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 마지막 황제와 강뉴부대

지난 10월 중순에 이스라엘로 가는데 직항 노선이 없었다.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공항에서 무려 17시간을 기다렸다가 환승을 해야 했다. 마침 그 나라에 사는 지인이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잠깐일지라도 아디스아바바 시내 구경도 하고 유명한 에티오피아 커피도 한 잔 하라고 해서 공항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는 한국인이라면 아디스아바바에서 꼭 보고 가야 할 곳이 있다며 나를 먼저 거기로 안내했다. 그곳은 에티오피아의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탑이었다. 나는 그 기념탑 앞에서 눈물 나게 고맙고, 너무 미안해서 가슴이 먹먹해지는 강뉴부대원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1892~1975)의 재위기간은 1930년부터 1974년이다. 에티오피아 역사상 최초로 성문헌법을 제정하고 노예제도를 폐지했다. 황제는 1963년에 설립된 아프리카통일기구(OAU) 초대 의장을 역임했고, 이스라엘과 군사적 협력 관계를 맺는 등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추진했다. 1968년에는 우리나라를 공식 방문해 한국참전 기념탑 제막식에 참석했고 두 나라의 우의를 다시 한번 다짐했다. 하지만 에티오피아에 공산 정부가 들어서면서 1975년 3월에 황제 제도가 폐지되었고, 이로써 에티오피아의 솔로몬 왕가는 종언을 고하였다. 사진@위키피디아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1892~1975)의 재위기간은 1930년부터 1974년이다. 에티오피아 역사상 최초로 성문헌법을 제정하고 노예제도를 폐지했다. 황제는 1963년에 설립된 아프리카통일기구(OAU) 초대 의장을 역임했고, 이스라엘과 군사적 협력 관계를 맺는 등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추진했다. 1968년에는 우리나라를 공식 방문해 한국참전 기념탑 제막식에 참석했고 두 나라의 우의를 다시 한번 다짐했다. 하지만 에티오피아에 공산 정부가 들어서면서 1975년 3월에 황제 제도가 폐지되었고, 이로써 에티오피아의 솔로몬 왕가는 종언을 고하였다. 사진@위키피디아

주변의 어려움을 살피는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1950년 우리나라에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에티오피아의 마지막 황제였던 하일레 셀라시에Haile Selassie 황제는 그 당시 무척 가난하고 약소한 나라 한국을 돕겠다고 결정했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기억력이 매우 뛰어나 말년에 이르러서도 중요한 사항은 모두 암기를 했다는 셀라시에 황제는, 주변의 어려움을 잘 살피는 따스한 마음을 지녀 국민들로부터 존경 받는 지도자였다. ‘셀라시에’라는 이름은 ‘삼위일체의 힘’을 뜻한다고 한다.

UN으로부터 파병 요청을 받은 셀라시에 황제는 북한 공산정권의 무력 침략 앞에 바람 앞의 등불 같았던 한국인의 자유와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황실 근위대 1200명을 포함해 3518명이나 되는 최정예 병사들을 파병하기로 했다. 황제가 이렇게 결정한 이유는 에티오피아도 침략 전쟁으로 쓰라린 역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1935년 10월, 무솔리니가 이끄는 이탈리아군이 에티오피아를 침공해 이듬해 5월에 나라가 송두리째 점령당하고 말았다. 셀라시에 황제는 1936년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총회에 참석해 국제적인 도움을 호소했으나, 어느 나라도 선뜻 돕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기세등등한 무솔리니는 제네바 협정에서 금지한 독가스까지 사용해가며 에티오피아 국민 중 27만 명을 무참하게 죽였다. 나라를 빼앗긴 셀라시에 황제는 영국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고, 5년간 나라 밖에서 지내며 잃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다. 1941년 영국군의 도움을 받은 에티오피아는 마침내 이탈리아 군대를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다.

