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차가 한 잔 생각나는 날씨다. 찬바람에 꽁꽁 얼어붙은 손도 찻잔이 닿으면 스르르 풀리고, 경직되어 있던 깊은 속까지 풀어주는 차 한 잔에 몸과 마음이 따스해진다. 11월 초, 서울 연희동에 위치한 작은 찻집에서 자타공인 ‘티러버’tea lover로 불리는 최예선 씨를 만났다. 18년 전, 우연한 계기로 차의 세계에 흠뻑 빠져버렸다는 그는 특히 ‘홍차’의 매력을 알리려고 에세이집과 만화책을 출간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차茶는 개인의 취향을 넘어, 사람 사는 이야기가 더해지는 곳이며 더 넓은 세계로 안내하는 역할을 한단다. 그에게 차 이야기를 들어본다. 

작가님이 주문한 차 이름이 무엇인가요? 

크림 얼그레이에요. 향을 한 번 맡아보시겠어요? 은은하게 크림 향이 나지요. 얼그레이는 홍차에 베르가모트 향이 가미된 것인데, 여기에 크림 향을 더 첨가한 것입니다. 우리 삶에 다양한 표정이 있듯이 차에도 다양한 맛과 향이 있어요. 하지만 그걸 경험해보기 전까진 ‘쌉싸름한 맛이 나는 것이 녹차다. 씁쓸한 맛에 색이 붉은 것이 홍차다.’ 이렇게 생각하기 쉬워요. 저도 그랬고요. 

그런데 알고 보면 녹차, 홍차, 백차, 황차, 청차, 흑차…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차들이 있어요. 찻잎 자체도 종류가 많고, 찻잎의 산화도에 따라, 산지에 따라 달라요. 또한, 마시는 사람이 우려내는 횟수와 방법에 따라, 조합법에 따라 같은 차도 다른 맛을 냅니다. 

여러 번 마셔봐야 참맛을 알 수 있는 차가 있고, 누가 먹어도 호불호가 갈리지 않는 차가 있어요. 수많은 차 중에 내 취향을 찾아보는 것, ‘이 사람은 어떤 차를 좋아할까?’하고 고민하며 지인들을 위한 차를 끓여보는 것도 즐거움이지요. 

차의 매력에 빠지게 된 지 꽤 되셨다고요. 

잡지사 기자로 일하던 시절 어느 겨울날, 한 통의 차를 선물 받았어요. 차 이름도 정확히 몰랐지만, 차에 담긴 시나몬 향기와 새콤 달콤 말린 과일 조각 향기가 좋았어요. 겨우내 그 차를 먹었죠. 그런데 몇 년 후, 직장을 그만두고 프랑스로 유학을 갔을 때 갑자기 그 맛이 그리웠어요. 그때 처음으로 차를 사러 가게에 가봤어요. 진열대를 가득 채운 검은색 통들을 보고 정말 놀랐어요. ‘이렇게 많은 맛과 향이 있다니!’ 그날 구매한 차를 마시며 타지에서 느꼈던 외로움과 고향의 향수를 달랬습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제 홍차 라이프가 시작됐죠. 

처음에는 여러 종류의 차도 사보고, 찻잔도 모아보고, 프랑스와 영국 등 홍차 문화가 잘 발달한 곳을 열정적으로 경험해보려 했어요. 반면에 최근에는 매일 마시는 차를 바라보며 ‘우리 차 문화는 어떻지?’ ‘홍차로 세계사가 어떻게 격동했지?’ ‘인도에서는 차를 어떻게 재배하지?’와 같은 질문을 던져봐요. 세계사적이거나 동시대적 시각에서 예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차 문화를 살펴보고 사회적으로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등 다각적으로 차를 보려고 합니다.

알고 보면 흥미로운 ‘차 이야기’ 하나 들려주신다면요. 

