롭게 만든다. 책은 인생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을 바꿀 수 있고, 눈이 바뀌면 모든 것을 전과 다르게 볼 수 있다. 투머로우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글 박문택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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