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진 권시온, 르완다에서 소망을 심는 부부

동부 아프리카에는 우리나라 경상도 크기만 한 작은 나라 ‘르완다’가 있다. 매해 4월은 르완다 사람들에게 고통스런 달이다. 1994년 4월에 일어났던 인종 학살은 1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눈앞에서 가족을 잃은 아이들은 정신적 트라우마를 가진 채 어른이 되었고, 남편 혹은 아내를, 아이를 잃었던 어른들은 슬픔을 가슴에 묻고 30여 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들의 눈물이 마르는 날을 고대하며 르완다 정부와 세계 각국의 NGO들이 도움의 손길을 뻗고 있다. 

그중에는, 이 일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한국인도 있다. 바로 르완다 굿뉴스코 지부장이자, 선교사인 고봉진 씨와 그의 아내 권시온 씨다. 과거 학살로 과부가 된 여성들을 위해 르완다 영부인이 설립한 단체 ‘아베가 아가호조’와 함께 이들 부부는 여성들을 위한 활동뿐 아니라, 청소년 단체와 대학교와 협력해 다양한 활동을 지속해오고 있다.

그들이 르완다에 처음 간 것은 14년 전이다. 현지인들은 외국인인 두 사람을 늘 상냥하게 대해주었지만, 마음은 좀체 열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가깝게 지냈던 이웃에게, 친구에게 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했기에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선 큰 결심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을 진심으로 위하려는 두 사람의 따스한 마음은 굳게 닫혔던 불신의 벽을 허물었다. 그리고 그곳에 두 사람은 소망의 씨앗을, 행복의 씨앗을 심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고봉진, 권시온 부부. 두 사람의 미소를 붕어빵 같이 닮은 세 자녀가 있다.
고봉진, 권시온 부부. 두 사람의 미소를 붕어빵 같이 닮은 세 자녀가 있다.

헨리 선생님

두 사람이 르완다에서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 중 하나는 ‘지식 교육’이다. 배움을 원하는 이들에게 영어, 한국어 등의 외국어를 가르치고 컴퓨터 및 ICT(정보통신기술)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이 ICT 교육의 총책임을 맡은 사람이 현지인 ‘헨리’ 씨다. 

“헨리가 정말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요. 앞으로 청소년부와 협력해서 교육 프로젝트 규모를 넓히려 하는데, 그 일을 맡을 청년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 헨리가 10대 소년이었는데, 벌써 30대 어른이 되었네요. 밝게 잘 자라줘서 대견하고, 또 고마워요.(고봉진)” 그는 14년 전, 헨리 씨를 처음 만나던 날이 꼭 어제 같다고 했다. 

인종 학살이 일어나던 해, 헨리 씨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 후투족은 그의 부모님과 누나가 갇힌 성당에 불을 질렀고, 홀로 남겨진 그는 보육원과 먼 친척 집을 전전하며 자라야 했다. 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 없었다. 고봉진 선교사가 헨리 씨를 만났을 때 그는 친구 집에 살며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고생하고 있었다. 특히, 비 오는 날이면 가족을 잃었던 그날의 트라우마로 괴로워했다. 하루는 말없이 사라진 그를 찾아다닌 적이 있었는데, 헨리 자신도 기억을 잃은 채 알 수 없는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은 헨리 씨에게 함께 살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그들은 또 다른 이름의 ‘가족’으로 살아왔다. 

함께 살며, 두 사람은 헨리 씨에게 늘 소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선교사로서 헨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고, 함께 기도하며 학교에 다시 다닐 방도를 알아보았다. 

“헨리에게 거기가 네 인생의 끝이 아니라 얼마든지 다른 미래를 꿈꿀 수 있고, 다르게 살 수 있다는 마음을 주고 싶었어요. 그때, 감사하게도 한국의 한 봉사단체로부터 지원받을 기회를 얻었고, 직업학교에 들어가 기술을 배우며 학업을 마칠 수 있었어요.(권시온)” 

무엇보다 헨리 씨의 가슴을 짓눌렀던 건 ‘이 세상에 나와 함께할 사람이 없다.’라는 절망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성경 말씀이 그의 마음을 울렸고, 가족이 되어 그를 이끌어주는 두 부부의 지원을 받으며 꿈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매 주말, 수많은 사람이 헨리를 ‘선생님’이라 부른다. 옛날에는 정비사가 되어 돈을 벌어보고 싶다던 그였지만, 이젠 자신처럼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알려 주는 일을 오래오래 하는 것이 꿈이 되었다. 

르완다가 변하고 있다

헨리 씨처럼, 대부분의 르완다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 같지만 각자 마음 깊숙한 곳에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간다. 두 사람은 인종 학살을 겪은 후 슬픔과 절망 속에 살아가거나 후투족을 향한 복수심과 미움, 증오를 품고 살아가는 이들을 수없이 만났다. 4월이 되면 한 달간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고, 자신의 꿈은 군인이 되어 원수를 갚는 것이라고 하던 여학생도 있었다. 