프랑스의 대표적인 차 브랜드로 1854년에 시작된 ‘마리아주 프레르MARIAGE FRÈRES’가 있어요. 여기서 ‘프레르’란 형제라는 뜻이고 ‘마리아주’는 누군가의 이름(성)이에요. 이곳을 창업한 ‘마리아주 형제’라는 뜻이죠. 프랑스에서 마리아주 프레르 매장에 처음 방문해 차 종류를 살펴봤을 때 차 통에 적혀있는 이름들이 정말 흥미로웠어요. 물론, ‘Imperial 황제’라는 단어가 붙어 있어 직관적으로 이미지가 그려지는 차 이름도 있지만, 사람 이름을 딴 차들이 있거든요. ‘알렉산드라 다비드 넬’이라는 차가 있어요. 이건 여성의 이름을 딴 것이거든요. ‘이 사람이 누굴까?’ 궁금했어요. 찾아보니 19세기의 여성 모험가였더라고요. 그 차 안에는 그가 갔던 여러 나라에서 구할 수 있는 향신료가 들어 있었어요. 실제 그 맛을 보면 굉장히 묘해요.(하하) 

이렇게 알게 된 차의 숨겨진 이야기가 많아요. 차에 어느 지명의 이름이 붙어 있기도 했는데, 알고 보니 차의 무역이 무척 활발했던 곳이었죠. 반면에, 영국에서는 차 문화를 자신들이 오래 전부터 지켜온 전통으로 생각하기에 차 이름에도 전통을 강조하는 편이에요. 프랑스 차와는 달리, 그 이면에 담긴 스토리가 많지 않아요. 예를 들면 그레이 백작이라는 뜻의 ‘얼그레이Earl Grey’, 영국 왕세자를 뜻하는 ‘프린스 오브 웨일즈Prince of Wales’와 같은 식이지요. 영국과 프랑스 둘 다 차를 즐기는 나라이지만 차를 생각하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어요. 

흥미롭네요. 최근에 출간한 <오늘은 홍차> 1,2권에도 ‘차’에 대한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는데, ‘홍차와 사람 이야기’를 중심으로 풀어내셨더군요. 

첫 에세이를 낼 땐 홍차에 대한 개인 경험을 비롯해 차와 관련한 미술, 역사 등의 이야기도 함께 적었어요. 그 후에 한 출판사에서 홍차를 소재로 한 만화책을 출간해보자는 제안을 받았죠. 홍차와 그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에세이로 풀 수 있는 이야기도 있지만, 만화 속 인물과 사건을 통해서 전할 수 있는 차의 정서와 분위기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책을 보면 ‘홍 마담’이라는 인물이 어느 골목에 홍차 가게를 여는데요. 그곳이 예전에 제 작업실이 있던 연남동의 분위기와 비슷해요. 오래된 시장과 마을이 가까운 어느 길목에 미스터리하고 멋스러운 찻집 주인이 등장하는 컨셉을 정했죠. 그 찻집에 한 사람 한 사람씩 오면서 그들의 삶의 이야기가 펼쳐지게 되고요. 등장인물은 30대 직장인, 40대 주부, 50대 중년 남성 등 다양합니다. 각기 다른 고민을 안고 살아가던 이들이 홍차 가게의 테이블 위로 모여 때론 위로를, 때론 용기를 얻는 따뜻한 모습을 그려나갔죠. 살다 보면 속앓이를 하기도 하고, 지칠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이런 홍차 가게가 하나씩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하하) 아무튼, 무엇보다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나서 ‘차 한번 마셔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좋겠다 싶었죠. 

도서 <오늘은 홍차> 1,2권 홍차 입문서로 제격인 책. 티테이블에 쌓인 삶의 이야기, 고민하고 때론 기뻐하는 감정의 이야기, 일상이 일상을 치유해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홍차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으며, 홍차를 사랑하게 되는 만화다.
도서 <오늘은 홍차> 1,2권 홍차 입문서로 제격인 책. 티테이블에 쌓인 삶의 이야기, 고민하고 때론 기뻐하는 감정의 이야기, 일상이 일상을 치유해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홍차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으며, 홍차를 사랑하게 되는 만화다.

차를 통해 누군가와 이어졌던 즐거운 기억이 있으실 것 같아요. 

처음 차의 매력에 눈을 떴을 때, 제 작업실에 여러 사람을 초대했어요. 차도 나눠 마시고, 책을 함께 읽거나, 외국어를 배울 때도 있었죠. ‘차’라는 공감대를 바탕으로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차’ 덕분에 알게 된 좋은 분들이 많아요.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종종 연락을 주고받는데, 요즘엔 그분들이 자신의 작업실에서 다양한 모임을 열어요. 그런 걸 보면, 기분이 좋지요. 