한국으로 가는 군인들에게 지어준 부대 이름 ‘강뉴’

나라를 빼앗겨 본 경험이 있는 셀라시에 황제는 내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인들을 한국에 파병하면서 “부당하게 침략당한 나라가 있다면 반드시 도와야 한다. 저 먼 곳에 있는 한국인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목숨 바쳐 싸워라.”라며 ‘강뉴부대’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강뉴’는 에티오피아 언어인 암하라어로 ‘혼돈에서 질서를 확립하다’ 또는 ‘초전박살初戰撲殺’이라는 뜻이다. 공산정권의 침략을 격퇴시키고 혼돈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하라는 황제의 간절함을 담은 이름이었다. 황제는 한국에 산이 많다는 점을 알고 파병 전에 에티오피아 정예병들을 고지로 보내 영국군 교관으로부터 산악지대에서 매복, 순찰하는 훈련을 받게 했다.

강뉴부대원들은 미 군함을 타고 머나먼 극동 아시아까지 오면서도 “한국은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 영웅들이 가고 있답니다.”라는 노래를 힘차게 불렀다고 한다. 1951년 7월, 한국 땅을 밟은 강뉴부대는 미군 7사단 32연대에 배속돼 그해 9월 강원도 화천 적근산 전투를 시작으로 연전연승하여 253전 253승이라는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부대가 위험에 처하면 장교와 부사관들이 가장 먼저 적진으로 돌진해 포위망을 뚫고 싸운 이들은 이듬해 10월 ‘철의 삼각지’ 공방전에서 고지를 단 한 차례도 내주지 않았다. 

1953년 7월 종전 때까지 에티오피아는 연인원 3518명(1956년까지 주둔한 기간을 포함하면 6037명)이 참전해 122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부상했으나, 포로가 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6.25 참전국 중 적은 병력으로 가장 눈부신 전과를 올린 부대가 바로 에티오피아군이었다. 이들은 전우의 시신들도 모두 수습해 돌아갔기에 우리나라 UN군 묘지에 에티오피아 병사의 무덤은 하나도 없다.

2012년 1월 20일주영재, [한국의 파워라이터] 강신주, 경향신문, 2012년 1월 20일 사진@위키피디아박근혜 전 대통령이 재임 기간인 2016년 아프리카 순방 길에 올라 에티오피아를 국빈 방문했다. 그때 아디스아바바 한국전 참전 기념공원에서 열린 제65주년 한국전 참전 기념식에 참석해 강뉴부대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헌화를 하고 묵념했다. 군복차림으로 경례하고 있는 참전용사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정책브리핑
2012년 1월 20일주영재, [한국의 파워라이터] 강신주, 경향신문, 2012년 1월 20일 사진@위키피디아박근혜 전 대통령이 재임 기간인 2016년 아프리카 순방 길에 올라 에티오피아를 국빈 방문했다. 그때 아디스아바바 한국전 참전 기념공원에서 열린 제65주년 한국전 참전 기념식에 참석해 강뉴부대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헌화를 하고 묵념했다. 군복차림으로 경례하고 있는 참전용사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정책브리핑

이길 때까지 싸워라, 아니면 죽을 때까지 싸워라

강뉴부대가 그렇게 용감하게 싸우고 놀라운 승리를 거둔 것은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마음이 병사들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출정식에서 장병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갈지어다! 가서 침략군을 격파하고, 한반도에 평화와 질서를 확립하고 돌아오라. 이길 때까지 싸워라. 그게 불가능하다면 죽을 때까지 싸워라. 그대들의 죽음의 대가로 저들에게 ‘자유’라는 것을 저들의 손에 꼭 안겨주어라! 우리 민족이 과거에 이탈리아인들에게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 짐이 말하지 않아도 그 고통을 뼛속까지 알고 있을 것이다.”

에티오피아 장병들이 무패無敗의 신화를 만들어낸 배경에는 이기든지 죽든지 목숨을 다해 싸우라는 황제의 특명 때문이었다. 휴전 후에도 강뉴부대는 1956년까지 우리나라에 주둔하며 UN연합군으로서 비무장지대 순찰 작전 등 평화를 지키는 일과 전후 복구를 도왔다. 또한 받는 월급을 고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내지 않고 그 돈을 모아서 불쌍한 전쟁고아들을 위해 1953년 경기도 동두천에 ‘보화보육원’이란 고아원을 만들어 전쟁고아들을 따뜻하게 보살펴 주었다. ‘보화Bowha’는 암하라어로 ‘하나님의 은혜’를 뜻한다.