“르완다 사람이든, 한국 사람이든 모두 기쁘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지요. 그런데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만날 때나 슬픔의 크기가 너무 커서 우리 마음을 부수고 들어와 버릴 때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아요.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원하지 않았던 슬픔, 절망, 깊은 원망을 마음에 심게 됩니다. 저희가 이곳에서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만나 대화도 하고, 때론 많은 사람을 초대해 ‘어떻게 불행에서 나와 행복해질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 강연하는데요. 이를 통해 자신도 모르게 심었던 씨앗이 무엇이었는지 돌아보고, 우리 마음에 심어야 할 좋은 씨앗은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고 싶었어요.(고봉진)” 

그들은 르완다뿐만 아니라 종종 한국에 올 때도 이런 주제의 강연을 했다. 많은 사람이 행복해지고 싶어 찾아오지만, 모두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변화를 깊이 원하면서도, 한편으론 익숙하지 않은 낯선 길을 가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신기한 건, 르완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기술이든, 지식이든, 마음의 세계든 새로운 것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흡수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어요. 저희와 대화를 하다가 ‘이 사람들이 정말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이구나. 좀 어색하지만, 들어보자.’ 하고 저희 마음을 느낄 때가 있는데요. 그러면 그때, 살면서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자신의 아픔을 털어놓고, ‘내 삶도 새로워질 수 있구나.’라는 희망의 씨앗을 심기 시작하면서 트라우마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걸 봤어요. 복수만 생각하던 아이가 더 많은 사람을 살리는 일을 꿈꾸기 시작하고요. 누구나 처음 용기를 내는 것은 어렵지만, 돕는 사람이 함께해서 새로운 씨앗을 한 번 두 번 심어보면 분명 삶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권시온)” 

르완다는 아프리카에서는 보기 드물게 연 7~10%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빠른 성장세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의료 보험 제도를 도입해 각종 질병이나 폐렴, 말라리아, 영양실조 등이 획기적으로 줄었다. 교육 정책 또한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데, 마음의 세계를 배우는 교육 또한 적극적으로 도입 중이라고 한다. 그들은 ‘르완다는 오늘도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며 활짝 웃었다. 

이 나라를 사랑하는 이유 

문득 이국만리에서 살아가는 두 사람의 삶을 떠올렸다. 르완다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헌신적인 삶이 대단하다고 말하니 이들은 손사래를 치며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단 한 번도 아프리카에서 살 거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다.’라고 말이다.

“남을 위해 사는 것이 행복하다는 말은 많이 들어봤죠. 그런데 그게 뭔지도 잘 몰랐던 것 같아요. 저는 오히려 남이 나를 위해주길 바라는 사람이고요.(하하) 그런데 대학생 때 우연히 파라과이로 해외 봉사를 떠난 적이 있었어요. 저는 봉사하러 갔지만 오히려 그곳 사람들에게 받은 사랑이 훨씬 컸어요. 그때 처음으로 느꼈어요. 내가 받은 것이 너무 많아서 주는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을 수 있다는 걸요. 저희 남편을 만나 아프리카에 올 때도 그 생각뿐이었던 것 같아요.(권시온)” 

“저는 20대 중반까지 직장을 다니는 회사원이었어요. 그 시절, 전 끝없이 이어진 어두운 터널을 걷는 사람처럼 살았어요. 삶에 대한 짙은 허무함과 현실의 좌절에서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직장을 그만두고 늦깎이 해외봉사자로 아프리카를 다녀오면서 나도 얼마든지 어두운 터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러고 눈을 떠보니, 르완다에 제가 와 있더군요.(고봉진)”

땅에 씨앗이 심겨 잎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면 그곳에서 또 다른 씨앗을 얻게 된다. 마음이 무엇으로 만들어져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연의 섭리와 똑 닮아 있다. 그들이 르완다 사람들에게 ‘일어날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건 그들 또한, 새로운 마음을 심고 새롭게 살아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10년 넘게 르완다 사람들과 함께 살며 그들이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고 했다. 마음이 연결되려면 내 마음을 먼저 다 줘야 한다는 것. “당장 그 사람이 나의 말을 들어주든 들어주지 않든, 그 결과와 상관없이 내 마음을 온전히 줄 때 저도 행복해요. 저희가 뿌리는 씨앗이 언제 움틀지 그건 알 수 없지만, 그들에게 계속해서 소망을 전하는 것이 저희 일이고 행복입니다.(권시온)” 

그는 르완다 사람들과 가까워질수록 하고 싶은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했다. “거울을 보지 않으면, 제가 외국인이라는 걸 잊어버릴 때가 있어요. 겉으로 보면 피부색이 다르지만, 마음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서로의 배경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더라고요. 마음에서부터 피어나는 웃음이 있죠? 르완다 사람들이 그렇게 웃는 모습을 보면 너무 행복해요. 그러니 이 일을 그만할 수가 있겠어요?(웃음)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이 사람이 이 부분을 조금만 더 알면 정말 좋을 텐데, 이런 기회가 있으면 진짜 달라질 텐데’ 하면서 그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꿈꾸게 돼요. 학교도 하고 싶고, 상담 센터도 열고 싶고….(권시온)”

올해도 르완다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프로젝트가 많다. 특히, 르완다 봉사 센터 건축이 곧 시작될 예정이다. “유치원 아이들부터, 초등학생, 청소년, 청년, 부인, 실버들까지 르완다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고민하고, 진행해보려 합니다. 올해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될까요?(고봉진)” 

두 사람은 언젠가 꼭 르완다에 오라고 했다. 이곳에서 사람들을 마음으로 만나는 기쁨을 느껴보라고 했다. 길거리를 지나다 연초록빛 새싹이나 피어난 들꽃을 보면 괜히 기분이 좋아질 때가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에 피어나는 꽃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생각했다. 행복한 두 사람을 보며 이런 질문을 남겨본다. ‘우리 마음에는 어떤 싹이 자라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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