<오늘은 홍차>에 등장하는 인물들 또한 홍차를 인연으로 알게 된 지인들과 닮아 있어요. 1권에 등장하는 노리코 선생님. 책에서는 일본에서 다실을 운영하는 인물로 등장해요. 전통 방식을 고수하며 차를 끓이는 그의 다실은 완벽한 차의 세계라 불리는 곳이에요. 그런데 노리코 선생님은 그곳을 떠나 세계 곳곳을 다니며 사람을 만나는 여행을 시작해요. 차를 함께 즐기고, 때론 도움의 손길을 전하고,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일에 끌려서요. 실제 제가 만난 노리코 선생님은 런던의 한 대학교 언어학 교수입니다. 한두 달 시간이 날 때면 다양한 언어를 배우고자 비행기에 오르는데 한번은 한국어를 배우려 서울에 오신 적이 있었어요. 그때 교수님이 지인을 따라 저희 작업실에 오시면서 서로 알게 되었어요. 영국에서 오신 분이라 그런지 제게 늘 차를 선물해주셨어요. 차를 마시는 동안 우리는 하나로 이어졌어요. 그분을 모델로 한 책 속의 ‘노리코 선생님’은 제가 되고 싶고, 기대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힘겹게 산을 오르는 나에게 누군가 내밀어준 따뜻한 손 같아. 도와줄 테니 힘을 내라고.”로즈 히말라야는 마리아주 프레르의 작품이다. 해발 1,820미터인 아리아 다원의 맑고 깊은 다르질링 찻잎에 장미 에센셜 오일을 가볍게 섞어 자연스러운 장미 향 홍차를 구현했다. 이외에, 장미의 매력을 제대로 읽어낸 차들이 있다. 홍차에 장미 꽃잎이 섞인 잉글리시 로즈. 백차에 장미 꽃잎을 듬뿍 넣고 레몬그라스를 더한 물랭루즈도 경험해볼 만하다. 위 그림은 <오늘은 홍차> 2권 p.198.
“힘겹게 산을 오르는 나에게 누군가 내밀어준 따뜻한 손 같아. 도와줄 테니 힘을 내라고.”로즈 히말라야는 마리아주 프레르의 작품이다. 해발 1,820미터인 아리아 다원의 맑고 깊은 다르질링 찻잎에 장미 에센셜 오일을 가볍게 섞어 자연스러운 장미 향 홍차를 구현했다. 이외에, 장미의 매력을 제대로 읽어낸 차들이 있다. 홍차에 장미 꽃잎이 섞인 잉글리시 로즈. 백차에 장미 꽃잎을 듬뿍 넣고 레몬그라스를 더한 물랭루즈도 경험해볼 만하다. 위 그림은 <오늘은 홍차> 2권 p.198.

어떤 점에서 그런가요?

흔히 ‘차’라고 하면 정갈하게 정리된 테이블을 떠올리지요. 그런 분위기를 느끼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거예요. 그것도 좋지만, 저는 개인적인 취향을 넘어서 ‘차’를 통해 더 다양하고 넓은 세계로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첫 번째 만화책 스토리를 집필하던 당시 네팔에 지진이 일어났어요.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네팔은 좀 먼 나라지만,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렇지 않았어요. 우리가 마시는 차가 오는 곳이니까요. ‘차’를 대하면서 국제 정세나 기후, 환경 문제, 공정무역 등 점점 관심이 넓어지고 있어요. 뜨거운 지역에서 어린잎을 따는 ‘정성스러운 손’부터 이를 곱게 말리는 ‘수고로운 손’… 홍차 가게에 예쁘게 진열하는 ‘노련한 손’까지 찻잎이 차가 되어 우리에게 도착하기까지 수많은 연결이 이어지니까요. 

<오늘은 홍차> 2권의 주제가 ‘어우러짐’이지요. 이와 관련이 있는 걸까요?

그런 셈이죠. 2권은 ‘페어링pairing’을 주제어로 삼았어요. ‘짝을 이루다’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는 와인이나 술을 마실 때 그와 짝꿍처럼 어울리는 음식을 택하는 일을 말합니다. 이 책에 실린 에피소드에는 다양한 페어링의 장면이 나와요. 차와 다른 식물, 차와 과자, 차와 찻잔, 차와 사람…. 서로 다르기에 함께하고, 서로 어우러져서 그다음으로 나아가는 풍경을 담고 싶었습니다. 세상은 복잡하지만 한 잔의 차 속에서는 그 복잡함도 하나로 어우러져요. 좋은 차는 좋은 사람을 부릅니다. 차는 언제나 친구를 만들어주죠.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차 한 잔 마시자고 권해보세요. 