전쟁영웅에서 배신자로 몰린 강뉴부대원들

한국을 위해 피와 땀을 바친 강뉴부대원들이 모두 귀국하고 얼마 후 에티오피아에는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었다. 목축업을 하는 나라에 풀이 없어지자 가축들은 굶어 죽고, 아프리카 최강국이었던 에티오피아는 가난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 심각한 빈곤 속에 물가는 치솟고 고위층의 부정부패까지 겹쳐 쿠데타가 발발했다. 마침내 1974년에 공산주의자들이 집권하면서 셀라시에 황제는 폐위되었다. 

전쟁영웅으로 칭송받던 강뉴부대의 참전용사들도 동맹국인 공산국과 싸운 배신자로 몰려 직장에서 쫓겨나고, 감옥에 갇히거나 재산을 몰수당하는 등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그러면서 대부분의 강뉴부대원들은 6.25 참전 사실을 숨기고 뿔뿔이 흩어져 처참한 가난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1991년에 에티오피아의 공산독재정권이 붕괴되고 친서방 정권이 들어섰으나 내전의 후유증과 경제정책 실패로 참전용사들의 삶은 계속 어려웠다. 우리를 안내해준 지인이 말하기를, 현재 생존해 있는 참전용사들은 모두 90세 전후라고 한다. 나이들어 말도 어눌하고 귀도 잘 안 들리는 경우가 많지만, 그분들이 아직까지도 6.25 참전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 강원도에서는 1968년 춘천 공지천에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을 기리는 기념탑을 세웠고 2004년에는 춘천시와 아디스아바바 간에 자매결연을 가졌다. 2006년엔 한국 보훈처와 춘천시가 에티오피아에 참전 기념탑을 건립했는데, 나는 그 기념탑 앞에서 강뉴부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나라 보훈처와 춘천시가 2006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함께 건립한 한국전 참전 기념탑 공원. 사진@필자 제공
우리나라 보훈처와 춘천시가 2006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함께 건립한 한국전 참전 기념탑 공원. 사진@필자 제공

잊지 말아야 할 강뉴부대의 희생

지금 우리나라는 눈부신 경제발전으로 전 세계에 어느 나라 못지않게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면서 엉뚱한 데에 원조를 해주고 잘못 쓰는 돈도 많은데, 에티오피아처럼 고마운 나라에 조금이라도 은혜를 갚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꽃다운 3518명 젊은이들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6.25 전쟁에 보내준 나라가 에티오피아였다. 당시 참전국은 22개국으로, 의료지원 6개국을 제외한 전투지원 16개국은 대부분 소련의 위협을 피하고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만은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겠다는 순수한 일념 하나로 전쟁에 참전하였다. 자국이 경험했던 전쟁의 아픈 상처를 다른 나라가 겪지 않도록 희생을 자처한 것이었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강뉴부대원들!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는 그분들의 희생 위에 있다. 그러나 현대사에서, 우리 기억 속에서, 그분들이 잊혀져가고 있다는 현실에 못내 가슴이 아려온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한다. 에티오피아 강뉴부대의 은혜를. 

글쓴이 이한규
어릴때 선생님을 통해 교사의 꿈을 갖게 된 그는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선생님이 되었다. 교사의 길을 걸어온 자신을 일컬어 ‘마음 밭에 농사를 짓는 농사꾼’이라고 한다. 국어교사와 여러 대안학교 교장을 역임했고, 전국대안학교총연합회 서울시 지부장을 맡았다. 현재 여러 매체에 인문학과 교육철학에 관한 글을 계속 기고하고 있다. 국내외 여러 교육기관에서 특강을 하고, 교육 관계자 및 학부모, 학생들과 상담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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