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추구하는 새로움

까치가 둥지를 짓는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시골 까치는 나뭇가지 사이에, 서울 까치는 전신주 위에 짓는 장소만 다를 뿐, 어떤 까치도 둥지를 복층으로 짓거나 네모진 형태로 만들 생각은 하지 않는다. 사자나 곰도 마찬가지다. 사냥한 먹이를 늘 같은 방식으로 먹는다. 이번에는 색다르게 양념구이를 해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동물의 생존 방식은 오래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인간은 어떤가? 동일성을 유지, 계승해온 동물과 다르게 우리 인간은 늘 새로움을 추구한다. 똑같은 것의 반복을 지루해하며 새로운 발상을 참신하게 여긴다. 끊임없이 변화를 꾀하는 인간은 새로움에 왜 그토록 열광할까?

새해 첫날을 앞둔 시점에서, 새로움을 향한 사람들의 갈증은 더욱 커져서 새로운 계획, 새로운 결심, 새로운 목표 세우기에 온 정신을 쏟는다. 어떻게 하면 더 건강해지고 더 많이 저축하고 더 열심히 일해 이전보다 새로워질 수 있을까? 그런 고민 속에 많은 사람들이 새해 첫날을 새로운 나를 위한 새로운 길의 출발점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새로운 계획을 꾸준히 지켜가기란 쉽지 않다. 피곤하거나 바빠지거나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면 밑줄 두 번 긋고 다짐한 새해 결심을 초개와 같이 버린다. 미국 노스이스턴 대학 심리학과 데이비드 디스테노 교수의 말에 따르면, 1월 1일의 결심이 1주일 지난 1월 8일에 되면 이미 25%가 무너지고, 연말 즈음에는 10% 정도의 결심만 지켜진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실행에 약한 인간의 본성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중국 은나라 탕왕湯王은 새로움을 지속하기 위해 기원 전 1600년 경에 나름의 방법을 고안해냈다. ‘구일신 일일신 우일신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이라는 문구를 대야에 새겨 넣고, 세수할 때마다 이를 보며 자신을 스스로 경계한 것이다. 하루가 진실로 새로웠다면 매일매일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는 뜻인데, 날마다 새로우려면 오늘에 만족하지 않고 늘 새로운 마음가짐과 자세로 꾸준히 실천해야 한다. 탕왕이 세숫대야에 새긴 문구를 매일 보며 되새겼다는 사실로 볼 때, 새로워지려는 열망에 비해 인간이 새로움을 지속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겠다 싶다.

실제 어떤 일을 계획한 지 얼마 못 가서 흐지부지 중도 포기할 때 우리는 작심삼일이라고 한다. 마음먹은 것을 오래 지키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세로토닌 호르몬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어떤 일을 새롭게 시작하면 뇌에서 세로토닌을 분비시켜 스트레스를 줄여주는데, 세로토닌은 72시간가량만 분비된다. 이후에는 세로토닌 호르몬 없이 인간의 굳센 의지로 목표를 끌고 가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떤 일을 새롭게 결심했다가도 며칠 뒤엔 열정이 사라지면서 그만두는 것이다.

솔로몬이 경험한 새로움의 세계

그럼에도 평생 새로움을 추구했던 인물로 솔로몬왕을 빼놓을 수 없다. ‘지혜로운 자’의 대명사인 그는 탕왕보다 700년 뒤인 기원 전 970년에 이스라엘 왕이 되었다. 그의 여러 책들 중에서《전도서》는 깊은 인생 교훈과 창조주를 경외하는 삶의 중요성에 대해 쓰고 있다. 책의 서두에서 솔로몬왕은 ‘사람이 수고하는 것이 헛되고 헛되다.’라고 밝히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자신이 많은 일들을 해보았으나 결국엔 만족스럽지 못했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솔로몬왕은 이런 사실들을 발견한다.

첫째, 인간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 그는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실행하고, 거기서 기쁨과 즐거움을 얻었다. 그러나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이전 시대 사람들이 이미 했던 일이며, 이후 사람들도 같은 일을 반복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대가 흐르면서 문물이 발달하면 모든 것이 새로워 보이나,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은 변하지 않는다. 잘 지은 집, 넓은 땅, 호의호식과 화려한 생활을 추구하고 방탕함과 게으름을 즐긴다. 시대와 공간에 개의치 않고, 사람들은 이런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열띤 공부와 노동을 하고, 때로는 분쟁을 일삼거나 악행을 도모하기도 한다. 지구 위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살다가 죽는 일을 반복해 왔고, 그들이 추구한 인생은 모두 거기서 거기였다. 그래서 솔로몬왕은 “해 아래 새 것은 없나니”라는 말로 새로움의 탐닉에 결국 종지부를 찍었다.