“차를 마시면 우린 서로 이어져 있는 거예요. 우리가 어디에 있든, 언제를 살든…” 1권에 등장한 노리코 선생님은 이렇게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겼다. 차, 차이, 테, 티… 세상의 언어들 중 차를 부르는 말은 서로 닮았다. 차를 마시면 서로 이어져 있다는 그 말에 담긴 비밀은 언어라는 주술에 있을지도 모른다. 위 그림은 <오늘은 홍차> 1권 p.247.
“차를 마시면 우린 서로 이어져 있는 거예요. 우리가 어디에 있든, 언제를 살든…” 1권에 등장한 노리코 선생님은 이렇게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겼다. 차, 차이, 테, 티… 세상의 언어들 중 차를 부르는 말은 서로 닮았다. 차를 마시면 서로 이어져 있다는 그 말에 담긴 비밀은 언어라는 주술에 있을지도 모른다. 위 그림은 <오늘은 홍차> 1권 p.247.

겨울날, 소중한 사람과 함께 나누면 좋을 차를 추천해주세요.

우선, 크리스마스 티를 추천하고 싶어요. 기자 시절 제가 처음 홍차 맛을 알게 되었던, 그 차가 바로 크리스마스 티거든요. 크리스마스 티는 사과, 오렌지, 생강, 계피 등이 섞여 있는 홍차에요. 크리스마스를 연상하게 하는 유쾌한 기분이 들게 하죠. 크리스마스 티의 기본 레시피는 어디를 가나 비슷하지만, 브랜드별로 바닐라를 넣기도 하고, 초콜릿을 넣기도 하고요. 개인적으론 마리아주 프레르 제품인 ‘에스프리 드 노엘’을 제일 좋아합니다. 

‘로즈 히말라야’도 좋아요. 히말라야 지역에서 재배된 찻잎에 장미향과 장미꽃잎이 추가된 것이죠. 장미향을 부담스러워하는 분들도 있는데 이 차는 향이 은은해서 시도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섬세하고 부드러운 맛이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밀키우롱’을 소개해드려요. 달콤하고 고소한 연유향이 나요. 우롱차 중에는 향을 따로 가미하지 않아도 제다 과정에서 버터의 향이 자연스레 나오는 특별한 차들이 있는데요. 제가 추천하는 밀키우롱은 연유향이 살짝 가미되어 따뜻하고 포근한 기분이 드는 차랍니다. 사실, 어떤 홍차라도 두루두루 드셔보시면 좋겠어요. 차 문화에 정답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적인 차도 좋고, 홍차도 좋고, 티백 차도 좋습니다. 다 그 나름의 고유한 즐거움이 있으니까요.

그를 만나기 전 ‘차’에 이토록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는 줄 몰랐다. 무심코 마시던 ‘차’였는데 그 속에는 수백 년 전을 살았던 누군가의 인생이, 세계의 문화와 역사가, 누군가가 받았을 위로의 따스함이, 찻잔 앞에 둘러앉았던 많은 사람의 대화 소리가 담겨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봐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며 짓는 웃음도, 흘리는 눈물 한 방울도, 고민도, 분노도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수만 가지 이유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인터뷰를 마치며 생각했다. 삶 속에 만나는 모든 것을 다 깊이 알 수는 없겠지만, 가끔은 그냥 지나치던 것들을 다시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도 좋겠다고. 또 종종 사람들과 만나 이를 나누며, 서로의 이야기를 타고 다른 세계로 떠나보는 것도 즐겁겠다고 말이다. 아무튼, 올겨울 마시고 싶은 홍차 한 잔 골라보는 것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 

글쓴이 최예선

저널리즘을 전공하고 잡지사 에디터로 일했다. 이후 프랑스로 떠나 미술사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생과 함께하면 좋을 두 가지, 예술과 홍차를 얻었다. 여러 매체에 미술, 건축, 여행, 문화와 관련한 글을 쓰고 있으며 다수의 책을 출간했다. 건축 분야 도서로 <절집 오르는 마음> <모던의 시대, 우리 집>외 2권을 출간했으며, 미술 에세이로 <밤의 화가들>을 집필했다. 홍차와 관련한 도서로는 <홍차, 느리게 매혹되다>, <오늘은 홍차> 1,2권이 있다. 

저작권자 © 데일리투머로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