둘째로 그가 발견한 것은, 새로운 시도의 끝이 허무하다는 사실이었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지혜와 부를 양손에 쥔 솔로몬왕은 누구보다 많은 일을 하고 많은 것을 소유했다. 그는 보배를 쌓아두고,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고 각종 나무를 심어 자신의 눈과 마음이 원하는 일들을 다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죽음과 함께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 앞에서 자신이 한 일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았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솔로몬왕은 가진 것이 풍요로운 세계 말고, 보이지는 않아도 마음이 충만해지는 세계로 눈을 돌린다. 그는 책의 결론 부분에서 창조주를 경외하는 것이 진정한 기쁨이며 사람의 본분임을 강조하면서, 이 진리를 꼭 기억하라고 당부한다.

마음이 만족하는 새로움을 찾아서

솔로몬왕의 말대로, 마음이 충만해지는 세계로 눈을 돌리면 우리 인간이 새로워질 수 있는가?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우리가 이타적인 삶을 살 수 있는가?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나 아닌 누군가를 위하여 양보하고 희생하는 새로운 삶이 가능한가? 이런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일류 직장, 멋진 차, 근사한 집을 가졌을 때 우리가 느끼는 새로움도 좋은 것이다. 문제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인간은 거기에서 멈춰 서지 못한다는 점이다. 내게 기쁨을 준 대상은 변함없이 그대로인데, 그 대상을 바라보는 나는 항상 같지 않다. 바람 부는 하늘의 구름처럼, 순간순간 달라지는 내 욕구를 제어하기 어렵다. 그런 나를 그대로 둔 채 욕구를 채워줄 대상만 바꾼다는 것은 별 효과가 없다. 새로움은 새 물건이나 새로운 상대의 등장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마음이 새로워져야 하고, 마음부터 변화되어야 한다. 진정한 새로움은 내면의 새로움이며, 인식의 변화에서 시작된다. 보는 눈이 달라지면 삶도 새롭게 변화한다.

최근 종방한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재벌 총수가 손자에게 이런 말을 한다. ‘사람에겐 오장육부가 있는데 나한테는 심보가 세 개나 더 있다. 돈 많이 벌어서 성공하려는 욕심, 어느 누구도 절대로 믿지 못하는 의심, 언제든 쓸모가 없어지면 배신할 수 있는 변심이 그것이다.’ 이를 최고의 신념처럼 자랑하는 재벌 총수는 사람들에게 세 개의 심보를 휘둘러서 부와 명예, 권력을 장악했다. 하지만, 드라마에 나오는 그의 얼굴에서 진정한 기쁨은 찾을 수 없고 마음속은 텅 빈 듯이 보였다.

그가 자랑한 욕심, 의심, 변심은 그에게만 있는 특별한 심보가 아니다. 누구나 속내를 한 꺼풀 들춰내면 다 들어 있는 것이다. 혹여 다른 사람을 향해 남발할까 봐 그 심보를 쟁여두고 있을 뿐이지, 오장육부처럼 날 때부터 우리에게 있던 것들이다.

그렇다면 마음이 만족하는 새로움을 위해 이 심보들을 사용해보자. 단, 목표 지점을 바꿔 외부인이 아닌 나에게 겨냥해야 한다. 욕심과 의심과 변심을 부메랑처럼 돌려 나 자신에게 향하도록 하면, 이전에 몰랐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나만 위하던 이기적인 욕심과 결별하게 되고, 내가 옳고 성실하다는 자기 신뢰에 대해서도 강한 의심을 품게 된다. 또한, 선행을 베풀 수 없는 나의 실체에 등 돌리는 변심도 단행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내 마음부터 바꾸는 것이 인식의 변화다. 이를 통해서 보이는 세계가 달라지면 삶도 자연스럽게 새로워진다.

이 상태가 솔로몬이 마지막으로 이야기한, 마음의 세계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이 세계에 첫발만 내밀면 그다음은 ‘자동 라인’을 따라 저절로 흘러간다. 새가 날갯짓으로 중력을 이겨내고 공기의 흐름을 타면 저절로 날아가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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